내맘대로 세계사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 되다

딸기21 2012. 9. 12. 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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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아직도 미국이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무한한 가능성의 나라임을 의심하는 사람이 있다면, 아직도 선조들의 꿈이 우리 시대에도 살아있는가 묻는 사람이 있다면, 민주주의의 힘에 의문을 품는 사람이 있다면, 오늘 밤이 바로 당신의 의문에 대한 대답입니다.

학교와 교회 투표소 주변에 늘어선 처음 보는 긴 줄과 사상 최고의 투표율, 이번만은 달라져야만 한다고, 내 목소리가 바로 그 변화라고 믿고 평생 처음으로 투표를 하러 나와 서너 시간씩 기다렸던 사람들이 바로 그 대답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젊은이와 노인, 부자와 가난한 사람, 민주당원과 공화당원, 흑인과 백인, 라틴계, 아시아계, 아메리칸 인디언, 동성애자, 이성애자, 장애인, 비장애인... (중략) 우리가 앞으로 어떤 성과를 이룰 수 있을지에 대해 냉소하고 걱정하며 의문을 표한 이들도 많았습니다. 그들의 손까지 역사의 활로 이끌어 더 나은 미래라는 희망을 향해 시위를 당기게 한 힘, 그것이 모든 의문에 대한 대답입니다. 여기까지 오는데 많은 시간이 걸렸지만 오늘 밤, 바로 지금, 이토록 중요한 순간, 미국에 변화가 오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끌어낸 변화입니다.”


미국 흑인 민권운동가 마틴 루서 킹 목사가 “나에게는 꿈이 있다”고 외친 지 45년이 흐른 2008년, 민주당의 버락 오바마(Barack Hussein Obama, Jr. 1961-)가 대선에서 승리했습니다. 


역사적인 ‘미국 사상 첫 흑인대통령’에 당선된 오바마는 버지니아 주 머내서스 프린스윌리엄 카운티의 한 박람회장에서 10만여 명의 지지자들을 앞에 두고 대선 승리연설을 했습니다. 오바마는 TV로 중계된 이 연설에서, 자신은 값진 기회를 잡은 것이라면서 미래를 향한 자신의 꿈을 통해 온 국민이 하나가 되어달라고 호소했습니다.


경쟁자는 다 아시다시피 존 매케인(John Sidney McCain III. 1936-.) 상원의원이었죠. 2008년 대선에 공화당 후보로 출마했으나 민주당의 오바마에게 고배를 마셨습니다. 

매케인은 미 해군사관학교를 졸업한 뒤 항공모함에 딸린 전투기 조종사로 복무했습니다. 1967년 베트남전에 참전했다가 포로로 잡혀 수년에 걸쳐 감금생활을 했지요. 당시 매케인의 아버지인 존 매케인 주니어(이 집안은 할아버지부터 3대가 이름이 똑같다능...)가 전쟁을 책임지는 미군 태평양사령부 사령관이었기에 매케인이 포로석방협상에서 우선 석방대상이 될 수 있었으나, 매케인은 부하 사병 포로들을 먼저 돌려보낸 채 적진에 남았다고 합니다. 


매케인은 1973년에야 하노이에서 석방돼 미국으로 돌아왔는데, ‘장교 매케인의 귀환’은 그 시대를 살았던 미국인들의 기억에 깊이 남아있다고 합니다.그해 4월에 대선을 앞둔 미국으로 출장을 갔는데, 궁금해서 미국 사람에게 물어봤습니다. 매케인이 베트남전 포로였다가 귀환해서 젊었을 때부터 유명했다는데 정말 그렇게 다 알 정도로 유명했냐고요. 대답해주신 분은 50대였는데, 그 또래 이상은 누구나 다 매케인의 귀환을 기억한다 하더군요. 


승리 연설에서 오바마는 매케인의 ‘오랜 애국적인 싸움’을 들며 전쟁영웅이었던 매케인을 치하하기도 했습니다. "그는 미국을 위해 우리로선 상상 못할 희생을 했으며, 미국은 그와 같이 용감하고 사심없는 지도자들의 노력으로 더 살기 좋은 국가가 됐습니다." 어쨌든 오바마의 승리연설, 상대에 대해서도 아낌없는 칭찬을 날려주는 센수...


오바마는 워낙 연설을 잘 하기 때문에, 아직 첫 임기도 안 끝난 현직대통령임에도 불구하고 연설문 사이트들이 많습니다. 

http://obamaspeeches.com/  여기도 그런 사이트 중 하나이고요.



이것은 올 여름에 바너드 칼리지 졸업식에서 연설할 때 모습... 


오바마가 누구인지 모르는 사람 없겠지만, 제맘대로 '현대사의 한 장면'으로 꼽아놨으니 다시 정리. 버락 후세인 오바마 2세는 1961년 하와이 호놀룰루에서 태어났습니다. 굳이 설명을 붙이자면 -_- 아버지 버락 오바마 시니어는 케냐인 유학생이었고, 어머니는 캔자스 주 위치타(Wichita) 출신의 10대 인류학도 앤 던햄(Stanley Ann Dunham. 1942-1995)이었습니다. 두 사람의 부모는 하와이 대학에서 만났지만 오바마가 두 살 때 헤어졌습니다.


오바마는 케냐 출신 유학생이었던 아버지가 떠난 뒤 하와이에서 외조부모, 어머니와 함께 자랐죠. 어머니가 인도네시아 출신의 롤로 수토로와 재혼한 뒤 10살 때까지 인도네시아 자카르타에서 학교를 다니다가 다시 하와이로 돌아와 청소년기를 보냈고... 수토로와 던햄 사이에서는 오바마의 이복 여동생인 마야가 태어났는데, 하와이에서 저는 마야를 만나기도 했답니다. 히히.


오바마는 호놀룰루로 돌아와 외조부모와 함께 생활합니다. 1977년 두 번째 결혼생활도 이혼으로 끝낸 어머니는 하와이로 돌아왔지만 케냐인 아버지는 좀처럼 만나기 힘들었습니다. 오바마의 아버지는 1982년 교통사고로 숨졌고 어머니는 1995년 53세의 나이에 난소암으로 세상을 떴습니다.


오바마는 뉴욕 컬럼비아 대학에서 정치학을 전공한 뒤 훗날 자신의 정치적 고향이 될 시카고에서 교회에 기반을 둔 지역공동체 조직가로 활동했습니다. 지역 활동가로 일하며 한계를 느낀 오바마는 1988년 하버드 대학 로스쿨에 진학했습니다. 재학 당시 오바마는 유서 깊은 대학 학술지인 <하버드 로 리뷰(The Harvard Law Review)> 사상 최초의 흑인 편집장을 지냈지요. 이를 계기로 1995년 젊은 나이에 자서전 성격의 첫 저서인 <내 아버지로부터의 꿈>을 출간하기도 했습니다.


오바마는 1995년 발표한 자서전 <내 아버지로부터의 꿈(Dreams from My Father)>에 외할머니가 자신에게 준 사랑과 영향에 대해 상세히 적었습니다. 하지만 늘 손자를 응원해온 외할머니는 오바마를 역사적인 첫 흑인대통령으로 선출해준 대선을 이틀 앞두고 하와이에서 숨을 거뒀습니다.


로스쿨을 졸업한 오바마는 시카고에 돌아와 민권 변호사로 활동합니다. 그러다 1996년 앨리스 파머(Alice Palmer. 1939-) 의원의 뒤를 이어 일리노이 주 상원의원에 선출되면서 정계에 입문했으며, 1998년과 2002년에 재선에 성공했습니다. 하지만 2000년 하원의원 후보 경선에서는 경쟁자의 절반에도 못 미치는 득표율로 떨어지는 수모를 겪었습니다.


오바마가 승부사 기질을 드러낸 것은 2003년입니다. 주 하원의원 후보에서도 밀린 오바마가 2003년 연방 상원의원직에 도전하겠다고 선언한 것이죠. 그 전 해부터 데이비드 액설로드 등 인맥을 결집하고 기금을 모으기 시작했던 터였습니다. 


2004년 6월 오바마는 보스턴에서 열린 민주당 전당 대회에서 존 케리(John Forbes Kerry. 1943-) 대선후보를 지지하는 기조연설을 맡게 됩니다. 전국 무대에서 무명이나 다름없던 오바마는 모두 900만 명의 시청자가 지켜본 이 연설을 통해 이름을 알립니다. 베르나르 앙리 레비가 쓴 <아메리칸 버티고>에 이 장면이 나와요. 당시 앙리 레비가 이 전당 대회를 구경하고 있었는데, 주인공인 케리보다도 겅중거리는 걸음으로 단상에 올라 지지연설을 한 신인 정치인 버락 오바마가 어마어마한 카리스마로 히어로가 됐다는 겁니다. 앙리 레비는 이 사람이야말로 미국사에 한 획을 그을 것이라는 예감을 받은 거겠죠...


몇 달 뒤 선거에서 오바마는 공화당의 중견 정치인 앨런 키스를 누르고 70%의 득표율로 압승, 일리노이 주를 대표하는 연방 상원의원에 선출됐습니다. 일리노이 주 선거 사상 가장 큰 표 차이로 기록된 선거였습니다. 오바마는 이로써 미국 사상 세 번째 흑인 연방 상원의원이 됐습니다. 당시 미 상원 내 유일한 흑인 의원이기도 했습니다.



2007년 2월 10일 오바마는 대선 출마를 선언했습니다. 이라크 전쟁 조기 종결, 의료보험 확대 등 선명한 정책도 내걸었습니다. 빌 클린턴(William Jefferson ‘Bill’ Clinton. 1946-) 전 대통령의 부인인 힐러리 로드햄 클린턴(Hillary Diane Rodham Clinton. 1947-) 상원의원과의 접전은 최초의 여성 대통령이냐, 최초의 흑인 대통령이냐 등 화두를 던지면서 많은 이들의 관심거리가 됐고 경선 투표율도 높아졌습니다. 2008년 6월 오바마는 민주당의 후보로 확정됐습니다.


올해에도 미국 대선이 있지요. 잠시 미국 대통령 선거제도 얘기로.


미국에서 빨간색은 공화당을, 파란색은 민주당을 상징하지요. 1인 1표 직접 선거로 대통령을 뽑는 한국과 달리 미국의 대선은 정당들을 대표하는 선거인단이 대선 후보에 투표하는 간접선거로 치러집니다. 선출된 선거인들이 각 주에서 투표를 실시하고, 이 투표에서 이긴 당이 그 주 선거인단의 표를 모두 갖게 되는 이른바 ‘승자독식’ 방식입니다. 대선 결과를 집계할 때에 민주당이 이긴 주는 파란색으로, 공화당이 이긴 주는 빨간색으로 표시됩니다. 양측이 경합해 예측이 어려운 주의 경우는 보라색에 빗대 ‘퍼플 스테이트(purple state)’라 부르기도 합니다.



역대 미국 대선에서 빨간 주, 파란 주의 판세를 표시한 지도들 

놀랍게도, 이런 적도 있었고요


이런 적도 있었네요



민주·공화 양당은 대선을 앞두고 후보를 선출하는 당내 경선을 주별로 실시합니다. 프라이머리(primary), 코커스(Caucus) 등으로 불리는 이 주별 당내 경선은 전통적으로 아이오와 주에서 테이프를 끊습니다. 이 때문에 아이오와 코커스, 즉 아이오와 당 대회는 양당 대선후보가 누가 될지를 판가름하게 해주는 시금석이 되곤 합니다. 디모인(Des Moines)은 아이오와 주의 주도로, 아이오와 코커스가 열리는 곳이기 때문에 대선이 치러지는 해가 되면 연초부터 각당 대선후보군들이 이곳에 모여 치열한 전초전을 벌이게 됩니다.


아이오와 코커스와 함께 미 대선에서 민주·공화 양당 당내 대선후보 경선이 가장 먼저 치러지는 곳들 중 하나는 뉴햄프셔 주의 주도인 콩코드(Concorde)입니다. 선거인단 규모는 2~3명에 불과하지만 초반 기세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역시 미디어의 시선이 집중되지요. 이런 관심지역 중 또 다른 곳은 사우스캐롤라이나 주의 주도인 찰스턴(Charleston)입니다. 


사우스캐롤라이나 주는 남부에서는 가장 먼저 민주·공화 양당의 대선후보 당내 경선이 시작되는 곳입니다. 특히 남부를 지지기반으로 하는 공화당에는 찰스턴에서 열리는 사우스캐롤라이나 주의 프라이머리 결과가 아주 중요하지요. 하지만 2008년 대선에서는 예비선거에 표를 던진 유권자의 55%가 아프리카계 미국인이었던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프라이머리는 각 당의 당내경선에 불과하지만, 아프리카계 유권자들의 높은 투표열기가 현실로 나타남으로써 ‘오바마 대세론’에 힘을 실어줬습니다.


오바마는 태생적 조건은 선거캠페인 기간 여러 차례 비방전에 휘말리는 구실이 됐습니다. ‘출생지 논란’이 대표적입니다. ‘버서(birther)’라고 불리는 이들은 지금까지도 오바마가 미국이 아닌 케냐에서 태어났으며, 따라서 대통령이 될 자격이 없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출생지 논란과 함께 ‘오바마는 무슬림’이라는 종교 논란도 벌어졌습니다.


오바마는 이 같은 비방에 대해 ‘버락 오바마의 진실을 알자’라는 웹사이트(www.fightthesmears.com)까지 만들어 적극 대응했습니다. 심지어 이례적으로 하와이 주 정부가 오바마의 출생과 관련된 서류를 공개하는 해프닝까지 있었습니다.


뜬소문 속에서도 오프라 윈프리를 비롯해 할리웃 톱스타들은 오바마를 공개적으로 지지했습니다. ‘그래, 우리는 할 수 있다(Yes, we can)’는 슬로건으로 상징되는 변화와 긍정, 희망의 메시지는 많은 사람들의 공감을 불러일으켰습니다.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를 이용하거나, 소액 지지자들을 결집해 낸 캠페인 방식도 눈길을 끌었습니다.


마침내 2008년 11월 오바마는 52.9%의 지지율로 45.7%를 얻은 매케인을 누르고, 인종이라는 분열적인 이슈를 뛰어 넘어 아프리카계 미국인으로는 처음으로 미국 대통령에 선출됐습니다.


맨 앞에 인용한 것은 대선 승리 뒤 오바마가 국민들에게 들려준 첫 연설인데, 링컨과 케네디 등 미국인들의 우상이던 역대 대통령들의 연설을 의도적으로 끌어와 미국인들의 정서를 자극하며 통합을 호소하고 있습니다.


링컨의 경우 어려운 환경을 딛고 미국 대통령 자리에 올랐다는 점, 말솜씨가 뛰어나고 연설을 잘했다는 점, 법률가 출신이고 일리노이가 정치적 고향이라는 점 등 여러 공통점을 갖고 있지요. 젊은 대통령 케네디의 경우 사상 첫 아일랜드계 가톨릭 대통령이었다는 점, 젊은 세대의 아이콘이었다는 점 등에서 오바마와 자주 비교되는 인물입니다. 


오바마는 링컨의 유명한 게티스버그(Gettysburg) 연설에서 ‘국민의,국민에 의한,국민을 위한 정부’라는 구절을 빌려오고, 링컨의 취임연설에서는 ‘우리는 적이 아니라 친구입니다. 우리의 감정이 상했다고 하더라도, 애정의 결속을 깨버려서는 안 됩니다’라는 구절을 따와 통합을 강조했습니다. 케네디의 연설에서는 단기적인 성과를 노린 섣부른 기대를 경계해야 한다는 점, 미국 뿐 아니라 세계의 적국과 우방국들을 향한 당부와 경고를 빌려왔습니다. 


2009년 1월 취임한 오바마는 ‘미래에 대한 희망’을 준 인물로 꼽혀 그 해 노벨평화상을 수상했습니다. 노르웨이 노벨위원회는 “오바마 만큼 사람들에게 미래에 대한 희망을 준 인물도 극히 드물다”며 “인류 협력과 국제 외교를 강화하기 위해 특별하게 노력한 그에게 시상을 결정했다”고 설명했습니다.


오바마가 미국 대통령이 된 것이 엊그제같은데, 벌써 4년이 지났네요. 요즘 저도 외신들 들여다보지 않아 영 소식이 깜깜한데... 미국 대선 때 되면 가장 유용한 사이트, http://www.realclearpolitics.com/ 에 들어가봤습니다. 아래 그래픽은 며칠 전 것들입니다.



8월 이후로 공화당의 미트 롬니가 엄청 쫓아왔고



특히 최근 들어서는 엎치락뒤치락... 롬니가 치고 올라가나 했더니, 민주당 전당대회 이후로 다시 오바마가 반등하는 기미... 


미국 대선, 어떻게 될지 궁금합니다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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