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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픔이 길이 되려면

딸기21 2017. 10. 8. 15: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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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대학교 보건과학대학 김승섭 교수의 책 <아픔이 길이 되려면>(동아시아)을 읽었다. 이미 김 교수의 인터뷰를 읽으며 감동을 받았는데, 책을 읽어보니... 정말 너무나 좋다. 아프고 슬프지만 새겨 들어야 할 이야기들.


사회적 폭력으로 인해 상처를 받은 사람들은 종종 자신의 경험을 말하지 못합니다. 그 상처를 이해하는 일은 아프면서 동시에 혼란스럽습니다. 그러나우리 몸은 스스로 말하지 못하는 때로는 인지하지 못하는 그 상처까지도 기억하고 있습니다. 몸은 정직하기 때문입니다. 물고기 비늘에 바다가 스미는 것처럼 인간의 몸에는 자신이 살아가는 사회의 시간이 새겨집니다. (22쪽)


저자는 사회의 건강이 개인의 몸에 새겨진다고 말한다. 미국 하버드대에서 '사회역학'을 공부했다고 한다. 폴 파머를 비롯한 외국 학자들의 책을 보면서, 국내에서도 이런 분야의 연구가 이뤄졌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는데, 김승섭 교수 같은 분이 있어서 참 다행이다. 책의 구절구절이 너무나 따뜻하면서, 마음이 아프다.


1966년 루마니아의 니콜라에 차우셰스쿠는 낙태금지법을 시행합니다. 그 조치는 루마니아의 출산율이 급격히 줄어들고 있다는 위기감에서 기인했습니다. <Decree 770>이라고 불리는 낙태금지법이 시행되고 첫 4년 동안 여성 1인당 출산율은 2배 증가하고, 인구 1000명 당 태어나는 신생아수를 지칭하는 조출생률은 14명에서 21명으로 급격히 늘어납니다. 그러나 출산율 증가는 일시적이었습니다. 경제적으로 어려운 여성들은 의사의 도움 없이 유산하기 위해 위험한 방법을 선택했습니다. 그 결과 불과 4년 뒤인 1970년부터 조출생률은 다시 감소하고 1985년에는 법이 시행되기 이전의 상황으로 돌아옵니다.

둘째, 고아원 등의 시설에서 자라나는 아이 수가 증가했습니다. 마지막으로, 모성 사망비가 급격히 증가했습니다. 1989년을 기준으로 루마니아는 불가리아나 체코에 비해 모성 사망비가 9배 가까이 높았습니다. 1989년 12월 혁명으로 낙태금지법이 철폐된 다음 해에 루마니아의 모성 사망비는 이전의 절반으로 감소합니다. (35쪽)


책은 크게 네 부분으로 구성돼 있다. 1부 '말하지 못한 상처, 기억하는 몸'은 겉으로 드러내지 못한 마음의 상처도 몸에 새겨진다는 것을 설명하면서 루마니아의 낙태금지법 사례, 가난한 이들의 시신을 발판 삼이 이뤄진 해부학의 발전 등을 소개한다. 


16세기 영국의 왕 헨리 8세는 사형당한 죄수의 몸을 해부학자들에게 제공하기로 결정했습니다. 과학적 탐구를 지지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죄수의 몸에 대한 사회적 처벌이 주된 이유였습니다. 이는 1752년 사형수의 시체에 한해서 인체 해부를 허용하는 '살인자법'으로 공식화됩니다. 그러나 이후 의과대학 수가 급증하면서 해부를 위한 충분한 시체 확보가 어려웠습니다. 결국 암시장에서 시체 거래가 활성화되고, 새로운 직업이 등장합니다. 사체절도를 전문적으로 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사체절도범이 해부학자에게 넘긴 시체에는 공통점이 있었습니다. 모두 가난한 사람들의 시체였다는 점입니다. 불법적인 시체 거래에 대한 대중의 불안이 커지자, 영국에서 1832년 '해부학 법령'이 시행됩니다. 사형수의 시체만이 아니라 기증받은 시체도 해부할 수 있도록 법이 바뀐 것입니다. 그러나 해부용 시체가 가난한 사람들의 몸이었던 현실은 변하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역사적 사실은 살아 있을 때의 경제적 불평등이 죽음 이후에도 지속된다는 점 외에도 중요한 함의를 가지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가난은 인간의 몸을 변화시키기 때문입니다. 만성적인 스트레스가 혈중 코르티솔을 높이고, 그 결과 심장병, 고혈압, 당뇨와 같은 만성병 발생의 위험이 증가한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과학적 사실입니다. 코르티솔을 분비하는 신체기관은 신장 위에 있는 부신입니다. 가난한 사람들의 몸에서 일상적으로 코르티솔이 더 자주 더 많이 분비되면서 부신이 비정상적으로 커지는 것이지요. 1930년대까지 이러한 사실을 학자들은 알지 못했습니다. 

인류 역사에서 오랜 시간 사회적 금기였던 인체해부는 가난한 사람들의 몸을 발판으로 한 걸음씩 전진했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당연하게 여기는 해부학적 지식 뒤에는 가난으로 인해 물건을 훔치다가 사형을 당한, 가난으로 인해 구빈원에서 죽어갔던 이들의 몸의 역사가 있는 것입니다. (54쪽)


매일 생명을 위협받는 작업환경에서 일하는 노동자에게, 담배를 피우면 10년 뒤에 폐암이 발생할 수 있으니 지금 금연해야 한다는 주장은 설득력을 얻기 힘듭니다. 가난한 사람들의 흡연을 그대로 두어야 한다는 의미는 결코 아닙니다. 그 점을 고려하지 않은 금연정책은 효과를 보기 어렵다는 것을 뜻합니다. 

하버드 보건대학원의 글로리안 소런슨 교수는 이러한 사회적 맥락을 고려한 금연 프로그램을 개발하고, 역학적 방법을 이용한 프로그램의 효과를 보여주는 연구를 진행해 왔습니다. 연구팀은 2002년 출판된 논문에서 미국 매사추세츠 지역의 제조업 사업장들을 대상으로 무작위 실험연구를 했습니다. 작업장에서 위험한 물질에 계속 노출되며 일하는 노동자는 흡연뿐만 아니라 작업장 내 유해인자가 모두 건강을 해칠 거라고 생각합니다. 굳이 금연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할 수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금연 프로그램이 진행되고 6개월 뒤, 산업안전 프로그램을 함께 진행한 사업장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의 금연율이 금연 프로그램만 시행한 사업장의 노동자들보다 2배 가까이 높게 나타났습니다. 안전한 곳에서 일하게 된 노동자들일수록 금연 프로그램의 효과가 더 컸던 것입니다. (63쪽)


냉전이 무너진 후 동유럽 국가들의 평균수명이 급격히 감소합니다. 급격한 자본주의 도입을 주장했던 경제학자들은 동유럽 남성들의 과도한 음주, 살인과 같은 폭력의 증가를 그 이유로 지적했습니다. 

영국 옥스퍼드대학교의 데이비드 스터클러 교수는 과거 소련에 묶여 있던 여러 나라들의 건강지표를 하나하나 면밀히 살펴보기 시작했습니다. 

분석결과는 놀랍습니다. IMF 구조조정 프로그램에 참여한 나라의 결핵 발생률과 사망률은 각각 14퍼센트, 16퍼센트가량 유의하게 증가하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그리고 구조조정 프로그램에서 빠져나올 경우에 결핵 사망률이 평균적으로 31퍼센트가량 줄어들었습니다. 같은 시기에 동유럽 국가 중 거의 유일하게 IMF에서 돈을 빌리지 않고 다른 곳에서 빌렸던 슬로베니아는 오히려 결핵 사망률이 통계적으로 유의하게 감소했습니다. (69쪽)


파머의 <권력의 병리학>에 나오는 관타나모 섬 쿠바쪽 에이즈 감염자들과 미국령 쪽 감염자들 사례, 소련 붕괴 뒤 다제내성 결핵이 급증한 러시아 콤비나아트들 문제들과 일맥상통한다. 너무 당연한 이야기이지만 국가의 구체적인 보건정책뿐 아니라 국가의 인프라, 사회적 안정, 빈부격차 등 모든 것들이 한 사람 한 사람의 건강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러시아, 보드카, 푸틴 

살해될 확률이 백인의 6.3배... 통계로 본 미국 흑인들의 현실


책의 2부는 쌍용자동차 해고노동자, 삼성반도체 직업병 소송과 미국 IBM 직업병 소송, 원진레이온 문제 등을 다루면서 '일과 건강'의 문제를 알기 쉽게 설명한다. 무엇보다 김 교수의 이야기가 와닿는 것은 그가 그저 학자로서 통계를 들여다보기만 한 것이 아니라 '피해자'들의 요청을 받고 그들을 위해 조사에 나서면서 사회적 요구에 스스로 응답해왔기 때문이다.


2009년 파업에 참여했던 쌍용자동차 노동자 208명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에서 105명이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를 앓는 것으로 분류됐습니다. 같은 측정도구를 사용한 미국의 한 연구에서 1990년 제 1차 걸프전에서 실제 전투에 참가한 군인들의 22퍼센트가, 이라크 군에 포로로 잡힌(이 부분은 뭔가 저자의 오류인 듯도. 이라크 군이 아니라 후세인 잔당이나 저항세력에 붙잡혔을 수는 있겠지만) 군인들의 48퍼센트가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를 앓는 것으로 보고됐습니다. 

쌍용자동차에서는 2009년 이후 지금까지 29명이 뇌출혈로, 심장마비로, 당뇨 합병증으로 죽어갔습니다. 가장 흔한 원인은 자살이었습니다. 그렇게 세상을 떠난 이들 중에는 해고된 '죽은 자'와 그의 아내가 있었고, 해고되지 않고 공장에서 일하던 '산 자'도 있었습니다. 

건강 연구자인 제가 쌍용자동차 해고노동자에 대해 처음 관심을 가졌던 것은 계속해서 발생한 자살 때문이었습니다. '무엇이 해고노동자와 그 가족을 삶과 죽음의 경계에 놓이게 했을까.' 그러나 연구를 진행하면서 질문은 달라졌습니다. '한국이라는 나라에서 어떤 경로로 실업이 자살의 원인이 되는 것일까', 아니, 좀 더 구체적으로 '한국은 해고된 노동자들을 어떻게 대하고 있는가'에 대해 답하고 싶었습니다. (91쪽)


옥스퍼드대학교의 데이비드 스터클러 교수 연구팀은 2009년 실업률과 자살률의 관계를 검토한 흥미로운 연구 결과를 의학저널 '랜싯'에 게재합니다. 유럽 26개국에서 실업률의 증가가 어떻게 자살률에 영향을 주는지를 검토한 것입니다. 특히 주목할 점은 스웨덴을 비롯한 몇몇 북유럽 국가에서는 나머지 국가들과 달리 실업률과 자살률이 아무런 관련성이 없었던 점입니다. 

연구팀은 그 주된 이유로 '적극적 노동시장 프로그램'에 대한 국가의 투자에 주목했습니다. 스웨덴에서는 노동자가 직장을 잃으면 그로부터 30일 이내에 정부 고용지원센터에서 실업자를 위한 '개인별 확동 계획'을 작성하고, 6주에 한 번씩 직업 트레이너가 구직활동 방향을 상담합니다. 연구팀은 1인당 100달러를 투자하면 실업률 1퍼센트에 따른 자살률의 증가를 0.4% 낮출 수 있다고 보고합니다. (93쪽)


일본이 넘긴 기계를 가지고 일본같은 규제 없이 노동자들을 이황화탄소 중독으로 내몰았던 원진레이온 사건. 참 오랜만에 다시 듣는 이름. 그 기계는 고스란히 중국 화학섬유공사에 팔려갔다. 일본과의 합작으로 설립된 석면회사인 부산 제일화학 석면공장은 1990년 인도네시아로 이전했다. 작업장의 죽음들은 그렇게 세계의 생산 네트워크를 통해 더 가난한 나라들로 이전된다. 이 부분에서 저자는 삼성반도체 공장으로 시선을 옮긴다. 



저는 보상보다도 직업병 예방 측면에서 걱정스러운 점이 있습니다. 삼성은 두 가지 형태로 작업장의 위험을 외주화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위험한 작업을 국내 협력업체에 하청으로 맡기는 것입니다. 2013년 1월 삼성전자 반도체 화성공장의 불산 누출 사고 당시, 하청업체 노동자들이 제대로 된 보호구 없이 수습하다 숨진 것은 이런 구조 속에서 필연이었을지도 모릅니다.

도 다른 위험의 외주화는 노동력이 좀 더 저렴하고 작업장 내 규제가 적은 해외 지역에 공장을 세우는 것입니다. 삼성은 중국 시안의 반도체 공장을 비롯해, 인도네시아 등 아시아 지역에 20곳이 넘는 생산 거점을 만들며 공장을 세워가고 있습니다. 지금과 같이 가장 위험한 작업을 가장 약한 이들에게 넘기는 외주화가 지속되고 확대된다면, 규제의 손길이 닿지 않는 국내 하청기업의 비정규직 노동자나 인도나 중국의 누군가가 제2의 황유미, 제2의 이숙영이 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리고 아마도 보이지 않는 존재가 되어버린 그들의 상처와 고통을 우리는 인지하지 못할 것입니다. (119쪽)


공공보건학자 리처드 윌킨슨 영국 노팅엄대 교수는 저서 <평등해야 건강하다>에서 사회적 지위 격차 즉 ‘권력의 격차’와 소득 불평등, 빈약한 사회적 관계가 서로 연결돼 건강과 삶의 질을 결정한다고 지적한다. 이제는 한 사회 안에서뿐 아니라 지구적인 차원에서 김 교수가 이야기하는 '보이지 않는 존재가 되어버린 그들의 상처와 고통'을 인지하려고 애쓰지 않으면 안 된다.


3부와 4부는 그래서 우리 사회가 어떻게 나아가야 할 것인가, 어떻게 해야 건강한 사회가 될 것인가에 대한 조언들을 담고 있다. '끝과 시작, 슬픔이 길이 되려면'이라는 3부의 글들에서 저자는 세월호 참사와 동성결혼, 인종차별 등에 대해 이야기하며 조심스럽지만 확고한 의견을 전한다. 

4부에서는 사회적 관계망과 가습기 살균제 사망사건같은 현안들과 외국의 사례를 짚어보면서 자연스럽게 책의 주제인 '우리는 연결될수록 건강한 존재들'이라는 것으로 나아간다.


마지막에 소개된 미국 펜실베이니아의 로세토 마을 이야기는 윌킨슨의 책에도 소개된 사례다. 이탈리아 이민자 공동체였던 이 마을은 유독 심장병 사망률이 낮아 학자들의 눈길을 끌었다. 니스코 신부라는 지도자가 이 마을을 이끌면서 주변 채석장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의 극단적인 저임금을 막기 위해 싸웠고, 마을 사람이 죽으면 함께 애도하고 부모 잃은 아이들을 함께 돌봤다. 하지만 여느 마을들이 그랬듯 반 세기가 지나면서 젊은이들은 일자리를 찾아 타지로 떠났고, 로세토 공동체는 붕괴됐다. 동시에 심장병 사망률은 올라가 주변 지역과 비슷해졌다. 


로세토 이야기는 어떤 공동체에서 우리가 건강할 수 있는지에 대해 질문을 던집니다. 개인이 맞닥뜨린 위기에 함께 대응하는 공동체, 타인의 슬픔에 깊게 공감하고 행동하는 공동체의 힘이 얼마나 거대하고 또 중요한지에 대해서요. 당신에게도 그리고 저 자신에게도 묻고 싶습니다. 당신과 나, 우리의 공동체는 안녕하신지요. (29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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