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맘대로 세계사/동유럽 상상 여행

12. 헝가리 사람들은 어느 민족?

딸기21 2012. 9. 13. 10: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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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10-13세기 헝가리의 흥기


투르크계인 마자르 Magyar 족은 핀란드-우그리아계 언어를 씁니다. 이들과 언어적 관련성을 보이는 것은 핀란드계와 에스토니아계라고 하는데요. (옛날에 핀란드와 헝가리가 우랄알타이 어족이라서 우리랑 언어구조가 비슷하다고 선생님한테 들은 적 있는데 사실이 아닌가 봅니다. 아무튼 재미삼아 헝가리어를 구글번역기로 돌려보면, 최소한 영어를 비롯한 다른 유럽언어들보다는 알아먹게끔 나오더군요 ㅎㅎ)


마자르족은 원래 유라시아 스텝 지대에 살고 있었는데, 또 다른 스텝 부족인 펜체네크 Pencheneg 족에 밀려서 9세기 후반 중·동부 유럽에 들어왔습니다. 그 중 아르파드 Árpád 가문이 이끄는 마자르족 일곱 부대는 판노니아에 기지를 세우고 대모라비아를 무너뜨리며 유럽 깊숙이 쳐들어오기 시작했습니다. '아르파드 대공'이라 불린 위대한 지도자에게서 시작된 아르파드 가문은 훗날 아르파드 왕조를 이루지요. 마자르족의 무자비하고 잦은 공격은 유럽인들에게 아틸라와 훈족의 침공을 연상시켰습니다. 마자르족과 그들의 나라가 헝가리 즉 ‘훈족의 나라’라는 이름을 얻게 된 것은 그 때문이랍니다.

 

헝가리 남부 오푸차체 Ópusztaszer 에 있는 국립기념공원의 아르파드 상. /위키피디아



유럽으로 밀고 들어가는 아르파드, 그리고 아르파드의 아내. 소가 끄는 수레가 인상적이네요 ㅎㅎ 두 그림 모두 오푸차체 국립기념공원에 있는 역사화랍니다. /위키피디아



유럽 원주민들이 반격을 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습니다. 신성로마제국의 그 유명한 오토 대제(오토1세·936-973년 재위)가 게르만 군대를 이끌고 955년 아우크스부르크 외곽에서 마자르족과 싸워 대승을 거뒀으나, 마자르족은 이전에 들어왔던 투르크계 다른 민족들과 달리 유럽에서 다시 나가거나 와해되지 않았습니다.


마자르 지도자인 대공 게자1세 Géza I (972-997년 재위)는 판노니아의 부족세력들을 다시 결집시킨 뒤 평원을 둘러싼 산악지대와 트란실바니아 고원, 카르파티아 산지를 방벽 삼아 방어에 나섰습니다. 그리고 나서야 신성로마제국의 가톨릭 선교사들에게 국경을 열어주었습니다.


9세기 말, 유럽의 동쪽 변방에 진을 친 마자르족.


10세기, 유럽으로 밀고 들어온 마자르 족... 그래서 로마가톨릭에는 "Sagittis hungarorum libera nos Domine" 즉 '신이여 우리를 헝가리인들의 화살에서 구해주소서' 하는 기도문까지 생겨났다고 합니다.



11세기 초반에 이르자 마자르족은 모두 가톨릭으로 개종했습니다. 중·동부 유럽에 세워진 그들의 나라는 고도로 중앙집권화된 국가였고, 그들의 나라도 중세 유럽 사회의 일원으로 받아들여졌습니다. 교황은 서기 1000년에 마자르 지도자 성 이스트반1세 St. Istvan (997-1038년 재위)에게 국왕 칭호를 내려주었습니다. 그래서 이스트반1세는 헝가리 왕국의 첫 국왕으로 불립니다. (이스트반 자보라는 헝가리 영화감독이 생각나네요 ㅎㅎ '이스트반' 하면 멋지게 들리는데, 영어로는 걍 스티븐 Stephen ... ) 

완고한 가톨릭 교도였던 이스트반은 즉위하자 정교회 선교 활동을 억압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때까지도 많은 부족세력들이 따르고 있던 마자르의 전통 신앙들도 탄압했습니다. 그는 사람들이 거주하지 않는 황무지 뿐 아니라 힘을 빼앗긴 부족 족장들의 땅까지 몰수해 왕실 것으로 만들었습니다. 


일부 토지는 가톨릭 교회에 주었지만 그 자산들을 관리하는 것은 국왕이 임명한 관료들의 몫이었습니다. 변경, 특히 북쪽과 동쪽의 카르파티아 산악지대에 조직적인 방어체계를 만들어 트란실바니아, 슬로바키아, 루테니아에 이르는 넓은 영토를 지킬 수 있는 기반을 닦았습니다.


이스트반은 또 주도면밀하게 마자르의 전통적 부족질서를 무너뜨리고 신성로마제국에서 배워온 프랑크식 체제로 바꿔나갔습니다. 하지만 이스트반은 마자르 땅에 대한 통치권을 주장하는 신성로마제국의 요구는 일축했습니다.


이스트반1세는 카르파티아 분지를 넘어 헝가리 땅을 넓힌 정복자인 동시에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습니다. 교황 그레고리오7세가 그를 성인으로 시성했기 때문에 이름 앞에 '성 Saint'이 붙습니다. 부다페스트에 있는 동상은 성인이자 정복자인 이스트반1세의 모습을 표현하고 있네요. /사진 위키피디아



너무 강력한 지도자였던 탓일까요. 이스트반이 죽자 마자르 사회에서는 이스트반 시절의 급진적 변화에 대한 반발이 터져 나왔습니다. 이스트반이 직계 자손을 남기지 않은 까닭에 베네치아 총독이던 조카 피에트로 오르세올로 Pietro Orseolo 가 대를 이어 1038-1046년 잠시 왕위에 올랐습니다. 하지만 오르세올로는 친로마, 친이탈리아 정책을 펼치다 축출됐고 신성로마제국의 침공과 불안정한 정치상황이 잠시 이어졌습니다. 어째 이 지역은 태평성대가 없어... 


이교도의 발흥과 정정불안은 아르파드 가문의 안드라스1세 Andras I(1047-61년)가 집권해 다시 통치권을 확보한 뒤에야 가라앉았다. 안드라스1세는 신성로마제국을 압박, 1058년 다시 헝가리의 독립을 공인받았습니다. 그리고 이스트반의 정책으로 회귀해 왕실에 모든 권력을 집중시켰습니다. 뒤를 이은 지배자들도 그의 노선을 따랐습니다.


하지만 헝가리의 내부 질서가 완전히 정착된 것은 성 라즐로1세 St. Laszlo (1077-95년 재위) 국왕 때였습니다. 그는 교황 그레고리오7세와 신성로마제국 황제 하인리히4세 Heinrich IV(1056-1106년 재위) 사이에 이른바 ‘서임권 분쟁’이 일어나자 교황 편에 서서 농업·상업 분야의 이익을 얻어냈습니다. (참고로 라즐로1세의 라틴식 표기는 Saint Ladislaus I 입니다. 중세 영어 표기로는 Saint Lancelot ...)



★서임권 분쟁


이거 고등학교 시절 세계사 교과서에서 배운 거네요. 서임권은 성직자를 임명하는 권한을 말합니다. 원래는 교황을 수장으로 하는 교회의 권한이었는데 세속 권력자, 즉 유럽 각국의 왕들이 이를 침범하는 경우도 많았습니다. 교황 그레고리오7세는 교회 개혁을 내세워 황제가 나눠 가졌던 서임권을 몰수하려 했습니다.
그러자 하인리히4세는 아예 자기가 교황을 새로 뽑겠다며 나섰고, 교황은 이에 맞서 황제를 파문해버렸습니다. 다른 제후들은 하인리히4세의 생각과 달리 교황을 편들고 나섰습니다. 결국 세력에서 밀린 하인리히 4세는 1077년 겨울 알프스 산맥 북쪽 카노사에서 교황 앞에 무릎을 꿇었습니다(‘카노사의 굴욕’). 이로써 종교권력과 세속권력의 싸움은 종교권력의 승리로 일단락됐습니다.



라즐로의 즉위식을 담은 14세기의 그림. /위키피디아



1091년 라즐로는 크로아티아, 슬라보니아, 보스니아를 정복하고 아드리아 해로 나가는 항구를 손에 넣었습니다. 하지만 해안과 후배지(後背地)의 통제권을 놓고 베네치아와 갈등을 빚게 됐습니다. 라즐로는 발칸의 새 점령지에 반(ban)이라 부르는 총독을 파견, 느슨한 감독권을 주는 대신 자치를 허용하기로 약속하고 한발 물러섰습니다. 하지만 라즐로의 후계자인 칼만1세 Kalman I(1095-1114년 재위)는 1102년 베네치아인들에게서 크로아티아의 해안지대를 완전히 빼앗았고 크로아티아-슬라보니아 귀족들을 헝가리 왕실로 흡수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헝가리와 크로아티아-슬라보니아 사이에 체결된 1102년의 이른바 ‘팍타 콘벤타 Pacta conventa(협정)’는 사실상 헝가리의 압력에 의한 늑약이었기에 두고두고 논쟁거리가 됐습니다. 


헝가리인들은 이 협정을 크로아티아 병합의 근거로 봅니다. 반면 크로아티아인들은 자신들의 영토에 대한 정치적, 법적, 사회적 자치가 협정에 규정돼 있다고 주장한 겁니다. 헝가리 군주를 지배자로 인정하고 헝가리-크로아티아 왕국으로 통합되는 대신 자치를 약속받았다는 것이죠. 이 문제로 갈등이 이어지긴 했지만 어쨌든 1102년부터 20세기 초반에 이르기까지 크로아티아-슬라보니아는 헝가리에 묶여 있었습니다. 보스니아는 좀 달라서, 헝가리에 종속된 정도가 훨씬 약했습니다.


12세기 대부분 기간 동안 헝가리 왕정은 불안정을 겪었습니다. 그럼에도 이 기간 국방과 경제는 강해졌습니다. 또 게르만계 작센(색슨)족과 세케이 Székelys 족을 비롯한 여러 부족의 땅, 특히 트란실바니아를 식민지로 삼아 통치 영역을 넓혔습니다.


트란실바니아라는 지역에 대해서는 나중에 따로 다룰 것이고, 지금은 경치만 감상... ㅎㅎ



나라는 넓어졌지만 왕위 계승을 둘러싼 정정불안이 계속돼 행정기능이 왕실 일원들에게로 나뉘면서 결과적으로는 강력한 귀족계급이 생겨났습니다. 1222년 귀족들은 안드라스2세(1205-1235년 재위)를 압박해 ‘황금 황소’ Chrysobullos (라틴어로는 bulla aurea. 비잔틴 제국의 황제가 포고령에 서명할 때 쓰던 인장을 말하죠. 여기서는 황금황소 인장이 찍힌 국왕과 제후들 간의 합의서를 가리킵니다)라 불리는 칙령을 받아냈습니다.


귀족들의 특권을 보장한 이 칙령은 헝가리 왕국의 헌법 성격을 갖는 것이었습니다. 이에 따라 귀족들은 공무·종교 활동과 관련된 세금을 면제받았고, 매년 집회를 여는 것을 보장받았습니다. 칙령은 또 외국인들, 특히 유대인들을 공직에서 배제할 수 있도록 했으며 지주들이 재산권을 보장받으면서 왕실로부터의 몰수나 체포를 면할 수 있는 특권을 주었습니다. 왕권을 심히 제약하고 귀족들의 정치적 영향력을 극대화한 것이었습니다.

그로 인한 부정적인 파급효과는 벨라4세 Béla IV(1235-1270년 재위) 때 단적으로 드러났습니다. 국왕과 관료·지주계급 간 분열이 일어난 겁니다. 쇠약해진 헝가리는 1241년 몽골의 침공 앞에서 속수무책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황금 황소와 마그나카르타


똑똑한 지인이 "황금 황소와 마그나카르타 Magna Carta 가 만들어진 시기가 비슷하다"고 해서 위키피디아의 두 항목을 찾아봤습니다. 1222년 헝가리의 황금 황소(이름하여 Golden Bull of 1222)는 귀족/중산계급이 떠오르면서 생겨난 것이죠. 왜 헝가리에서 당시 귀족계급이 강력하게 부상했느냐... 앞서 언급한대로 정정불안으로 왕권이 약해져 있던 것, 당시 국왕이던 안드라스2세가 지나치게 신실하여... 혹은 너무 약하여 귀족들과 종교기구에 토지를 많이 불하했던 것 등등 여러 요인이 있었겠지요.


이런저런 이유로 헝가리 봉건제도에 변화가 생기면서 기존의 세습귀족 뿐 아니라 자산을 늘린 신흥귀족들도 당시 많이 나타났다고 합니다. 위키에서 눈에 띄는 구절은 "황금황소 1222가 마그나카르타와 자주 비교되곤 한다"는 것입니다. 마그나카르타의 영향을 직접적으로 받았을 수도 있습니다. 마그나카르타를 주도한 영국의 로버트 피츠월터 Robert Fitzwalter 같은 이들이 5차 십자군 전쟁에 참여하면서 황금 황소를 주도한 헝가리 귀족들과 접촉했다고 하니까요. 


마그나카르타 항목을 보니, 1215년 만들어졌는데 1219년에는 이미 프랑스어로도 번역됐다고 하니 유럽대륙에 금세 퍼진 모양이죠? 실제로 마그나카르타가 영국에서 헌법적인 기능을 하게 된 것은 한참 후의 일이라고는 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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