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맘대로 세계사/동유럽 상상 여행

50. 1999년 코소보 위기

딸기21 2016. 12. 11. 17:02
728x90

50. 1999년 코소보 위기 


1966년 티토는 내 세르비아 공화국 안에 위치한 코소보 자치주에 특권을 주어 유고슬라비아 연방 차원에서 공화국들과 동등한 투표권을 갖도록 해줬습니다. 코소보의 자치권이 강화되자, 알바니아계 주민들의 자치주 정부 참여가 크게 늘었습니다. 그 이전까지 자치주 인구의 90%를 차지하는 알바니아계 주민들은 세르비아계 정부의 통치를 받으며 차별을 겪어야 했거든요.


상황이 바뀌자 자치주의 새로운 공산당 정부를 장악한 알바니아계는 보복 차원에서 ‘소수민족’이 된 세르비아계에 대한 역차별 조치에 들어갔습니다. 뿐만 아니라 자치주를 세르비아와 대등한 별도의 공화국으로 승격시켜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1389년 코소보 전투를 그린 그림. http://www.varvar.ru


티토 사후 집단지도체제로 운영되던 유고슬라비아 연방 지도부는 “코소보 자치주의 공화국 승격은 연방의 헌법에 위배된다”며 거부했습니다. 이로써 코소보 알바니아계의 바람은 무위로 돌아갔습니다. 헌법 상 유고슬라비아의 ‘민족들’은 각각의 공화국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유고슬라비아 외부에 알바니아 민족의 나라인 알바니아라는 나라가 존재하고 있었기 때문에, 코소보 내 알바니아인들은 공화국을 구성할 권리가 없는 연방 내 ‘소수민족’의 지위였을 뿐이었습니다.


코소보의 알바니아 민족주의는 이런 현실에 불만을 품은 지식인들과 노동자들, 대학생들 사이에 널리 퍼졌습니다. 1981년 이미 이 지역에서는 알바니아계의 시위와 소요가 일어난 바 있습니다. 당시 유고슬라비아 연방군(JNA)의 3분의1이 코소보에 배치돼 폭동을 진압했으나, 이 사건을 계기로 자치주 내에선 소수민족이었던 세르비아계 사이에는 편집증적인 민족주의가 싹텄습니다.



세르비아계 언론들은 알바니아계가 가혹행위를 했다는 과장된 소문들을 확대재생산했고, 세르비아계 주민들 사이에는 알바니아계에 대한 혐오 감정이 퍼졌습니다. 


코소보 세르비아계의 편집적인 민족주의가 폭발한 것은 1989년이었습니다. 그 해 세르비아계는 중세 세르비아가 오스만 투르크 군을 맞아 역사적인 승리를 거둔 코소보 폴리예 전투 600주년 기념식을 열었습니다. 이 때 밀로셰비치는 공개적으로 코소보 세르비아 민족주의자들을 지지, 서로 분리되고 구별되는 ‘민족들’로 이뤄진 통일 연방국가라는 유고슬라비아의 정체성에 대한 논란을 수면 위로 띄워 올렸습니다. 밀로셰비치의 발언은 명백히 세르비아계의 우위를 주장한 것으로, 결국 유고슬라비아의 해체를 불렀습니다.



세르비아 공화국 대통령이던 밀로셰비치는 그 해 코소보와 보이보디나의 자치 권한을 줄이고 연방군을 코소보에 주둔시켜 점점 늘어가는 알바니아계의 시위와 소요를 억눌렀습니다. 


미국 해외원조국(USAID)가 지원해주는 채소 작업장에서 일하는 여성들. _ USAID



이런 상황은 1990년 내내 계속됐습니다. 코소보의 알바니아계 지식인들과 관리들이 줄줄이 체포됐습니다. 세르비아는 1990년 공화국 헌법을 고쳐 그나마 남아 있는 코소보 자치주의 권리조차 모두 지우려 했습니다. 알바니아계의 시민권까지 제한하고, 언어와 문화를 말살하기 위한 조치들을 취했습니다. 코소보 알바니아계는 그럴수록 더욱 코소보의 공화국 승격을 주창했고 세르비아계의 탄압도 가열됐습니다. 알바니아계는 재산권 행사도 제한받았다. 새 고용법이 만들어져 알바니아계 8만 명이 일자리에서 쫓겨났습니다.


1990년 9월 일군의 코소보 알바니아계 민족주의자들이 코소보 공화국의 독립을 선언했습니다. 그 후 1년이 지나지 않아 독립을 원하는 알바니아인들이 주민투표를 실시해 독립 의지를 과시했으나 이는 세르비아 당국의 탄압만 가중시킬 뿐이었습니다. 


kosovo-metochia.org


1991년 말이 되자 유고슬라비아는 슬로베니아, 크로아티아,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마케도니아, 그리고 유고슬라비아 연방이라는 이름을 고집한 세르비아·몬테네그로 연방국가(분리독립 이전의 연방을 ‘구 유고 연방’, 세르비아와 몬테네그로로 구성된 유고 연방을 ‘신 유고연방’이라 부르기도 합니다)의 5개 나라로 갈라졌습니다. 



1991년 말 세르비아와 크로아티아의 전쟁이 한창 진행되던 상황에서, 이웃한 알바니아는 탄압받는 코소보 내 알바니아계 동포들을 돕기 위해 일방적으로 코소보 공화국의 독립을 승인했습니다. 


1992년 5월 코소보 알바니아계는 비밀 투표를 실시해 이브라힘 루고바 Ibrahim Rugoba를 코소보 공화국 정부의 대통령으로 선출했습니다. 정당 지도자이자 지식인인 루고바는 간디 스타일의 평화주의였습니다. 그는 코소보에서 세르비아 통치의 정당성을 부인하면서 세르비아계 정부에 비폭력 저항으로 맞섰습니다. 이 투쟁이 국제적으로 알려지면서 코소보 알바니아계의 민족적 요구를 지지하는 여론이 높아졌습니다.


이브라힘 루고바. _ www.nato.int


★이브라힘 루고바(1944-2006년)


코소보 정치인. 프랑스 소르본느 대학교를 나와 교수·작가로 활동하다 정치에 뛰어들었습니다. 1990년대 신유고연방(세르비아-몬테네그로의 전신)의 세르비아계 지도자 밀로셰비치 대통령에 맞서 알바니아계의 비폭력 평화적 저항을 이끌었습니다. 비폭력 지도자로 서방에 명성을 얻어 사하로프 인권상을 수상하기도 했습니다.
2001년 11월 알바니아민족동맹(LDK)을 이끌고 코소보 자치주에서 실시된 첫 총선에 당선됐으며 이듬해 3월에는 자치정부의 초대 대통령으로 선출됐습니다. 그러나 2006년 대통령 임기 도중 폐암으로 대통령궁에서 숨을 거뒀습니다. 


그 해 내내 보스니아에서는 전쟁이 계속됐고 코소보 알바니아계의 처지는 더욱 나빠졌습니다. 세르비아계는 코소보 내 알바니아계의 땅을 몰수해 보스니아에서 넘어온 세르비아계 난민에게 넘겨줬습니다. 코소보에서 세르비아계의 비중을 높이기 위한 식민 정책의 일환이었지요. 점점 더 많은 알바니아계가 일자리를 빼앗겼습니다. 대학에서 쫓겨나거나 체포되는 사람들도 늘었습니다. 


상황이 악화되자 알바니아계 사이에서도 루고바 정부에 대한 실망감이 커져갔습니다. 특히나 나토와 유럽연합이 보스니아 내전을 종식시키겠다며 어이없게도 1995년 말 데이튼 평화협정을 통해 밀로셰비치를 끌어안자 루고바는 더욱 무능한 인물로 낙인찍혔습니다.


1995년 11월 미 공군 라이트패터슨 기지에서 데이튼 평화협정에 서명하는 밀로셰비치(왼쪽 세번째),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공화국 대통령 알리야 이제트베고비치, 크로아티아 대통령 프란조 투지만. _ 미 공군



1996년과 97년 코소보 알바니아계 민족주의자 그룹 일부는 루고바에 반대하며 코소보 해방군(KLA)이라는 게릴라 조직을 결성했습니다. 이들은 1998년 봉기를 일으켰지만, 결과는 세르비아 군인들의 반격과 알바니아계에 대한 가혹행위였습니다. 세르비아 민족주의에 갈수록 경도된 밀로셰비치는 코소보 세르비아계의 알바니아계를 탄압하는 것을 계속 방치했습니다. 


이에 대한 국제적인 비난이 고조됐지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았습니다. 1998년 말이 되자 밀로셰비치의 수하에 있는 연방군이 KLA 진압에 나섰으며 세르비아 극우 경찰조직과 준군사조직들도 알바니아계에 대한 가혹행위를 자행했습니다. 코소보 알바니아계 수천 명이 테러 공격을 당했지만 미국과 서유럽국들은 폭력사태를 종식시키겠다면서 밀로셰비치와 무의미한 숨바꼭질 외교전만 벌이고 있었습니다.


1999년 초까지 코소보 내 연방군 진주가 계속 늘었고 가혹행위도 더욱 심해졌습니다. 서방은 이 사태를 끝내기 위한 마지막 노력으로 프랑스의 랑부이예에서 평화협정을 체결하도록 중재했으나 세르비아계와 알바니아계는 한 치의 양보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 해 3월 세르비아계는 KLA에 대한 군사공격을 하면서 끔찍한 ‘인종청소’를 저질렀습니다. 100만 명이 넘는 알바니아계가 난민이 되어 이웃한 알바니아와 마케도니아로 들어갔습니다. 


1999년 코소보 사태 때 피란길에 오른 알바니아계 난민들. _ BBC


미군 주도 하에 나토군은 2달 동안 세르비아를 공습, 결국 6월에 밀로셰비치의 항복과 코소보에서의 철군을 이끌어냈습니다. 나토 평화유지군이 코소보로 들어가 난민들을 재정착시키고 폭력 방지활동을 벌였습니다. 그러나 나토군이 주둔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번에는 알바니아계가 세르비아계에 대한 ‘인종청소’ 보복을 했지요. 


코소보 독립 선언


2008년 2월 17일 코소보는 세르비아로부터의 독립을 일방적으로 선언했습니다. 하지만 독립국가는 국제사회의 완전한 승인을 얻지 못한 상태입니다. 미국과 유럽연합 국가들은 대부분 독립을 지지했으나 세르비아는 강력 반발했고 러시아도 세르비아 편에 섰습니다. 그리스와 루마니아 등도 일방적 독립선언에 우려를 표했습니다. 


현재 코소보의 독립을 승인한 나라는 60개국이 조금 넘습니다. 한국도 2008년 3월 코소보를 주권 독립국가로 공식 승인했습니다. 평화유지군을 코소보에 주둔시켰던 유엔은 2008년 코소보의 새 헌법이 발효됨에 따라 치안권을 이양했고, 치안감독권도 유럽연합으로 넘어갔습니다. 인구는 약 180만명. 세르비아는 EU 회원국이 아니고 유로화도 쓰지 않지만 코소보는 유로화를 쓰고 있답니다.



'발칸인사이트'라는 매체는 12월 8일 "코소보 내 세르비아계가 알바니아계 쪽 거주지역과 이어지는 다리에 콘크리트 분리장벽을 세우려 해서, 당국이 막았다"는 기사를 실었습니다.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격리시키려고 세우는 분리장벽, 미국의 도널드 트럼프가 멕시코 쪽 국경에 세우겠다고 하는 장벽과 비슷하게 '인종적 격리'를 하려는 물리적 장벽이지요. 코소보 문제는 여전히 '진행 중'입니다.

728x9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