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기가 보는 세상/아시아의 어제와 오늘

'문화재 대장정'의 흔적을 찾아

딸기21 2010. 7. 7. 2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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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중국 서부 충칭 교외. 백발이 성성한 안내원이 대나무 숲으로 들어가고 있다. 질척거리는 숲길로, 일군의 학자들의 안내원의 뒤를 따라 들어간다. 이들이 찾아낸 것은 대숲 안쪽 동굴에 있는 낡은 나무상자들이다. 중국 황실이 수백년간 지녀왔던 진귀한 그림, 서예, 옥(玉)과 도자기가 들어있던 상자들이다. 보물들은 이미 다른 곳으로 옮겨지고 텅 빈 상자 뿐이었지만 ‘보물 대장정’을 추적하러 나선 사진작가와 다큐 제작자들은 바삐 셔터를 눌렀다.
학자들은 중국 베이징의 국가박물관과 대만 타이페이 고궁박물관에서 나온 이들이었다. 6일 미국 뉴욕타임스는 1930~40년대 전쟁과 약탈을 피하기 위해 자금성에서 빼낸 옛 청 황실의 문화재들의 경로를 되짚는 중국과 대만 학자들의 답사여행 동행 르포를 실었다.

사진을 보시려면  ▶ http://www.nytimes.com/slideshow/2010/07/07/arts/design/07treasures-ss.html 




몇년 전부터 중국과 대만 사이에 “전쟁 시기의 보물 이동경로를 탐사, 회복 못한 문화재들을 함께 찾자”는 협력 분위기가 생겼다. 2주 간에 걸친 이번 답사는 두 국립박물관 학자들의 7번째 공동 탐사였다. 학자들은 충칭의 오래된 도서관, 보물이 숨겨있던 절과 창고 등을 돌며 문화재들의 이동경로를 둘러봤다.
베이징 박물관의 리원루 부관장은 “그런 험난한 전시에 100만점이 넘는 유물을 하나도 빠짐없이 1만㎞ 떨어진 이 곳으로 옮겼다는 것 자체가 기적”이라고 말했다. 이번 답사에서 학자들을 안내한 좡링(72)은 70여년 전 보물을 숨기는데 관여했던 사람의 아들이다. 그는 “아버지가 문화재 목록을 만들어 관리했던 기억이 난다”며 “맑은 날에는 눅눅한 동굴에서 그림과 서예작품들을 꺼내 햇볕에 말리곤 했다”고 말했다.

청 황실이 갖고있던 보물은 대부분 송(960~1276년) 시절의 것들로 100만점이 넘었다. 마지막 황제 푸이(溥儀)가 1912년 퇴위하자 황실은 보물들을 외국에 팔 계획을 세웠다. 이듬해 황실은 미국 기업가 JP 모건에게 황실 문화재들을 400만달러에 팔겠다는 제안을 했다. 그러나 모건이 전신을 받은 직후 숨지면서 이 계획은 무산됐다.
31년 일본군의 공격이 시작되자 보물을 지켜야 한다는 위기의식이 높아졌다. 37년 난징 대학살이 벌어지기 직전, 옛 황실 가족들과 당국은 문화재들을 세 그룹으로 나눠 내륙의 충칭으로 옮기는 작업을 시작했다. 중국 측은 참호, 동굴, 절, 심지어 민가에도 보물들을 나눠 숨겼다. 45년 일본이 항복한 뒤 보물의 상당수는 난징으로 다시 옮겨졌다. 그런데 이번엔 국민당과 공산당 사이에 이른바 ‘국공 내전’이 일어났다. 서화 작품의 대다수는 패배한 장제스가 대만으로 가져갔고, 20% 정도만 베이징으로 돌아갔다.
보물들은 대만에서도 수년간 동굴 신세를 져야했다. 중국 공산군의 폭격을 두려워한 국민당 측이 동굴에 숨겨뒀기 때문이다. 65년에야 타이페이 고궁박물관이 개장하면서 문화재의 거처가 생겼다. 중국 베이징의 박물관 쪽은 50~60년대까지 방문객이 거의 없었고 문화재 보유량도 상대적으로 적었다.

그동안 수습된 보물들, 타이페이 박물관에 소장된 문화재들의 소유권은 중국과 대만 사이의 오랜 분쟁거리다. 중국 측은 “청 황실의 박물관은 오직 하나뿐”이라며 모든 문화재가 베이징 박물관에 귀속돼야 한다고 주장한다. 타이페이 박물관의 추후이량은 “일단은 탐사에 서로 협력하고 있으나 양측 모두 민감한 소유권 문제에는 입을 다물고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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