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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리아, 세계의 상처

딸기21 2015. 12. 31. 15: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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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리아라는 나라가 국제뉴스의 중심이 될 것으로 예상한 이들은 거의 없었을 것이다. 이웃한 이라크는 1980년대에 이란과 긴 전쟁을 치렀고, 걸프전에 이어 2003년 다시 미국의 침공을 받으면서 전쟁과 테러와 혼란에 시달렸다. 하지만 그 서쪽에 있는 시리아는 이라크와 비슷하게 오랜 세월 독재정권이 국민들을 짓밟았음에도 세상의 주목을 별로 받지 못했다.


그랬던 시리아가 지금은 세계의 골칫거리가 된 것 같다. 이라크와 시리아 일부 지역을 장악한 이슬람국가(IS)라는 극단주의 무장세력이 지난해 ‘국가 수립’을 선포하면서 벌어진 일이다. 프랑스 파리에서 11월 13일 IS 테러범들이 동시다발 공격을 일으켜 130명이 목숨을 잃는 일까지 일어났다. IS 세력은 리비아를 비롯한 북아프리카로 스며들고 있으며, 소말리아나 아프가니스탄이나 나이지리아의 극단세력들이 잇달아 IS에 충성을 맹세했다.


시리아 수도 다마스쿠스의 우마이야 모스크. 사진 유네스코 세계유산(whc.unesco.org)


IS는 ‘인류의 공적’이 됐다. 하지만 겉으로는 목소리를 높이면서도, 실상 IS와의 전쟁에 적극적으로 나서는 나라는 없다는 것은 역설적이다. 시리아 독재정권의 정부군, IS같은 극단세력, 쿠르드를 비롯한 소수민족 민병대들이 얽혀 싸우는 이 아수라장에서 죽어나가는 것은 아이들과 여성들을 비롯한 그 나라 민간인들이다. 이미 그 나라 인구 절반이 난민이나 유민이 돼 버렸다. ‘시리아 문제’는 지금 세계가 짊어진 가장 무거운 짐이며 가장 아픈 상처다.

 

아랍의 봄, ‘내전’이 되다

 

2010년 12월, 튀니지를 시발점으로 ‘아랍의 봄’이라 불린 시위와 혁명이 일어났다. 이듬해 2월 이집트의 호스니 무바라크 정권이 축출됐고, 리비아에서는 무아마르 카다피에 맞선 내전이 벌어졌다. 북아프리카에서 시작된 봄바람은 중동으로도 옮겨갔다. 예멘의 압둘라 살레 정권이 무너지고, 시리아로도 혁명의 불이 옮겨 붙었다. 바샤르 알아사드 독재정권에 반대하는 시위가 시작된 것이다.


발단은 어린 소년들이 담벼락에 아사드를 비난하는 낙서를 한 것이었다. 이 소년들이 잡혀가 고문당했다는 사실이 알려졌고, 항의 시위가 시작됐다.


2011년 3월 15일 시리아에서 ‘혁명의 요람’이라 불리는 저항의 도시, 남부의 다라(Daraa)에서 대규모 시위가 벌어졌다. 아사드 정권은 시위대를 대거 체포하고, 강경진압과 구금과 고문으로 대응했다. 4월에는 전국 주요 도시에 군대가 배치돼 시위대에 발포했다. 그러나 정부군 상당수는 아사드 정권을 등지고 시위대에 투항, 반군에 합류했다. 터키와 접경한 이들리브 주의 소도시 지스르 앗슈구르에서 무기를 탈취한 시민들이 정부군에 맞서 첫 ‘교전’을 했다. 정부군이 장례식장에 총을 쏘자, 이에 맞서 시민들이 정부군 건물에 응사한 것이 계기가 됐다.


시리아 수도 다마스쿠스의 우마이야 모스크. 사진 유네스코 세계유산(whc.unesco.org)


그 해 7월 29일 반정부 진영에 합류한 일군의 장교들은 자유시리아군(FSA) 결성을 선언했다. 이로써 반정부 시위는 ‘내전’으로 바뀌었다. 11월 8일 반정부군은 중부 도시 홈스를 ‘혁명의 수도’로 선언했다.


그러나 전쟁은 교착됐고 산발적인 전투와 학살이 이어졌다. 2012년 5월 25일 홈스 주의 훌라 마을에서는 친정부 민병조직인 샤비하(Shabiha)가 여성 34명과 어린이 49명 등 108명의 주민을 즉결처형 등으로 학살했다.


시리아 내전이 변질된 것은 2013년이다. 알카에다와 연계된 알누스라 전선 등 이슬람 극단세력이 반정부군 내에서 존재를 과시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 해 3월 반정부 진영의 발목을 잡는 엽기적인 사건이 일어났다. 이슬람 무장조직 사령관 칼레드 알 하마드가 정부군을 죽이고 인육을 먹는 모습을 동영상으로 올린 것이다. 이 동영상은 5월이 되자 세계에 퍼졌고, 반정부 진영의 이미지에 치명타를 입혔다.


반정부 진영 내 세속주의 야권과 이슬람 극단세력 간 내분은 곧 노골적으로 드러났다. 북부 쿠르드계 무장조직인 PYD가 극단조직 알누스라와 전투를 벌였고, 이후 쿠르드와 지하디스트(이슬람 전투원) 간 싸움이 계속됐다. 아사드 정권이 물러나야 한다고 미국 등은 목소리를 높였으나 반정부 진영을 제대로 지원해주지는 않았다. 반정부 진영에 무기를 내줬다가 극단세력에 넘어갈지 모른다는 걱정 때문이었다.


2013년 7월 25일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은 “시리아 내전 사망자가 10만명이 넘었다”고 공식 발표했다. 곧이어 유례없이 끔찍한 일이 벌어졌다. 8월 21일 다마스쿠스 외곽 구타(Ghouta) 지역에서 화학무기 공격으로 어린이들을 비롯해 수백 명이 목숨을 잃었다. 흰 천에 덮인 아이들이 시신 수십 구가 뉘여 있는 장면은 충격적이었다. 국제인권단체 휴먼라이츠워치는 정부군 소행일 가능성이 높다는 보고서를 냈지만, 유엔 조사단은 화학무기가 쓰였음을 인정하면서도 누가 사용했는지는 명시하지 않았다. 


시리아 수도 다마스쿠스의 구시가지. 사진 유네스코 세계유산(whc.unesco.org)


화학무기 사건 뒤 미국에서 시리아를 공습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왔으나 버락 오바마 대통령은 거부했다. 아사드 정권은 재빨리 유엔 사찰단을 입국시켜 화학무기를 내줘 폐기하게 함으로써 공습을 피해나갔다. 화학무기 사찰과 폐기를 맡은 화학무기금지협약기구(OPCW)가 그 해 노벨 평화상을 받았다는 것은 한 편의 코미디였다.


그렇게 지지부진한 전황이 계속되는 듯했다. 하지만 미국의 정보력 실패를 보여주는 사건이 벌어졌다. 2014년 6월 10일 시리아 라카에 본부를 두고 활동하던 이라크시리아이슬람국가(ISIL)라는 조직이 이라크로 넘어가, 이라크 북부 대도시 모술을 장악한 것이다. 


이슬람국가(IS)의 등장


이라크의 상황을 조금이라도 아는 이들이라면 모술을 빼앗겼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모슬린이라는 천의 이름으로도 유명한 모술은 이라크에서 바그다드에 이어 두 번째로 큰 도시이며 북부의 중심지다. 키르쿠크 등 주변 거대 유전에서 나온 원유가 모술의 정유소를 거쳐 파이프라인을 타고 남북으로 흐른다. 모술의 박물관에는 2000년 전 고대 문헌들을 비롯한 유물이 즐비하다. 그런 곳을 무장조직이 장악했다는 것은, 2003년 전쟁으로 사담이 축출된 뒤 새 정부를 꾸리고 안정을 찾으려 애써온 모든 노력이 물거품이 됐다는 뜻이었다.


이로써 시리아 내전은 ISIL과의 싸움이라는 새 국면으로 바뀌게 됐다. 6월 29일 ISIL은 이름을 ‘이슬람국가(IS)’라 바꾸고, 시리아와 이라크 북부에 ‘이슬람 칼리프 국가’를 수립했다고 선언했다. 이 조직 지도자 아부 바크르 알바그다디는 스스로 ‘칼리프 이브라힘’이라 주장했다. 


8월 8일 미군은 IS에 장악된 이라크 북부를 공습했으며 오바마 정부는 이라크를 공격한 미국의 네 번째 행정부가 됐다. IS는 미국의 공습에 아랑곳 않고 미국 기자들을 참수하는 동영상을 연달아 공개했다. 결국 9월에 오바마는 시리아 내 공습까지 승인했으며, 오바마가 그토록 발 빼려고 해왔던 미국의 대테러전은 오히려 시리아로 범위가 넓어졌다.


현재 지구상에서 벌어지는 최악의 인도적 참사라 할 시리아 내전은 민주화 투쟁으로 시작돼, 이렇게 이슬람 극단세력과의 전쟁으로 변해버렸다. 인류 문명이 싹튼 비옥한 초승달은 학살과 폐허의 초승달이 됐다.

 

역사와 문명이 켜켜이 쌓인 곳

 

모르가나에서는 아직도 수공업을 대물림한다. 이발사, 보석세공인, 제과기술자들은 거의 대부분 중세 때부터 같은 직업에 종사하고 있었다. 수백 년 동안 매일 저녁 찻집에서 이야기를 하며 살아온 집안도 있다. 하덱 대통령의 가문도 칠백년 전부터 같은 직업에 종사해왔다. 모르가나를 통치하는 일이 바로 그것이다. 벌써 오래 전부터 이 나라 대통령의 이름은 하덱이었다. 야당의 당수도 하덱이고, 반란군의 지도자도 하덱이었다. 승리를 거두고, 정권을 잡은 사람은 언제나 이름이 하덱이었다. 하덱은 아랍어로 ‘당연하다’는 뜻이다. 


모든 지도자들의 성이 하덱이었기 때문에 처음에는 이름으로 구분하기도 했지만 알리, 압둘라, 무스타파라는 이름도 수백 개씩 되었고, 이름 뒤에 숫자를 넣는 것도 처음 얼마간뿐이었다. 몇 백 년이 지나자 듣기 거북하게 되었다. 어떻게 알리 술탄 397세, 압둘라 대통령 85세라고 부른단 말인가? 그래서 사람들은 착각하지 않기 위해 새로운 방법을 고안해냈다. ‘하덱’들을 시인, 독립운동가, 미남, 사팔뜨기, 사기꾼 폭군 등으로 구분한 것이다. 아랍어에 형용사가 풍부한 것이 그나마 다행이었다. 하덱은 더 이상은 혼동되지 않았다.


독일에서 활동하는 시리아 출신 작가 라픽 샤미의 소설 <1001개의 거짓말>에 나오는 구절이다. 주인공 사딕이 살고 있는 곳은 모르가나라는 도시로, 어느 날 인도에서 서커스단이 찾아오는데 하필이면 독재자 대통령과 쿠데타군과의 전쟁 때문에 이 작은 도시에 갇혀 서커스단이 떠나지 못하게 됐다. 이야기꾼 사딕은 어느새 마을 사람들과 이웃이 되어버린 서커스단에서 여러 친척들의 이야기를 해주는 사람이 된다. 인용한 것은 그 중 한 토막, 대대로 이름이 똑같은 하덱이라는 독재자의 이야기다.


하덱이 비유하고 있는 것은 독재자 아사드다. 지금의 바샤르 알아사드가 아닌, 그 아버지 하페즈 알아사드에 대한 풍자다. 사실 1990년대, 아니 200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아사드’라고 하면 아들이 아니라 그 아버지를 가리키는 이름이었다.


학살 뒤 폐허가 된 하마. 사진 위키피디아


지금은 내전과 난민, IS가 시리아의 대명사처럼 됐지만 시리아는 세계에서 가장 기나긴 역사를 갖고 있는 곳 중 하나다. 서쪽은 지중해에 면하고 있고, 남쪽에는 레바논과 요르단이 있으며 북쪽에는 터키가, 동쪽에는 이라크가 있다. 남서쪽 일부 국경은 이스라엘과 닿아 있다. 이 나라들에 둘러싸인 시리아는 비옥한 평원과 높은 산들, 그리고 사막으로 이뤄진 나라다. 


수많은 민족과 종교와 문명이 이 지역에서 명멸했다. 그 기나긴 역사가 시리아의 복잡성을 구성하고 있다. 민족 집단만 해도 아랍계와 그리스계, 아르메니아계, 아시리아계, 쿠르드, 투르크멘 등 다양하다. 종교도 마찬가지다. 사실상 시리아에만 존재하는 시아파의 분파인 알라위파가 아사드 정권의 주요 지지기반이다. 드루즈라는 소수 종파도 있고, 살라피라 불리는 수니 근본주의도 있다. 이라크와 접경한 산악지대에는 야지디라는 소수 종교 공동체도 있다. 하지만 다른 아랍국들과 마찬가지로 수니 무슬림이 다수를 차지한다.


고대 아시리아 제국 뒤에는 로마 제국이 이 땅을 가졌다. 비잔틴 시절에는 동방정교가 꽃을 피웠다. 유럽에서는 이 지역을 레반트 즉 ‘동방’이라 불렀다. 아랍어로는 ‘알 샴’이라 한다. 현대 아랍 세계가 형성되기 전까지 유럽에서 ‘아시아’라 부른 것은 바로 이 지역이었다. 시리아의 수도 다마스쿠스는 여러 종교와 문화가 겹쳐진 동방의 중심이었으며 이슬람 제국이 세워진 뒤에는 우마이야 칼리프 왕조의 수도였다. 그러다가 시리아는 오스만투르크 제국 땅이 됐고, 오스만이 유럽의 압박 속에 쪼그라들면서 1차 대전 뒤 잠시 프랑스의 통치를 받았다.


독립, 쿠데타, 군사독재


시리아는 1945년 독립했으나 군사쿠데타가 줄을 이었다. 1958년부터는 3년 동안 이집트의 가말 압둘 나세르 정권이 주도한 ‘아랍공화국’이라는 이름으로 이집트, 이라크와 잠시 합쳐지기도 했다. 그러나 나세르가 주창한 범아랍주의의 영향력은 이내 쇠퇴했으며 1961년 시리아에서는 군사 쿠데타가 일어났다. 이후 정권을 잡은 것은 바트당이다. 이라크의 사담이 이끈 바트당 정권과 이름도 색깔도 비슷한 바트당 정권의 수장이 하페즈 알아사드였다.


바트당 쿠데타 때 장교로 참여했던 하페즈는 1966년 재차 친위쿠데타를 일으켜 군부 지도자로 나섰으며, 총리를 거쳐 1971년 대통령이 됐다. 냉전 시절에 소련과 관계를 강화하고 이스라엘과 대립했으며(이 과정에서 이스라엘이 시리아 남부의 골란고원을 불법 점령한 뒤 유엔의 촉구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반환하지 않고 있다) 국내에서는 철권통치를 펼쳤다. 하페즈 1인 치하의 시리아에서는 종교의 영향력이 발을 붙이지 못했다. 이집트의 무바라크나 리비아의 카다피, 이라크의 사담처럼 하페즈는 철저한 세속주의 독재자였다.


시리아 북서쪽에는 ‘물레방아의 도시’로 유명한 하마(Hama)라는 곳이 있다. 이집트에서 시작된 풀뿌리 이슬람운동 조직인 무슬림형제단이 이 도시를 기반으로 삼고 저항을 하자, 하페즈는 피도 눈물도 없이 저항세력을 짓밟았다. 1982년 하마 학살은 아랍 역사를 통틀어서 유례를 찾기 힘들 정도로 잔혹한 것이었다. ‘탱크와 불도저로 도시 전체를 엎어버린’ 하페즈 정권의 진압으로 1만~4만 명이 숨진 것으로 추정된다.


하페즈 알아사드.


하페즈는 2000년 갑자기 숨을 거뒀다. 그 뒤에 정권을 물려받은 것이 현 대통령 바샤르다. 원래 하페즈는 맏아들인 바셀을 후계자로 삼으려 했으나 바셀은 1994년 교통사고로 숨졌다. 영국에서 의학을 공부하고 다마스쿠스의 군 병원에서 안과 의사로 일하던 바샤르가 형의 자리를 메우게 됐고, 하페즈가 사망한 뒤 대통령직을 이어받았다. 바샤르가 처음 집권했을 때만 해도 외부에서는 오래 가지 못할 것으로 관측했다. 하지만 바샤르는 예상을 뛰어넘는 정치력을 보였다. 아버지와 달리 어느 정도나마 민주화와 개혁조치를 실시할 것이라는 기대도 나왔다. 극도로 형식적이긴 했지만 집권 뒤 대선이라는 요식 절차를 거치기도 했다. 또 미국 오바마 정부가 처음 출범했을 때에는 관계 개선을 꾀했다.


그러나 중동의 독재정권들이 아랍의 봄에 밀려나는 상황에서 세습 독재자 아사드 역시 국민적인 저항에 부딪쳤고 결국 자국민들과 전쟁을 치르는 상황이 됐다.

 

테러, 국제전... 

 

러시아는 파리 테러 전인 9월 30일부터 오랜 결탁 관계인 아사드 정권을 지원하기 위해 시리아를 공습하고 있다. 파리 테러가 일어난 뒤 프랑스군도 유일한 항공모함인 샤를드골 호를 지중해에 보냈으며 시리아 공습을 강화했다. 시리아 사태는 국제전으로 확대됐다. 현재 미국, 호주, 캐나다, 프랑스, 요르단, 모로코, 바레인, 카타르, 사우디아라비아, 터키, 아랍에미리트연합(UAE)이 국제동맹국이라는 이름으로 시리아 IS 지역을 공습하고 있다. 벨기에와 덴마크, 네덜란드는 국제동맹국에 들어가 있지만 시리아가 아닌 이라크에서만 작전을 한다. 


미국이 이라크에 3500여명, 시리아에 50명 정도의 특수부대를 보내놓고 있지만 아직 지상 작전은 본격 전개하지 않았다. 오바마는 대규모 지상군 파병은 없을 것이라고 누차 강조했다. 오바마가 시리아 내전에 적극적으로 군사개입을 할 뜻이 있었다면, 아마도 아사드가 자국민에게 화학무기를 썼을 때가 가장 확실한 명분을 가지고 작전을 벌일 수 있는 때였을 것이다. 그러나 두 차례 대테러전 뒤처리조차 버거운 오바마 정부는 재정난 속에서 새 전쟁에 본격적으로 뛰어들 뜻이 없다. 


시리아 알레포의 구시가지. 사진 유네스코 세계유산(whc.unesco.org)


아랍국들도 시리아 문제에 선뜻 발을 들이려 하지는 않는다. 오바마는 12월 14일에도 “IS 파괴작전은 어느 때보다도 어려운 작전이 될 것”이라며 아랍국들이 더 많은 역할을 해야 한다고 말했다. 같은 날 미국 압박에 밀린 사우디는 반 IS 34개국 동맹을 결성했다고 발표했다. 사우디는 UAE를 비롯한 아랍국들뿐 아니라 터키, 말레이, 파키스탄, 그리고 아프리카 국가들까지 들어 있는 ‘기나긴 동맹 리스트’를 읊었으나 이들이 적극 나설 것이라 보는 이들은 없다. 사우디 갑부들은 극단세력의 돈줄이며, 시리아에 가서 지하디스트가 된 사우디인이 2500명에 이르는 것으로 추정된다. 사우디 정부는 2014년 7월 IS를 막겠다며 이라크 국경에 군대를 3만 명 배치했으며, 내부 분란으로 이어지는 것을 막기에 급급해 보인다.


아랍국들 중에서는 올 초 전투기 조종사가 IS에 참수를 당하는 일을 겪은 데다 시리아·이라크와 국경 맞댄 요르단이 그나마 가장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다. UAE도 요르단과 함께 서방 동맹국들에 기지를 내주고 공습에도 참여했으나 요르단 조종사 참수 사건이 일어나자 곧바로 공습에서 발을 빼는 등 눈치를 보고 있다. 카타르는 공습에 참여하지 않으면서 후방 지원만 하고 있는데, IS와 알누스라같은 극단조직에 뒤에서 돈 대주고 있다는 비난까지 받는다. 결국 IS와의 싸움에 실질적으로 도움이 될 수 있는 것은 이란뿐이라는 역설이 남는다. 하지만 이란은 러시아와 함께 아사드 정부를 지원하고 있다.


그러나 아무도 적극 나서지 않는 전쟁


이런 상황에서 상상해볼 수 있는 최선의 시나리오는 미국과 유럽국들, 아랍국들이 참여하고 유엔이 중재하는 체제이행 협상을 통해 아사드를 퇴출시키고 시리아 내전의 복잡한 전선을 ‘IS 대 반IS’로 단일화하는 것이다. 아사드가 제 발로 물러나게 하려면 이란과 러시아가 중재를 해야 한다. 오바마 정부도 이 때문에 이란을 협상에 끌어들이려 애썼으며, 이란은 실제로 파리 테러 뒤 열린 협상에 처음으로 참여했다. 그러나 협상은 2년 째 지지부진하며, 아사드를 밀어주는 러시아와 이란의 정책에 아직까지는 이렇다 할 변화가 보이지 않는다.


시리아 알레포의 구시가지. 사진 유네스코 세계유산(whc.unesco.org)


미국은 계속 시리아 반정부 진영에 힘을 실어줘 아사드나 IS와 싸우게 하고 있으나 시리아 반군은 지리멸렬하다. 오바마 정부는 반군에게 무기를 내줄지 말지 고민하느라 승기를 잡을 기회를 놓쳤다. 공습도 IS에 결정적인 타격을 주지 못했다. 극단세력이 계속 발흥한다면 시리아에 새 정부를 세운들 이라크의 재판(再版)이 되기 쉽다.


언제 끝날지 모를 협상 와중에 난민 위기와 인도적 참사는 계속될 수밖에 없다. 지난 9월 2일 터키 서부 보드룸 해안에서 지중해를 건너가려던 세 살 난민 아이 아일란 쿠르디의 주검이 발견됐다. 세계가 이 참극에 할 말을 잃었다. 영국 인디펜던트의 표현대로 “이 사진이 유럽을 바꾸지 못한다면” 무엇이 세상을 바꿀 수 있을까. 시리아 난민 문제가 세계의 이슈로 떠올랐고, 관심권에서 멀어졌던 내전 상황에 다시 세계의 이목이 쏠렸다.


그런데 사람들이 오해하는 게 있다. 유럽이 ‘난민 몸살’을 앓고 있다고 하나 이는 절반의 진실일 뿐이다. 어느 때보다 유럽으로 가려는 난민이 늘어난 것은 사실이지만, 이는 세계의 난민 숫자 자체가 워낙 늘어났기 때문이지 난민들이 유독 유럽에 많다는 뜻은 아니다. ‘부자 나라들이 난민 때문에 몸살을 앓는다’는 것은 허구다. 내전 뒤 지금까지 시리아 2200만 인구 중 절반 이상이 집을 떠나 피란길에 올랐다. 그 대부분은 국내를 떠도는 유민(IDPs)이 됐고, 440만 명은 나라 밖으로 나가 난민이 됐다. 


유엔난민기구(UNHCR)에 따르면 그 중 유럽에 들어간 사람은 12월 15일 현재 80만7000명에 불과하다. 그나마도 50만 명은 올 여름 이후 들어간 사람들이다. 시리아 난민 230만 명은 터키에 있고 100만 명은 레바논에, 63만 명은 요르단에, 24만 명은 이라크에 있다.


요르단 자타리의 시리아 난민촌. 사진 AP


요르단 북쪽, 시리아와 접경한 자타리에는 ‘세계최대 난민캠프’라 불리는 시리아 난민촌이 있다. 요르단 정부가 난민 홍수 속에 재정난과 혼란을 호소했지만 유럽은 적극 도와주지 않았다. 요르단은 외부 지원이 없으면 버틸 수 없다며 난민 통제에 들어갔다. 터키도 수용가능 인원을 넘어서자 유럽행을 방치했다. 그 결과가 해변의 쿠르디였던 것이다. 쿠르디가 불러일으킨 연민과 공감은 컸고, 각국이 난민들에게 조금이라도 더 문을 열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내전이 끝나지 않는 한 난민들은 더욱 늘어날 것이다.

 

전쟁은 모든 것을 앗아간다

 

사실 시리아인들의 최대의 적은 IS도, 외국군도 아닌 자기네 정부다. 현지 상황과 민간인 피해를 모니터링하는 시리아인권관측소(SOHR)에 따르면 2011년 3월 내전이 시작된 이래 11월 말까지 시리아에서는 민간인 8만 명 가량이 숨졌고, 그 중 7000명 정도가 아이들이었다. 프랑스 동시다발 테러로 IS 파괴 작전에 세계의 관심이 쏠린 사이, 정작 최악의 피해를 일으키는 아사드 정권은 기사회생하는 분위기다. 파리와 워싱턴과 모스크바에서 외교전이 벌어지고 빈에서 휴전협상이 진행되는 동안 시리아인들은 매일 죽어가고 집 잃은 유민이 되고 국경 넘어 남의 나라에서 난민이 된다.


전쟁은 시리아에서 역사조차 빼앗아가고 있다. 지난 5월 IS는 고대 유적도시 팔미라를 장악했다. 그리고 석 달 뒤 2000년 된 신전을 폭파해버렸다. IS 근거지가 있는 또 다른 격전지 데이르에조르는 이라크로 가는 사막 도로 가운데의 요충지로, 오래 전부터 아랍인들과 함께 베두인(유목민)과 쿠르드족과 아르메니아계, 아시리아계가 함께 살던 곳이다. IS의 본부가 있는 라카는 기원전 3세기 셀레우코스 왕조 시절 중심지였던 오래된 도시다. 북서부의 알레포는 시리아 최대 도시이자, 도시 전체가 유적이다. 선사시대 유적부터 고대 그리스 문명의 흔적과 비잔틴의 시가지, 십자군 요새, 오스만투르크 유적과 이슬람 사원들, 근대 이후 프랑스 점령통치시절의 건축물들이 혼재한다. 알레포의 구시가지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이기도 하다. 하지만 정부군과 반정부군 간 격렬한 교전이 계속되면서 이 도시는 거의 폐허가 됐다.


시리아 수도 다마스쿠스의 구시가지. 사진 유네스코 세계유산(whc.unesco.org)


다마스쿠스는 아직 아사드 정권 치하에 있지만 역시 교전이 끊이지 않는다. 아랍의 ‘망명시인’으로 유명한 니자르 카바니는 1923년 다마스쿠스에서 태어났다. 그는 ‘다마스쿠스, 너는 나에게 무엇을 하고 있나’라는 시에서 이렇게 노래했다.


우마이야 모스크 마당에 들어서면

모두가 서로 인사를 한다

모퉁이는 모퉁이에게

타일은 타일에게

비둘기는 비둘기에게

쿠피 경전이 새겨진 정원을 걷는다

신의 말로 이뤄진 아름다운 꽃들을 잡아당겨 보고

기도하는 이들의 마노 구슬을,

모자이크의 소리를 눈으로 듣는다

미나레트의 계단을 오르면 내게 와 닿는 소리

자스민 꽃으로 오세요

자스민 꽃으로 오세요.


시인은 오랜 세월 떠나 있던 고향의 땅콩, 자두, 아몬드를 노래하면서 베르사유도, 런던의 버킹엄궁도, 베네치아의 산마르코 광장도 우마이야 모스크보다는 못하다고 썼다. 그의 또 다른 시 ‘다마스쿠스의 달’은 “다마스쿠스로부터 영원이 시작된다”는 구절로 시작한다. 카바니는 1998년 숨을 거뒀다. 만일 그가 지금의 다마스쿠스를 봤다면 얼마나 아파했을까. 정부군의 ‘통폭탄(드럼통에 폭발물을 집어넣은 것)’이 시장 골목에 떨어지고 사람들의 팔다리가 잘려나가고 극단조직이 사람들을 죽이고 외국군이 공습을 하는 모습을 봤다면.


시리아 수도 다마스쿠스의 구시가지. 사진 유네스코 세계유산(whc.unesco.org)


카바니의 시 ‘그림에서 얻는 교훈’은 시리아를, 아니 전쟁에 휩싸인 모든 아랍을 위한 애가(哀歌)다.


이렇게 어려운 시절에는 숲 속의 나무들도 시민군이 되고 장미도 방탄복을 입는단다

무장한 밀의 시대엔 새들도 무장을 하고 문화도 무장을 하고 종교도 무장을 한단다

숨겨진 총을 찾아내지 못하고서는 빵 한 덩어리 살 수 없단다

얼굴에 생채기를 내지 않고서는 들판의 장미를 꺾을 수 없단다

손마디가 폭탄에 날아가지 않고서는 책 한 권 살 수 없단다

아들아 네가 자라서 아랍의 시를 읽게 되면 말과 눈물은 쌍둥이라는 것을, 

그리고 아랍의 시는 손가락에서 흘러나온 눈물이라는 걸 알게 될 거란다.


그 눈물이 마를 날은 언제 올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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