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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니뇨와 제국주의로 본 빈곤의 역사

딸기21 2008. 7. 20. 20: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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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니뇨와 제국주의로 본 빈곤의 역사. Late Victorian Holocausts. 
마이크 데이비스. 정병선 옮김. 이후 



제목은 거창하게 붙였는데, 실제로는 원제 그대로 ‘빅토리아 후기 즉 19세기 말 엘니뇨로 인해 벌어진 범지구적 차원의 기근’을 집중 조명한 책. 따라서 ‘빈곤의 역사’라고까지 할 것은 없고, ‘빅토리아 후기 기근으로 본 환경재앙’ 정도로 읽어주면 될 것 같다.


재미있었다. 중국, 인도, 브라질을 중심으로 엘니뇨와 대규모 환경파괴, 식민통치의 범죄적 양상과 그로 인한 19세기 말 초유의 대기근을 살피고 있는데, 저자 스스로 말했듯 ‘기근의 정치생태학’이라고 보면 된다. 


요는, 가혹한 식민통치(중국의 경우 완전한 식민지는 아니었지만 서구의 압박 속에 제국이 제 기능을 잃었다는 점에서 맥락은 같다고 본다) 속에 우리가 오늘날 ‘제3세계’ 바꿔 말하면 ‘못 사는 나라들’이라고 부르는 지역들이 무대책으로 글로벌 경제구조에 통합됐다는 것이다.
 

착취당하다 보니 인프라가 무너지고, 토양 침식 등 환경재앙의 요인들이 축적되고, 드디어 강력한 엘니뇨가 들이닥치자 수백만, 수천만이 굶어죽는 일이 일어났다. 기근은 어느 시대에건 있었다지만 1870~1900년의 대지진은 규모 면에서 엄청났다, 하지만 기근은 정치경제적 요인으로 만들어지는 것이지 단순히 식량이 부족해서 일어난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식량은 부족하지 않았는데 식민 모국에 이것저것 다 빼앗기다 보니 식량 수급이 잘 안 돼서 그런 일이 생겼다는 것.


중요한 점이라고 한다면, 당시의 대기근이 결국 그 지역들의 정치-경제-인구구조를 모두 왜곡시켰고, 결국 그 나라들을 오늘날의 제3세계로 만들었다는 것. 저자는 중국 인도 브라질을 주로 분석했는데 이 나라들은 오늘날 브릭스(BRICs)니 뭐니 해서 ‘신흥 경제대국’들로 각광받는 나라들이다. 이 세 나라야 ‘운 좋게도’ 땅덩이가 크고 가진 자산이 많아서 다시 기가 살아나고 있는지 모르지만, 세 나라가 아닌 중남미와 아시아, 아프리카의 제3세계 빈국들을 놓고 보면 저자의 통찰력을 부인할 수 없다. 
 

책은 또 당시의 기근이 식민지로 전락한 지역들에서 ‘천년왕국 운동’과 같이 보편적인 양상을 띠는 저항운동을 촉발했던 것, 남아프리카에서 줄루 왕국이 식민세력에 맞서 이긴 뒤에 기근 때문에 스러지면서 네덜란드계(보어인)가 어부지리 격으로 세력을 확장할 수 있었던 것, 아프리카에서 굶주림으로 인한 인구 이동이 벌어지면서 촌락들이 붕괴되고 서방에 손쉽게 노예로 잡혀갈 수 있었던 것 등등, 당시에는 예측할 수 없었지만 후대에 두고두고 영향을 미친 기근의 파급효과들을 조명하는 데에도 상당 부분을 할애하고 있다. 


다만, 첫머리에서부터 야심만만하게 ‘기근의 연결고리’로 지목한 엔소(엘니뇨 남방진동)의 역학 관계에 대해서는 오히려 이렇다할 결론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이는 저자의 문제라기보다는 엘니뇨의 작용이 워낙 불가측적인데다가 인위적 지구온난화와 엘니뇨의 관계에 대해 학계에서도 이견이 많기 때문이겠지만.


결국 문제는 굶주림이다. 빅토리아 후기에서 한 세기가 지나갔어도 기근은 여전히 수십만, 수백만의 사람들의 목숨을 죄고 있다. 지난세기 후반 이후의 기근은 거의 다 아프리카에서 일어났다 하더라도, 우리에겐 지금 당장 주린 배를 안고 죽어가는 이북의 동포들이 있다. 뿐만 아니라, 긴급구호의 대상에서도 제외되곤 하는, 엄격한 의미의 기근(다수의 아사자가 발생하는)이 아닌 아프리카 곳곳의 ‘만성적 대규모 영양실조’ 현상도 심각하다. 기근을 어찌 할까. 기근의 해법은 정치에 있다는데.


▷ 알렉산더 드 발은 이렇게 쓰고 있다. “어떤 사태를 누가 ‘기근’이라고 규정하느냐는, 사회 내부 및 사회들 사이의 권력관계 문제다.” 그는 대규모 기아 사태가 기근 정의의 필요조건이라는 맬서스주의적 관념을 거부한다. 굶주림, 빈곤, 사회 붕괴 등 더 광범위한 의미의 스펙트럼을 지지하는 것이다. 기근에 대한 아프리카인들의 전통적 이해방식이 바로 이렇다. 이들은 영양실조와 기근, 가난과 기아의 말뜻을 명확하게 구분하지 않는다. 그들은 기근으로 공인된 곳에는 원조를 쏟아 부으면서 전 세계 유아사망률의 절반을 차지하는 만성 영양실조는 냉담하게 무시해버리는 부국들의 윤리적 계산법도 도무지 이해하지 못한다. 


▷ 문제는 가난한 농민 수천만 명이 끔찍하게 죽었다는 게 아니라, 19세기 경제사에 대한 전통적 지식과 상당히 모순되는 이유와 방식으로 그들이 사망했다는 사실이다.... 다시 말해 우리는 노동력과 생산물이 런던을 중심으로 한 세계경제에 징발되던 특정 시기(1870~1914년)에 열대 지방의 인류가 겪어야만 했던 운명을 다루고 있는 것이다. ‘근대 세계체제’의 외부가 아니라, 바로 그 근대 세계의 경제와 정치 구조에 강제로 통합당하는 과정에서 수백만명이 죽었다. 그들은 자유 경쟁 자본주의의 황금시대에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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