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기가 보는 세상/아시아의 어제와 오늘

강단에서 마지막 순간을 보낸 인도의 ‘미사일맨’ 압둘 칼람

딸기21 2015. 7. 28. 16: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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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생 ‘꿈’과 교육의 중요성을 설파하고 젊은이들과 대화하기를 즐겼던 사람다웠다. 83세의 노과학자는 젊은이들 앞에서 머나먼 우주 어딘가에 있을 미래의 행성을 이야기하다가 쓰러져 마지막 순간을 맞았다.

 

APJ 압둘 칼람 전 인도 대통령이 27일 타계했다. 인디아투데이 등 인도 언론들에 따르면 칼람은 이날 북동부 메갈라야주 실롱에 있는 실롱경영대학에서 강연을 하다가 심장마비로 쓰러졌다. 칼람은 곧바로 병원에 옮겨졌으나 2시간 만에 숨을 거뒀다. 이날 아침까지만 해도 그는 트위터에 “사람이 살 수 있는 행성에 대해 강의하러 실롱에 간다”는 글을 올리며 기대를 표시했었다.


인도 군 장교들이 28일 북동부 구와하티의 공군기지에서 APJ 압둘 칼람 전 대통령의 주검을 특별기에 싣기 위해 운구하고 있다. 구와하티/AFP연합뉴스


칼람은 28일 특별기로 델리에 운구됐고, 정부는 7일간의 애도 기간을 선포했으며 모든 관공서는 조기를 걸었다. 프라납 무케르지 대통령과 나렌드라 모디 총리 등은 물론이고 발리웃 스타들도 앞다퉈 애도 글들을 트위터에 올렸다. 모디는 “인도는 위대한 과학자이자 뛰어난 대통령, 무엇보다 영감을 주는 한 인간을 잃었다”고 썼다. 모디를 비롯한 각료들은 델리에 도착한 칼람의 주검을 찾아 머리를 숙였다. 



2002년부터 5년 동안 대통령을 지낸 칼람은 인도에서 누구보다도 사랑받은 인물이다. 총리가 거의 전권을 갖는 인도에서 대통령은 상징적인 직위에 불과하지만 칼람은 파벌주의와 부패로 가득한 여느 정치인들 사이에서 빛나는 ‘바라트 라트나(인도의 보석)’로 존경받았다.


그는 1931년 인도 남동쪽 타밀나두주의 작은 섬 라메스와람 태생이다. 아버지는 가난한 어부였고, 소수 집단인 무슬림이었다. 신문팔이로 학비를 번 칼람은 마드라스 대학에서 물리학을 공부하고 항공우주공학자가 됐다. 국방연구개발기구(DRDO), 인도우주연구기구(ISRO)를 거쳐 1992년에는 총리의 수석과학자문위원이 됐다. 인도가 자랑하는 아그니 미사일 개발과 인도 최초의 위성 발사, 그리고 1998년 세계를 놀라게 한 포크란 핵실험 등이 모두 그의 작품이었다. 이 때문에 칼람은 ‘인도 핵 개발의 아버지’, ‘미사일맨’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1999년 펴낸 자서전 제목이 <불의 날개>인 것도 핵 과학자이자 무기 개발자로 살아온 그의 인생을 보여준다.



하지만 인도인들이 그를 사랑했던 것은 그의 인생이 준 메시지들 때문이다. 칼람은 사람들과 끊임없이 만났고 특히 어린이들과 젊은이들에 대한 애정이 남달랐다. 교육을 강조하고 정보기술(IT)산업을 키우는데 큰 역할을 했다. 대통령 시절 달리트(불가촉천민) 출신을 대법원장에 임명했으며, 소수집단 출신답게 마이너리티와 약자들에 관심을 기울였다. 


연구하느라 결혼식날도 잊어버렸다는 일화도 있다. 그 후 결혼하지 않고 평생 독신으로 살았으며, 채식을 고집한 금욕주의자였다. 대통령 임기 5년을 마치고 2007년 퇴임할 때 가지고 나간 이삿짐이 달랑 옷가방 2개였던 걸로도 유명하다. 힌두스탄타임스는 그를 가리켜 “미사일맨에서 인민의 대통령이 된 사람”이라고 평했고, 인디안익스프레스는 “인도에 꿈을 가르쳐준 인물”이라며 애도했다.



하지만 인도를 핵무기 보유국으로 만들어 결국 파키스탄과의 군비경쟁을 촉발시킨 것은 늘 논란거리다. 2007년 NDTV 인터뷰에서 칼람은 핵 개발에 죄책감을 느끼지 않느냐는 질문을 받고 “중요한 것은 힘을 가지고 존중을 받는 것”이라며 “내 나라의 발전을 위해서는 평화가 필수적이며, 평화는 힘에서 나온다”고 옹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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