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기네 책방

호세 무히카 조용한 혁명

딸기21 2017. 9. 14. 2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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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권을 다 읽고 새 책을 펴는 것이 아니라 이 책 저 책 펼쳐놓고 읽다가 덮었다가 하다 보니, 한 권 다 끝내는 데에 몇 달씩 걸리기 일쑤다. 그렇게 읽다가 잊어버린 책들이 책꽂이, 책상 위, 서랍 속에서 발견되는 일도 종종 있다. 앞부분 읽은 내용도 다 잊어버려서 다시 들춰봐야 하는 것들. 


그렇게 '발굴'한 것들 중에서 두 권, 토요일에 카페에 앉아 드디어 끝장을 보았다. 그 가운데 하나가 <호세 무히카, 조용한 혁명>(마우리시오 라부페티, 박채연 옮김, 부키)이었다. 재미있었다.



이 책을 쓴 저널리스트 라부레티는 "예전에는 우루과이에서 왔다고 하면 바로 ‘축구'가 나왔지만 지금은 많은 지역에서 ‘무히카'를 말할 것이라고 장담할 수 있다"(17쪽)고 썼다. 그 말 그대로다. 내게 우루과이는 '우루과이 라운드' 혹은 '제1회 월드컵 개최국' '에두아르도 갈레아노의 나라'였는데 근래에는 무히카를 떠올리게 됐으니. 무히카는 몇 년 동안 세계 언론의 스타였다. 그를 스타로 띄워준 가장 중요한 요인은 아무래도 '검소한 대통령'의 개인적인 면모였을 것이다. 



정작 무히카는 외신들이 자신을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대통령’이라고 평가한 것에 대해 불쾌해했다고 한다. 


측근에 따르면, 대통령은 한동안 언론과 인터뷰할 때 자신의 소유물에 대해 말하기를 꺼리고, 현안과 철학적 주제만을 이야기하려고 했다. "개념 착오가 있다. 나는 가난하지 않다. 절제하는 것이다. 그것이 차이점이다." 그는 네덜란드 기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50쪽)


이 책은 무히카의 검소함을 강조하는 위인전이 아니다. 무히카라는 사람, 그를 낳은 정치사회적 배경, 게릴라들의 투쟁과 독재의 역사, 무히카의 성공과 실패, 그에 대한 평가를 종합적으로 다룬다. 물론 무히카의 개인적인 면모에 대한 이야기도 꽤 많이 들어 있고, 몹시 재미있다. 


무히카는 소스를 빵에 발라 기자에게 주었다. 방금 전까지 마리화나 합법화와 마약, 안전에 대한 대화를 하던 참이었다. 대통령은 마약 밀매 조직과 마약류를 관리하는 유엔 산하 국제기구의 관료들이 들으면 소름이 돋을 정도로 파격적인 마리화나 시장 합법화에 대해 연설을 하는데, 집에서 토마토 소스를 만드는 것도 이런 문제와 똑같이 그에게 중요한 문제이다. 

무히카는 집에 있는 시간을 대부분 부엌에서 보낸다. 대통령 부부는 요리사도, 가정부도 쓰지 않는다. 부엌은 작지만 부족함이 없다. 돌로 마감 처리된 싱크대와 개수대와 가스 오븐, 그리고 기름병, 소금, 식초, 포도주 몇 병, 허브잎들을 신선하게 유지하기 위한 물병들이 놓인 선반 여러 개가 전부이다. 부엌에는 추억도 담겨 있다. "이 럼주는 피델이 내게 선물한 거라오." 무히카는 가장 앞에 놓인 술병을 기자들에게 들어 보이며, 이런 종류의 선물은 보관할 만하다고 설명했다. (63쪽)


그 소탈함은 무히카에겐 수십년 간 지켜온 삶의 방식이자, 정치의 방식이다. 둘은 서로 분리돼 있지 않으니 이중적인 것이라고도, '쇼'라고도 비난할 수 없다. 오히려 그의 삶이 그런 정치적 스타일로 나온 것이며, 그런 삶을 퍼뜨리기 위해 정치를 한다고 할 수 있다. 


겉으로 보이는 모습과 반대로, 무히카는 외모에 신경을 많이 쓴다. 다만 대부분의 사람들이 생각하는 상식과 다를 뿐이다. 즉 그는 남들에게 보이는 자신의 모습과 행동을 자신이 전해야만 하는 메시지의 일부라고 생각한다. 

볼리비아의 에보 모랄레스 대통령은 스페인어가 다소 서툰 아이마라족으로, 원주민(pueblos originarios)이 디자인한 옷을 입는다. 에콰도르의 라파엘 코레아 대통령은 미국에서 교육받은 엘리트로서 권위적일 뿐 아니라 우아하기로 유명한데, 자신의 의상에 에콰도르 토착민의 공예 소품을 포함시켰다. 무히카 역시 머리에서 발끝까지 가능한 한 우루과이 사람으로 보이기로 결심했다. 최근 뉴스에 등장하는 무히카는 농부의 옷차림을 하고 있다. (56쪽)


그의 개인사, 다른 사람 앞에서 자신을 보여 주는 방법, 친근하게 다가가는 사소한 행동을 통해 지속적으로 호소하는 등 무히카의 모든 것이 대중매체를 끌어들이는 자석이다. 특히 ‘공적인 성격에서의 매력’ 때문에 게릴라 전사 시절에는 언론 보도를 통해 ‘무히카 코르다노’에서 ‘무히카'로 불리게 되었고, 의회에 들어갔을 때는 곧바로 ‘페페’가 되었다. 무히카는 자신이 실제로는 정치에 매여 있더라도 정치에 매여 있지 않은 것처럼 보이게 만든다. 무히카는 '대통령 무히카'를 비판하기 위해서 '시민 무히카'로 자신의 역할을 바꿀 수 있는 사람이다. 국내외 언론 매체로부터 우루과이 대통령이 받는 관심은 대부분 상황에 거의 떠밀려서 대통령직에 오른 것처럼 자신과 정치의 관계를 보여 주는 무히카의 독창적인 방식에 기인한다. (158쪽)


세바스티안 사비니 하원의원은 역사 교수이다. 34세이고, 몬테비데오 근교인 라스피에드라스 시에 산다. 그의 정치 경력은 무히카가 이끄는 민중참여운동 내에서 가장 전형적이다. 그는 좌파 성향의 가정에서 자랐으며 1990년대 중반 학생운동을 하면서 정치를 시작했고, 다른 정치 그룹보다 민중참여운동이 더 적극적으로 활동하고 대중에게 더 친근하게 다가간다는 이유로 이 정당에 참여했다. 

무히카의 영향으로 민중참여운동은 유권자들과 현장에서 만나는 것을 권장한다. 주요 지도자들과 당원들이 유권자들을 직접 만나 자신들의 이상을 설명하고, 정부정책의 잘못된 점을 비판한다. 정당 지도자가 대중 앞에서 연설하는 전통적인 정치 활동과는 다르다. 정치인도 일개 시민으로서 우연히 권력에 참여하게 되었다는 전제 아래, 유권자와 직접 관계를 맺는 이런 형태는 마침내 우루과이에서 정치를 하는 방식으로 자리를 잡았다. (112쪽) 


오바마식 정치, 어쩌면 트럼프식 정치, 그리고 한국에서 노무현식 정치, 그리고 지금의 문재인식 정치가 보여준 새로운 스타일을 더 넘어선 무히카식 정치. 


무히카의 스타일을 보여주는 일화들에 뒤이어 나오는 우루과이라는 나라의 이야기.


1980년에 독재자는 현 정권을 계속 인정할 것인지를 묻는 국민투표의 실시를선포했다. 군인들은 국민들에게 약간의 자유를 허용하는 조건으로 무력을 이용해 들어선 정부를 합법화하려고 했다. 국민들은 대부분 투표를 했고, 불공정한 선거 광고에도 불구하고 독재 정권은 패했다. 투표한 국민의 거의 60퍼센트가 선거 용지에 ‘반대’라고 적음으로써 무력으로 시작된 정권이 지속되는 것을 거부했다. 그것이 독재가 막을 내리는 시초가 되었다. 


익숙한 풍경. 뒤이은 구절은 어떤 면에서는 익숙하고, 어떤 면에서는 낯설다. 아마도 남미 혹은 히스패닉 여러 나라에 비슷한 시위 방식이 있는 듯하다. 냄비 두드리기. 


1980년대 초반은 군부독재에 반대하는 데모로 점철되어 경제적으로 엉망이었다. 우루과이는 솟구치는 인플레이션, 실업률, 물자 부족에 직면해 있었다. 사람들은 익명으로 저항했다. 데모 초창기, 해가 지면 어둠을 틈타서 이루어지던 ‘냄비 두드리기’가 아직도 기억난다. 부모와 아이들을 포힘해서 가족 전체가 집 안의 불을 끄고 독재자들에 대한 항의의 표시로 냄비를 두드렸다. 모두 두려웠다. 그러나 감히 냄비를 두드리지 못하는 사람들도 이웃이 드러나지 않도록 불을 껐다. 그것은 끝이 다가오는 독재 정권에 평화적으로 저항하는 길이었다. 

대부분의 사림들은 1973년부터 시작된 억압의 무게를 측량할 수가 없었다. 학대당하고모욕당하고 폭행당하고 고문당하고 결국 죽은 사람들까지 있었다. 살해된 사람들, 사라진 사람들. 우루과이뿐 아니라 라틴아메리카 전체의 문제였다. 우루과이는 ‘플란 콘도르(Plan Condor)’에 가입했다. 플란 콘도르는 남미의 독재자들이 위협적이라고 여기는 정치가와 좌파 활동가들을 억압 또는 제거하기 위해 정보를 공유하고자 만든 협력 기구였다. (116쪽) 


참으로 애잔한, 그러나 결국은 가장 힘 있는 '연.대.' 그 힘을 우리도 안다.

이렇게 민주화가 시작되고, 그것은 동시에 '민중해방 진영' 혹은 게릴라들에겐 존재의 고민으로 다가온다.


우루과이는 1984년 11월에 실시된 선거로 독재에서 벗어나기 시작했다. 민주화가 되면서 투파마로스는 정치에 입문하기 위해 무기를 버려야했다. 브라질과 아르헨티나 등 인근 국가에서 민주화가 시작된 것이 정치와 무기가 뒤섞이지 않은 민주주의로 돌아가는 데 상당히 기여했다. 투파마로스는 그것을 잘 알고 있었다. 감옥을 나오기 전부터 말이다. 

결정은 감옥에서 내려졌다. 투파마로스의 최고지도자 라울 센딕의 제안에 따른 것이었다. 센딕은 독방으로 옮겨졌는데, 교도관이 부주의한 틈을 타서 교도소 은어로 ‘알약'이라 하는 돌돌 만 작은 쪽지를 또다른 지도자 훌리오 마레날레스에게 전해 주는데 성공했다. "우리는 마음을 하나로 모아서 제도권 내에서 민주적인 투쟁에 동참해야만 한다." 민중해방운동의 최고 사상가는 그렇게 명령했다. 메시지는 널리 퍼져, 1985년 훌리오 마리아 상기네티 대통령이 취임한 후 투파마로스 대원들이 석방되기 전에 이미 여론이 되었다. (119쪽) 


정치 운동으로서 민중해방운동의 특징 중 하나는 변화하는 능력, 역사적 상황에 적응하는 능력, 그리고 가능한 경우 변화를 이끌어 내는 능력에 있다. 이 능력은 게릴라 투쟁 단계에 있을 때, 목표를 성취하기 위해 전술을 바꿀 때 드러났다. 그러나 조직의 주요지도자들이 감옥에서 나오면서 과거와 과감하게 단절했을 때 더 명확해졌다. 

이를 발표하는 역사적인 연설에서 무히카는 투파마로스가 감옥에서 전달한 결정을 단순한 언어와 명확한 사상으로 바꾸는 역할을 맡았다. 가장 중요한 것은 무기와 영원히 결별한다는 것이었다. 정치 활동의 형태부터 환경 보호, 그리고 민주화를 위해 보낸 14년 간의 감옥 생활에 대한 평가에 이르기까지, 무히카는 천천히 연설을 하면서 자신이 경험한 실질적으로 모든 분야에 대한 생각을 요약했고, 투파마로스는 더 이상 무장 단체가 아니라고 국민들에게 말했다. 

그 결과 민중참여운동은 1989년 이래 선거에서 좌파 계열이 폭넓은 지지를 얻는 데 기여한다. 이 길에서 민중해방운동은 다양하고 고통스러운 포기를 대가로 치르게 된다. (121쪽)


많은 이들이 민중해방운동을 떠났다. 남아 있는 그룹은 선거를 통해 우루과이의 역사적인 정당을 물리치고 권력을 차지하겠다는 좌파의 정치적 계획에 전적인 지지를 보냈다. 무장투쟁에 어떠한 회한도 남기지 않고, 선거에 입후보한 후보들의 카리스마와 힘을 선전하면서 단호하고 흔들리지 않는 자세로 선거전을 지지하는 것을 의미했다. 

단연 호세 무히카가 두드러졌다. 독재가 끝나기 전에 한번도 민중해방운동의 지도자 위치에 오르지 못했고, 감옥에서 나올 때도 조직 내에 긴장을 조성하는 두 가지 시각의 조정자 역할을 한 무히카는 당연한 대안이었다. 무히카는 계속 앞으로 나갔다. 1994년에 하원의원에 당선되었고, 2000년에는 상원에 자리를 잡았다. 

무히카는 2004년 선거에 입후보한 의원 중 가장 많은 표를 얻어 재선되었다. 이 선거로 우루과이 역사상 최초로 좌파 정권이 들어섰다. 무히카는 2005년 3월부터 2008년 3월까지 농축수산부 장관을 역입했으며, 바스케스 대통령과의 의견 차이로 물러나 다시 상원의원 자리로 돌아왔다. 이미 1년 전부터 여론조사로는 대통령을 꿈꿀 정도가 되었다. 사회정의에 대한 소명과 부의 재분배 외에는 명확한 이데올로기도 없이 행동대원으로시작한 무히카의 정치 역정 중 최전성기였다. (126쪽) 


이렇게만 보면 어느 게릴라의 성공적인 정치인 변신 이야기처럼 들린다. 하지만 게릴라 장기수 출신의 인생이 그리 쉬웠을까. '정치범 대우'조차 받지 못한 채 오랜 기간 고통받아야 했던 일이 무히카에게 남긴 상처는 매우 컸던 모양이다. 거기서 헤어나왔다는 사실만으로도 대단한 인물이라는 생각이 든다.


무히카는 1972년부터 1985년까지 13년 동안 감옥에 있었다. 저자의 표현을 빌면 "게릴라 시절, 움직일 때마다 느껴지는 부상의 흔적들, 감추고 싶은 그때의 정신적 상처는 무히카를 역사의 산 증인이자, 실리적이며 변화에 잘 대처하는 인간으로" 만들었다고 한다. 


무히카와 동료들은 11개월을 라바예하 주 보병대 구획에서 지냈다. 그 기간 동안 그들은 일어설 수조차 없는 작은 방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난잡한 목재로 만들어진 벤치에 앉아 벽을 바라보며 보냈다. 몸을 둘둘 말아 웅크려 자곤 했다. 화장실은 이용시간이 정해져 있어서, 그시간이 아니면 감방 안에서 용변을 보는 것조차 금지되어 있었다. 

아홉 명의 게릴라들은 작은 그룹으로 분리되었다. 북쪽에서 님쪽으로, 동쪽에서 서쪽으로, 항상 함께 옮겨졌으나 말을 니눌 수조차 없었다. ‘인질들’이란 용어는 이들 혁명군을 부른 신조어인데, 일반 죄수나 정치범과 달리 최소한의 인간적 대우 또는 규칙이나 규범조차 전혀 허락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했다. 

무히카, 로센코프, 페르난데스 우아도브로로 구성된 삼인조는 특별관리대상이었다. 거의 매일 밤마다 죄수들이 이송되었다. 세 사람은 지프 바닥에서, 트럭 짐칸에서, 난잡한 지하 하수도의 복도에서 손이 묶이고, 복면이 씌워지고, 말이 없는 죄수들과 마주쳤다. 한 명씩 옮겨질 때마다 그들은 서로 몸을 맞대고 안부를 물었다. 무히카는 미쳐 버렸다. 지금도 그는 이 사건을 사석에서도 언급하지 않는다. 고문과 옥살이로 얼룩진 13년이라는 세월을 고통 속에서 지낸 무히카는 마침내 동지이자 아내인 루시아 토폴란스키의 한결같은 지원과 노력으로 삶의 활력을 되찾았다. 

무히카는 자신이 혼잣말을 할 때 그로부터 정보를 캐내기 위해 군인들이 지하감옥에 도청 장치를 설치했다고 믿었고, 굶주림 혹은 열병으로 정신착란 증세를 보이곤 했다. 

무히카는 일주일이 조금 넘는 시간 동안 정신병 환자들을 위한 방에 수용되어 있었다.의사가 처방한 약들은 변기통에 버렸다. 돌아온 뒤에도 무히카는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동료들에게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그저 자기 방식대로 능력껏 수감 생활로 돌아갔을뿐이다. (140쪽)


그랬던 사람이 2009년 11월 29일 일요일 대선에서 승리했다. 저자는 무히카의 승리를 "우루과이 국민의 인내심과 새로운 시작의 신호"였다고 썼다. "전통적인 정치와는 다른 특정을 가진 새로운 대통령이 운영하는 정부가 시도할 새로운 시작, 그리고 무장반군이었던 사람을 대통령으로 만든 국민들의 인내심을 보여 주는 것"이라고. 


혹자는 무히카가 자신의 생각을 간단명료하게 표현하는 능력이 뛰어나고 누구나 이해하기 쉬운 말로 상대를 설득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나 역시 이것이 가장 명확한 이유라고 생각한다.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끊임없이 통치자로서의 자질을 보여 주면서 자신의 메시지를 효과적으로 국민들에게 전달한 것이 무히카가 대통령에 오른 요인이다. (141쪽) 


자유, 이것은 게릴라 시기 이후의 무하카에게는 디른 어떤 사안보다 우선시되는 것이다. 무히카는 부정적인 의미까지 감수하며 자유를 지켜낸 사람이다. 매이지 않기 위해, 괜한 걱정을 하지 않기 위해, 더 가지려고 일을 더 많이 하면서 시간을 빼앗기는 것이 싫어서 소비하지 않는다. 

한번은 대통령에게 어떤 것을 ‘자유’라고 생각히는지 물어보았다. 그러자 그는 "시간을 갖는 것, 가능한 한 많이. 물질적인 속박 때문에 그와 관련된 일로 시간을 빼앗기지 않는 것이다"라고 대답했다. 그는 불평등을 용인하면서 자유로울 수 없으며, 자유를 폐기하면서 평등을 강요할 수 없는 사람이다. 1960년대에 무히카는 무장 혁명을 통해서 자유를 얻을 수 있다고 믿었고, 최근에는 민주주의적인 방법으로 얻으려고 한다. 자유와 평등의 긴장 속에서 무히카는 이를 해결하기 위해 필요한 수단은 바로 '연대'라는 것을깨달았다. (152쪽)


대통령이 되고 난 뒤 무히카의 행보에 대한 저자의 평가는 복합적이다. 무히카를 세상에 알린 가장 유명한 일화는 '27년 된 폭스바겐 자동차'였고, 그 다음이 '마리화나 합법화'였다. 


2012년 6월 무히카는 마리화나 시장을 합법화하겠다는 생각을 공론화했다. 그 생각은 무히카 자신의 것도 아니고, 새로운 것도 아니었다. 처음 그 생각을 들은 것은 감옥에 있을 때로, 보통 그의 ‘형제’라고 불리는 동지 페르난데스 우에도브로에게서였다.

마약 거래에 무력으로 대응해 왔던 전 세계 여러 국가 중에서 정부 차원에서 이런 정책을 계획하는 것은 처음이었다. 무히카가 보좌관들과 함께 법률로 다듬은 이 아이디어는 유일무이하고 독창적이었다. 정부는 허가받은 생산자가 재배한 대마를 수거해 약국을통해 유통시킬 계획이었다. 또 한 달에 살 수 있는 일정량을 정한 소비자 명단을 만들 것이다. 이 명단은 개인 정보가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전산화한 비밀 데이터베이스와 연결될 것이다. 자작농 역시 허가할 것이다. 1인당 마리화나 여섯 포기까지 허용할 계획이다. (180쪽)


'마약과의 전쟁’이라는 아이디어는 1971년 리처드 닉슨 미국 대통령이 미국 의회에서 연설한 것에서 비롯되었다. 영어로는 'war on drugs'’이며, 스페인어로는 ‘guerra contra las drogas(마약에 반대한 전쟁)' 또는 ‘guerra antidrogas(반마약 전쟁)'라고 한다. 멕시코에서는 ‘narcoguerra(마약 전쟁)’ 라는 말이 유행했다.

총격전은 한쪽만 있어서는 성립이 안 된다. 미국 경찰이 마약을 막으려는 노력에 대항해, 마약밀매 조직도 무장하고 훈련하고 조직적으로 되는 것이다. 마약과의 전쟁의 가장 명백한 결과 가운데 하나는 잘 조직된, 어떤 경우는 거의 군대화된 불법 마약 조직이 나타났다는 것이다.

"마약 거래는 백해무익합니다. 마약 중독보다 더 나쁜 겁니다. 마약 중독은 인간의 신체를 파괴하지만, 마약 밀거래는 국가의 통제부터 시직해서 그 사회를 윤리적, 도덕적으로 파괴합니다. 상황은 점점 악화되고 있습니다. 마약 밀거래를 억압하는 방식으로 100년을 했는데도 소용이 없다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요?"

법안이 승인되고 마리화나의 감시와 유통에 관한 새로운 시스템을 한창 만들고 있던 2014년, 무히카는 이렇게 말했다. 무히카는 마리화나 시장의 합법화 법안은 이미 있는 것, 바로 우리 일상생활 여기저기에 존재하던 것을 법으로 만든 것뿐이라고 생각한다. (201쪽) 


무히카는 마약에도, 낙태에도 '반대'하는 사람이다. 원칙적으로 그렇다는 얘기다. 하지만 문제가 커지고 세상에 불행을 가져온다면, 그 해법으로 '합법화'라는 방식을 쓸 수 있다고 생각한 것 같다. 마리화나 합법화와 낙태의 결정권을 여성에게 주는 조치는 그에게는 모순을 해결하는 가장 실용적인 방법이었다.


자녀가 없음을 아쉬워 하는 무히카는 낙태가 쉽게 접근할 수 있고 흔하게 이루어지는 수술이 되는 것에 찬성하지 않았고, 지금도 그렇다. 그런데도 그가 낙태 합법화를 지지하는 이유는 스페인 텔레비전과의 인터뷰에서 드러났다. 

"우리 사회에는 모두의 비난에도 불구하고 어쩔 수없이 고통스러운 결정을 해야 하는 여성들이 있습니다. 그런 여성은 위험에 노출되기 쉽지요. 이런 일이 있음을 인정하고 테이블 위로 올려서 합법화하는 것이 낙태하려는 여성을 설득할 기회를 줄 수 있습니다. (그게 아니라면) 그녀들을 삶의 한가운데에서 소외시키는 것입니다. 그것은 위선적입니다. 우리가 책임을 져야 합니다. (206쪽) 


무신론자인 무히카의 생각은 여러 면에서 프란치스코 교황의 생각과 닮았다. 

하지만 부의 재분배나 교육의 질을 높이는 일 등 중요한 과제에서 무히카 정부의 성과는 두드러지지 않았다. 좋은 정치인이 좋은 정치에 실패했다고도 할 수 있다. 무히카는 그걸 인정했고, 그건 그의 '비범함'에 해당되는 부분이다.


무히카 정권은 타바레 바스케스 정부의 복지 정책, 즉 자녀가 있는 가난한 가정에 경제적 지원을 하는 정책을 이어받았고, 토지 집중에 세금을 걷는 등 소득 분배 문제를 해결하려는 몇 가지 시도를 했다. 첫 번째 정책은 야당의 공격을 받았는데, 특히 보수주의자들의 비난을 받았다. 토지 집중에 대한 과세는 대법원에서 위헌 판결을 받았다. 보다 근본적인 문제에 대한 좌파의 시도는 좌절되고 말았다. 

호세 무히카는 소득 재분배 문제를 담론 이상으로 밀어붙이는 데에는 실패했다. 그의 재임 기간 동안 실업률은 우루과이 역사장 최저 수준으로 떨어졌는데, 이는 곧 중남미 국가들 중에서 기장 소득 분배가 잘 이루어지고 있는 나라에서 급여를 받아 소비할 수 있는 사람들이 더 많아졌다는 것을 의미했다. 동시에 이전 정부로부터 이어받은 조세 개혁에는 소득세도 포함되었는데, 정규직 노동자들을 주 대상으로 한 이 악명 높은 ‘총소득세’ 덕분에 우루과이 정부는 경제성장을 지속할 새로운 자금줄을 잡게 되었고, 이로써 재분배에 관해 무히카 대통령이 늘어놓은 장광설은 무의미해졌다. 우루과이는 무히카 정부 5년 동안 부자가 더 부유해지는나라로 변모하고 말았다. (240쪽) 


사회에서 평등의 조건이 되는 가장 중요한 영역에서 무히카는 실패했다. 무히카가 의욕적으로 추진한 많은 정책은 관료주의에 부딪혀 불발했고, 교육 예산이 증가했음에도 구조적 문제와 충돌했다. 그는 한마디로 "나는 실패했다"라고 말했다. 

무히카는 야당과 공교육 개선에 합의했다. 그러나 이 합의는 교원 노조의 거부로 인해 중앙기구의 결정 사항을 교육 현장에 적용하지 못하게 되면서 실패하고 만다. 대통령은 결국 자기 신념을 포기했다. 아마도 그는 협상을 할 줄 몰랐거나 아니면 충분히 고집하지 않았을 것이다. 무히카 정부의 의지가 꺾이는 과정을 지켜본 많은 사람들에게, 대통령이 맞닥뜨렸고 우루과이의 모든 정치 체제가 맞닥뜨리고 있는 교육자들의 저항은 결정적인 것이었다. (273쪽)


무히키는 환경적 측면에서는 거의 한 것이 없다. 부분적으로 그 이유를 찾자면 그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많은 사람들이 일을 갖는 것이다. 무히카는 생태주의자가 아니다. 이러한 입장을 보여 주는 예가 1만 4500헥타르의 땅에 노천 철광산을 건설하는 프로젝트이다. 이 말 많은 사업을 요약해 보자면 일자리와 투자가 최우선이고, 투명성이 그 다음이며, 환경 문제는 제일 마지막으로 밀리는 것 같다. 노천 철광산은 효용을 다하고 나면 화성 표면처럼 황폐하고 버려진 풍경이 될 것이다. (275쪽) 


비록 국내에서는 중요한 문제에서 큰 업적이 없었고 심지어 후퇴한 부분도 있지만, 무히카 정권에 대한 전반적인 평가가 부정적이라고 말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무히카가 정부를 이끄는 동안 나라는 쉬지 않고 성장했는데, 이는 어떻게 보면 이전부터 성과를 내 오던 경제 정책 노선을 그가 존중할 줄 알았기 때문이다. 좌파 급진주의자들의 비판에도 불구하고 무히카는 경제 문제에서 보수적 입장을 견지했는데, 이는 경제가 잘 굴러가고 있으며 계속 그 길을 추구해야 한다는 신념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그의 임기 동안 실질임금은 증가하고 실업률은 감소했다. 

그가 잘한 것 기운데 또 하나는 에너지원 전환 정책을 공고히 하여 점차 더 깨끗하고 혁신적인 에너지로 바꿔 나갔다는 점이다. 풍력 에너지 덕분에 구체회된 이 정책은 석유가 나지 않는 국가에서 대단한 성과였다. (292쪽)


어떤 면에서는 실용주의자인데, 어떤 면에서는 이상주의자같은 사람. 무히카를 세계적인 히어로로 만든 또 한 가지, 관타나모 미군기지에서 풀려난 사람들(자기네 나라에선 '테러용의자'라며 거부한 사람들 혹은 자기 나라로 돌아가면 극도의 탄압을 받을 것이 분명한 사람들)을 받아들인 것과 시리아 난민 고아들을 받아들인 일이다. 


한국에서 대통령이 이런 결정을 내렸다면? 어떤 논란이 벌어졌을지 안 봐도 알겠다. 사실 한국이나 우루과이 아니라 어떤 나라에서라도 비슷한 논란이 벌어졌을 것이다. 비록 인도주의적인 결정일지 몰라도, '남의 일'에 쓸데 없이 손을 뻗느냐고 하는 이들이 대부분일 것이다. 무히카는 그런 일을 했다.


그 방식이 재미있다. 여러분이 싫어하는 거 알아요, 그래서 내가 묻는 거예요. 우리가 너무 인정머리 없는 것은 아닌지. 이렇게 물어보는 대통령, 멋지지 않은가?


2014년 4원 29일 라디오 연설에서 그는 국민들에게 질문 형식으로 문제를 제기했다. 

"연대 의식은 우루과이의 가치 중 하나입니다. 우리는 어디서나 텔레비전을 볼수 있는데, 실로 충격적인 일 중 하나는 시리아 곳곳에 있는 피난민 캠프에 버려진 아이들의 수가 어마어마하다는 것입니다. 한 사회로서 우리가 그 아이들에게 아무 책임이 없을 수 있을까요? 아이들 중 다만 몇 명이라도 거둘 의지라도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왜 우루과이의 가난한 아이들에게는 신경 쓰지 않습니까?'라고 질문할 사람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대다수는 적어도 측은지심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아주 조금이라도 말입니다. 그런데 그게 아니군요. 아무래도 제가 잘못 생각했나 봅니다. 어쩌면 우리 국민들의 영혼이 소비사회와 이윤추구에 눈이 멀었을 수도 있겠군요. 여러분은 아니라고 하겠지요. 하지만 저는 이런 문제로 머릿속이 꽉 차 국민 여러분께 이렇게 자문을 구하는 겁니다." 


이러한 제안이 마케팅의 일환이라는 비난에 맞선 사람은 대통령의 아내이자 상원의원인 루시아 토폴란스키였다. “대통령의 의견은 전 세계 모든 국가가 그와 같은 재앙에 책임감을 가질 것을 촉구하는 것이다. 우리는 지구촌 사회에서 함께 살아가고 있으므로 그 안에서 일어나는 일들에 공동으로 책임을 져야 한다."

토폴란스키는 기자들 앞에서 이렇게 단언했다. 그리고 "다섯 살 난 아이가 전쟁에서 홀로 살아남은 것은 마케팅이 아니라 현실이다"라고 덧붙였다. (253쪽)


그 외에도 무히카는 콜롬비아 정부와 무장혁명 반군(FARC)의 휴전협상을 자기가 중재하겠다고 나섰지만 그 '영광'은 쿠바의 라울에게 넘어갔다. 아마도 후안 마누엘 산토스 콜롬비아 대통령이 거절했을 것이다. ㅎㅎ 


그렇다면 무히카가 우루과이에 남긴 것은 무엇일까. 특정 분야의 성과가 아니라 그가 보여준 '정치인의 면모'가 최대 유산이 될 가능성이 높다. 


역사가인 헤라르도 카에타노는 "무히카 정부는 역사에 위대한 정부로 남지 않을 것이다"라는 의견을 표한다. 그러나 그는 이렇게 말을 이었다. "많은 부분에서 우루과이는 무히카 이전과 이후로 나뉠 것이다. 무히카는 다른 종류의 유산을 남겼다. 위대한 정치인들은 많은 이유로 역사에 남는데, 그중 하나는 시민들이 만들어 내는 것이다. 그는 자신의 행동과 사고방식, 그리고 생활방식을 통해 대통령도 '평범한 사람'이라는 것을 확인시켜 준 사람으로 기억될 것이다." (296쪽)


이 구절을 읽으면서 한국의 어떤 대통령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어떤 이들은 '성과'로 기억되지만, 역사 속엔 '하지 못한 일들'로 기억되는 이들도 분명히 있다. 하고 싶었지만 하지 못했던 일들, 그러나 남은 메시지들로 기록되는 사람들. 위대한 정치인들 중 어떤 이들은 시민들이 만들어 낸다... 인상적인 말이다.

명백히 내리막길을 걷고 있던 체제에 여러 발의 총알을 발사하는 성급한 정치 활동에서 출발한 이 불온한 저항가는 민주주의와 개인의 자유를 위해 차분하게 싸우는 세계적인 사도로 변모했다. 그는 여러 차례 변신했지만 언제나 잘 적응했다. 특별한 카리스마에 기반을 둔 뛰어난 소통능력으로, 한때 경멸의 눈으로 바라봤던 권력을 얻기 위한 선거에 도전했고 그것을 획득했다. 

대통령으로서 그는 정리된 의제가 없었다. 처음에 추진한 이런저런 주제들은 투파마로스 게릴라 노병에게 힘이 부쳤고 결국 중단되었다. 

1960년대에 쿠바를 방문한 뒤 우루과이로 돌아와 무기를 잡았던 그가 아바나에서 한 연설을 직접 들은 사람들은 세상을 바꾸려 하는 그의 순수한 소명의식만을 느낄 수 있었다. 그들은 삶을 먼저 살아간 한 노인의 조언을 들었다. 목표에 도달하기 위해 애쓰면서 자기 조건 안에서 움직인 한 실용주의자의 조언을. 자기 능력껏 정치와 삶을 조화시킨 한 사람의 조언을. 그리고 많은 승리를 거두었지만 더 많은 실패를 경험한 한 인간의 조언을. 그는 승리보다는 실패를 통해 더 많은 것을 배운다고 말하기를 좋아한다. 어느 정도는 그 말이 맞을 것이다. (303쪽) 


무히카의 집권은 비극으로 끝나지 않았고, 그는 지금도 다리 잃은 개와 폭스바겐 자동차를 타고 다니며 잘 지내고 있을 것이다. 그가 하고 싶어했던 일들, 하지 못했던 일들, 그럼에도 세계에 깊은 인상을 심어준 말들을 기록해놓고 싶어서 좀 길게 스크랩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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