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기가 보는 세상/칼럼 92

[바람과 물] “물을 팝니다” 말라 붙은 강, 상품이 된 물

2022년 여름 파키스탄에서 큰 물난리가 났다. 6월부터 시작된 홍수가 8월에는 국토의 3분의 1을 물에 잠기게 만들었다. 9월 중순까지 홍수로 1500명 이상이 목숨을 잃었는데 그 중 550여명이 아이들이었다. 피해를 입은 사람은 3300만명, 2억 4000만 인구 가운데 15%가까이가 영향을 받았다. 가라앉거나 부서진 집이 100만 채가 넘었다. 물적 피해는 400억 달러에 이른다. 세계보건기구(WHO)는 640만명이 원조를 기다리고 있다고 했다. 셰바즈 샤리프 총리는 “파키스탄 역사상 최악의 홍수”라면서 8월 25일 비상사태를 선포하고 국제사회에 도움을 요청했다. 인도, 파키스탄, 방글라데시 등이 위치한 남아시아는 원래 열대성 강우인 몬순이 여름마다 찾아오는 지역이다. 그런데 계속 기후변화로 상황이..

[바람과 물] 크루즈와 비행기, 코로나 시대의 여행

오랜만의 여행길. 2년여 만의 외국 방문이다. 인천국제공항에 아직은 항공편도 여행자들도 많지는 않았다. 하지만 비행기 티켓값은 하루가 다르게 치솟고 있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전 세계가 인플레이션에 시달리고, 중동과 북아프리카처럼 식량을 수입하는 지역에서는 ‘빵값 폭동’까지 걱정해야 하는 상황이다. 그 와중에도 나는 여행을 떠났다. 2년 동안 발이 묶여 있었던 터였기에, 오랜 베프와의 여행을 앞두고 마치 비행기 처음 타는 사람처럼 한껏 꿈에 부풀었다. 무얼 볼까 어디서 묵을까 의논하느라 톡방은 연일 부산스러웠다. 마침내 시작된 여행. 늘 그렇듯 일상으로부터의 탈출은 즐겁다. 세계가 이렇게 닫혀 있었던 적이 있었을까. 전염병이 갑자기 세상을 휩쓸었고, 수많은 나라들이 방역 봉쇄로 사람들의 이동을 ..

[한국의 논점] 미국과 중국 사이

미국은 2021년 8월 아프가니스탄에서 군대를 빼냈다. 철군 자체는 놀랄 일이 아니었다. 이미 전임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 때부터 예고됐던 것이다. 탈레반의 재부상도 예상됐던 일이다. 다만 그들의 진격 속도에 세계가 놀라고, 그것이 가져올 아프간인들의 고통을 걱정하는 것일뿐이다. 오히려 놀라웠던 것은 조 바이든 미국 행정부가 철군한 방식이었다. 일정을 정해놓고 유럽을 비롯한 전쟁 동맹국들에게는 오직 통보만 했다. 카불 공항에서 미군이 나가는 일정이라도 늦춰달라는 요구조차 들어주지 않았다. 유럽은 이례적으로 격앙된 반응을 보였지만 아프간전 동지였던 영국도, 독일도 씁쓸히 ‘미군이 철수한다니 거기에 맞추는 수밖에 없다’며 돌아서야 했다. 미국의 군사행동에 관한 바이든 대통령의 입장은 지난 30여년 동안 ‘케이..

BTS, 미얀마, 아시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이 임박한 2월 23일, 영국 BBC방송 웹사이트의 메인 뉴스 화면에는 바이든이나 푸틴의 뉴스와 함께 한국 엔터테인먼트 기업 하이브의 2021년 매출이 31%나 늘었다는 기사가 떠 있었다. 코로나19 시대에 콘서트는 없어졌어도 스트리밍과 굿즈로 더 많은 돈을 벌어들이는 방탄소년단. 다소간 고전적인 한국 이름보다는 어느 새 BTS라는 글로벌 네이밍으로 더 많이 불리는 이 아이돌 그룹의 행보는 시시콜콜한 것들까지 모두 세계 언론을 장식한다. ‘아시아계로는 처음으로’ 미국 대중음악계에서 쌓아올린 실적에서부터 ‘아시아 미소년이 외모의 기준의 되고 있다’는 기사까지, 환호와 분석이 넘쳐난다. BTS가 노래하는 ‘70억 개의 별’ 그들의 팬이 세계에 1억 명에 육박한다는 추정치도 있지만 정확..

[바람과 물] 쓰고 버리는 문화가 남겨 놓은 것들

아프리카 동쪽, 인도양에 닿아 있는 에티오피아 수도 아디스아바바 외곽에 코레(Kore)라는 마을이 있다. 현지 부족 언어인 암하라 말로 ‘더럽다’는 뜻이라고 한다. 마을이 그런 이름으로 불리게 된 것은 1960년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수도에 사는 수백만 주민들이 내다 버린 쓰레기를 모아 이 마을에 쌓아두기 시작한 것이다. 갈 곳 없고 달리 먹고 살 길도 마땅치 않았던 이들이 이곳에 모여, 쓰레기를 뒤져서 쓸만한 것을 주워 팔기 시작했다. 2014년에 정부가 쓰레기 산을 없애려고 했지만 무산됐다. 다른 곳 주민들의 반대 때문에 적치장을 새로 찾기도 힘들었거니와, 코레 마을에 사는 500여명에게는 쓰레기 더미가 곧 일터이고 자원이고 삶의 수단이었기 때문이다. 2017년에 쓰레기산이 무너져 113명이나 숨졌지..

[창비주간논평] 아프간 사태, 한국의 책임과 역할은

9·11, 10·7, 8·31. 암호 같은 이 숫자들은 이번 세기에 들어와 유라시아 내륙의 척박한 나라 아프가니스탄을 불길 속으로 몰아넣은 날짜들이다. 2001년 9월 11일 미국의 심장부에서 테러범들이 초유의 테러공격을 저질렀다. 한 달이 채 지나지 않아 미국은 아프간 폭격을 시작했고, 아프간 탈레반 정권은 수도 카불을 버리고 도망쳤다. 3년간의 미군 점령통치를 지나 새 정부가 출범하고 원조금이 흘러들어갔다. 민선 정부는 부패했고 탈레반은 사라지지 않았지만 그래도 아프간은 조금씩 앞으로 나아가는 듯했다. 학교가 문을 열고 여학생들이 공부를 시작했다. 여성 각료가 임명되고 독립적인 언론도 생겨났다. 원조금에 의존하고는 있었지만 적어도 수치상으로는 경제도 성장했다. 그럼에도 도저히 탈레반을 제거할 수 없었..

[정동길에서] 거북이는 다시 떠난다

코로나19로 세계의 관광지들이 문을 닫았다. 갈라파고스도 폐쇄됐다. 외부 관광객들을 실어나르던 항공편이 3월 중순부터 끊긴 것이다. 바다사자와 이구아나와 새들이 다시 섬들의 주인이 됐다. 찰스 다윈이 진화론을 연구했다는 에콰도르의 이 섬들이 200년만에 평화를 찾은 것 같다고 현지 언론들은 보도했다. 군도의 여러 섬 가운데 중심인 산타크루스에는 ‘외로운 조지’의 동상이 있다. 2012년 세상을 떠난 마지막 핀타섬땅거북이다. 조지가 죽으면서 이 종은 세상에서 사라졌다. 다른 거북이들도 언제 핀타섬땅거북이의 운명을 따를지 모른다. 그래도 인간에게 시달리던 이 단단한 생명체들은 코로나19 덕에 잠시나마 숨을 돌릴 수 있었을 것이다. 키토대학과 찰스다윈재단의 과학자들은 모처럼 이 섬의 생태계를 차분히 연구할 틈..

[정동길에서] 바이러스는 인종주의자가 아니다

미국에서 흑인 남성 조지 플로이드 사망을 계기로 항의 시위가 계속되고 있다. 폭력사태로 나아가면 어쩌나 했는데 플로이드의 추도식을 거치며 분위기는 한결 차분해졌고, 동시에 인종주의에 대한 고민들은 깊어지고 있는 것 같다. 몇 년에 한번씩 이렇게 미국에서 백인 경찰이 흑인을 살해하고 흑인들의 시위가 일어나곤 한다. 갈등이 몹시 격화됐던 2014년 ‘퍼거슨 사태’ 때나 지금이나 미국은 달라진 게 뭐가 있나 싶지만, 현지 언론들로 전해지는 소식만 보자면 이번에는 곧바로 구조적·제도적 인종주의 이야기가 나오고 경찰 개혁이 논의되는 모양이다. 인종주의에 항의하는 시위는 다른 나라들로도 퍼졌다. 미국 흑인들에게 연대를 표명하는 사람들을 보면 그들이 짊어져야 했을 그들만의 고통을 상상하게 된다. 시크시카잇시타피. 영..

[정동길에서]‘늙은 사회’가 될 준비

2003년 유럽에 폭염이 닥쳤다. 유럽 전역에서 무더위에 사람들이 숨져 나갔고 그해 농사도 망쳤다. 프랑스, 포르투갈, 스페인, 이탈리아 등 남유럽 쪽 상황이 심했다. 프랑스는 그중에서도 유독 피해가 컸다. 유럽 전체에서 7만명가량 숨졌는데 그중 프랑스의 사망자가 1만5000명에 이르렀다. 고령자가 대다수였다. 고립돼 홀로 지내던 노인들이 아무도 모르는 죽음을 맞았다. 숨지고 한참 지나서야 시신이 발견된 경우도 많았다. 가을로 접어들도록 가족을 찾지 못한 노인 시신이 50구가 넘었다. 정부는 노인들을 돌보지 않은 가족들에게 책임을 돌렸고, ‘주 35시간제’를 이유로 일하는 시간을 줄이고 여름휴가를 간 의사들 탓을 했다. 그러나 부실 대응과 보건시스템의 허점을 감출 수는 없었다. 휴가에서 일찍 복귀하지 않..

[정동길에서] 코로나19와 아마존

미국 전자상거래 회사 아마존은 지난 17일 10만명을 채용하겠다는 계획을 발표했다. 뒤이어 코로나19 때문에 미국에서 올 상반기에 일자리 1400만개가 사라질 것이고 2분기 실업률이 30%에 달할 수 있다는 우울한 전망들이 잇달아 나왔다. 10만명 고용은 어마어마한 약속이다. 4월부터는 직원들 최저시급도 이전보다 2달러 올려준다고 했다. ‘맥잡(맥도널드 점원)’이라 불리는 미국의 저임금 노동자들은 시급을 15달러로 올려달라며 몇 년 동안 힘들게 싸워왔다. 코로나19가 아마존 노동자들에게 이를 현실로 만들어준 건 아이러니하다. 임금을 올리고 10만명을 고용한다는 약속을 아마존이 지킨다면 대단한 일이 되겠지만 저 중에는 파트타이머들도 상당히 포함될 것이어서 일자리의 ‘질’은 장담할 수 없을 것 같다. 아마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