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기가 보는 세상/유럽이라는 곳

보리스 옐친, 풍운아 세상을 뜨다

딸기21 2007. 4. 24. 16: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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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너져가는 소련 공산주의에 치명타를 날렸던 보리스 옐친.

소련의 첫 직선대통령으로 당선돼 스스로 소련의 붕괴를 선고하고 러시아의 부활을 선언했던 옐친 전 러시아대통령이 23일 타계했다. 그가 남긴 유산에 대한 평가는 아직 끝나지 않았으며 찬사와 비난이 여전히 엇갈리고 있지만 한 시대의 획을 그은 인물임에는 틀림없다. 역사적 공과를 남긴채 세상을 떠난 옐친에 세계 각국 정상들의 애도가 쏟아졌다. 크렘린은 25일을 추모의 날로 선포하고 옐친의 장례를 성대하게 치르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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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해는 모스크바의 수도원 묘역으로

흔들리던 소련에 마지막 일격을 가하고 `민주 러시아'를 출범시킨 옐친이 이날 지병인 심장병 때문에 76세를 일기로 모스크바 중앙병원에서 사망했다고 인테르팍스 통신이 보도했다. 옐친은 오래전부터 심장질환을 앓아왔으며 대통령 재직 시절에도 심장 수술 때문에 업무를 중단한 적이 있다. 옐친은 퇴임 뒤 모스크바 근교의 별장에서 부인 나이나 여사와 함께 지내며 사냥과 독서 등으로 소일해온 것으로 알려졌다.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은 장례식이 치러지는 25일을 국가애도의 날로 선포했다. 푸틴 대통령은 "새로운 시대를 연 인물, 세계를 향해 열린 자유민주주의 러시아를 탄생시킨 인물, 권력을 인민의 손에 되돌려준 인물이 세상을 떠났다"며 고인을 추모했다. 옐친의 유해는 장례 뒤 모스크바의 노보데비치 묘지에 안장될 예정이다. 이 묘지는 16세기에 건설된 수도원과 역사박물관에 딸린 것으로 니콜라이 고골과 안톤 체호프, 블라디미르 마야코프스키 등 러시아의 유명한 문인과 정치가들이 묻혀있는 곳이다.

세기의 풍운아

소련의 해체와 공산주의 붕괴, 러시아 공화국의 탄생과 자본주의 이행이라는 격동기를 이끈 옐친은 1930년 우랄산맥 부근 스베르들로프스크주(州)의 부트카라는 시골마을에서 태어났다. 우랄공과대학을 나와 건축기사로 일하던 그는 1961년 공산당에 입당하면서 정치에 투신했다. 타고난 저돌성과 도전정신, 승부사 기질과 흡인력을 가졌던 옐친은 1976년 주 공산당 중앙위원회 제1서기가 됐고 5년 뒤에는 소련 공산당 중앙위원에까지 오르는 등 성공의 길을 걷는다. 중앙당에서 옐친의 스폰서가 돼줬던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훗날의 정적인 미하일 고르바초프였다. 고르바초프는 1985년 공산당 서기장이 되면서 옐친을 모스크바당 제1서기로 발탁, 중앙 정계로 이끌었다.

이 때부터 공산당 내에서 옐친은 개혁파의 상징으로 굳어지기 시작했다. 옐친은 당과 체제의 개혁을 요구하면서 대중적인 기반을 닦고 당시 소련 공산당에선 전례를 찾아보기 힘들었던 `대중 정치인'의 면모를 다졌다.

1989년 소련 인민대표대회 선거에서 당선된 그는 의회에서 공산당 권력독점을 폐기할 것을 주장하며 급진적인 개혁을 주장했다. 철의 장벽을 넘어 옐친이라는 인물의 존재를 세상에 알린 것은 1990년5월 소련의 초대 민선 대통령에 당선되면서부터. 이듬해 8월 보수파 공산당원들의 쿠데타가 일어났지만 대세를 거스를 수는 없었다. 옐친은 탱크 위에 올라가 쿠데타 세력을 설득함으로써 민주화의 상징이 됐고, 쿠데타는 `사흘 천하'로 끝났다. 점진적 개혁을 추진하려 했던 고르바초프 세력은 실각했다. 옐친은 수명이 다한 소련에 사망선고를 하고 러시아공화국의 탄생을 선언했다. 베를린 장벽의 붕괴 만큼이나 급속하게 냉전의 한 축이던 소련은 무너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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엇갈리는 평가와 끝나지 않은 `옐친의 유산'

옐친은 역사적 소용돌이의 한복판에 서기를 겁내지 않았던 인물이었다. 공산당 시절에는 `체제 내의 야당'으로서 민주주의 도입과 개혁을 주창했고, 대통령이 된 이후에는 절대권력을 휘두르며 러시아의 체제 변환을 주도했다. 그의 업적에 대해서는 찬사와 비난이 극단적으로 교차한다. 옐친이 탄생시킨 러시아에서는 부패와 범죄가 판을 쳤다. 특히 옐친 휘하 크렘린 관리들과 마피아적인 과두재벌(올리가르흐) 집단의 결탁관계는 부정축재와 숱한 범죄를 낳았다. 잘못된 민영화는 국부 유출과 재정 파탄을 불렀다. 러시아인들의 생활수준은 옛소련 시절보다 급격히 떨어졌다. 급기야 러시아는 1998년 대외채무 지불유예(모라토리엄)를 선언하고 `세계의 병자'로 전락하는 처지가 됐다.


`학습되지 않은 민주주의'도 부작용을 불렀다. 공산당의 통제가 사라지자 인신매매, 마약, 조직폭력이 기승을 부렸다. 옐친 이후 상당수 러시아인들은 오히려 `강력한 국가권력'을 원하게 되는 역설적인 현상마저 나타났다. 개혁의 의지는 높았지만 결과는 낙제점이었다. 옐친이 알콜중독자라는 소문까지 퍼졌다.


옐친은 1999년 말 건강 문제를 들어 푸틴 당시 총리를 권한대행으로 지명한 뒤 대통령직에서 물러났다. 퇴임 직전 옐친의 지지율은 한자릿수에 불과했다. 푸틴은 이듬해 선거에서 압승을 거뒀고 현재 연임을 하며 절대권력을 행사하고 있다. 옐친의 정치적 승계자인 푸틴 체제는 태생적으로 옐친의 공과에 맞서야 하는 숙명을 안고 있다.


푸틴 정부는 옐친이 남긴 막대한 재정적자를 석유수입으로 메우고 있다. 푸틴 정부는 이를 위해 옐친 시절 올리가르흐들에 넘어간 에너지회사들을 재국영화하는 조치들을 취했다. 푸틴은 체첸 분리독립운동 진압작전, 즉 `체첸 전쟁'을 통해 러시아의 지도자 자리를 굳힐 수 있었다. 옐친이 일으켰던 체첸 전쟁은 아직도 끝나지 않았으며 지금까지도 크렘린은 체첸에 발목을 잡힌 상태다. 옐친이 도입한 미숙한 민주주의는 푸틴의 `제한된 민주주의'에 자리를 내줬다. 러시아는 또한 옐친이 손에서 놓쳐버린 국제무대에서의 지도력을 되찾기 위해 분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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