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맘대로 세계사/동유럽 상상 여행

22. 나라를 넓힌 폴란드와 '야기에워 체제'

딸기21 2013. 4. 17. 14: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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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14-15세기 폴란드의 팽창


오늘은 14~15세기 폴란드로 가봅니다. 이 시기에 폴란드는 정치적으로 그럭저럭 안정됐고, 문화적으로도 번영을 구가합니다. 하지만 북쪽에 걱정거리가 있었으니... 발트 해 연안에서부터 내려오는 튜턴 기사단과 점점 늘어나는 독일계 이주민 집단으로 인해 혼란이 조금씩 더해가고 있었습니다.


독일계 이주민이 세력화하면서 폴란드의 포메라니아(폴란드어로는 Pomorze- 여기를 참고하세요) 통치권을 위협했을 뿐 아니라, 폴란드 내륙에서 발트 해로 접근하기도 점점 어려워지게 됐습니다. 갈수록 강해지는 튜턴 기사단과 폴란드인들 사이에 14세기 내내 충돌이 심해졌지만 폴란드 정부는 이에 효과적으로 대처할 능력이 없었습니다.


이름이 예쁜 포메라니아... 이런 곳이로군요 ^^ 지도, 사진 모두 위키피디아에서 퍼왔습니다. 


피아스트 왕조는 점점 약화됐습니다. 카시미르 대제가 죽고 왕좌는 외국인인 앙주 공 루이(1370-82년 재위)에게 넘어갔습니다. 루이가 죽은 뒤에는 2년간 왕위계승을 둘러싼 내분이 일어났습니다. 갈등은 1384년 루이의 딸 야드비가 Jadviga 공주가 ‘처녀 왕’(1384-1399년 재위)으로 등극할 때까지 계속됐습니다. 야드위가는 여성입니다만, 'Queen of Poland'가 아니라 'King of Poland'라 불린답니다. 


폴란드 바르샤바 국립박물관에 소장돼 있는 야드위가의 초상화. 위키에서 퍼왔습니다.



발트 해안을 장악한 튜턴 기사단의 위협 때문에 야드비가는 1386년 리투아니아 왕자인 야기에워 Władysław II Jagiełło 대공과 정략결혼을 했습니다. 리투아니아도 당시 튜턴 기사단의 군사력에 위기감을 크게 느끼고 있었거든요. 리투아니아는 당시 러시아의 광범위한 영향력 하에 놓여 있었습니다. 리투아니아의 주된 관심은 키예프 루시(키예프 공국)의 뒤를 이은 모스크바 공국에 대항하는 것이었습니다.


리투아니아 피지배계층은 대개 정교를 믿는 슬라브족이었습니다. 당시 지배계층인 귀족들은 이교 신앙에서 정교로 개종한 이들이 대부분이었는데, 주민들이 슬라브 정체성을 드러내지 못하도록 억눌렀습니다. 리투아니아가 폴란드와의 관계에서 일차적 목표로 삼은 것은 튜턴 기사단을 막아내고 발트 해로의 접근권을 지키는 것이었습니다.


야기에워는 가톨릭으로 개종하고 폴란드의 왕(1386-1434년 재위)이 됐습니다(그래서 야드비가의 재위 기간은 어떤 기록에는 1386년까지로 나오고, 어떤 기록에는 사망 시점인 1399년으로 나옵니다. 남편에게 왕위를 주고 물러났다고 보기도 하고, 공동 통치를 했다고 보기도 하는 거죠). 이렇게 해서 폴란드와 리투아니아는 야기에워 아래에 통합됐습니다. 1410년 통일된 폴란드-리투아니아는 그뢴발트 전투에서 튜턴 기사단에 대승을 거두고 발트 해의 지배자로 떠올랐습니다. 그뢴발트 전투 이후 독일 쪽의 위협은 크게 줄어들었으나 폴란드의 속령이 된 뒤에도 프로이센은 여전히 자치 공국으로 남았습니다.



★그뢴발트 전투


폴란드 크라쿠프의 바벨 성당에 안치돼 있는 야기에워의 관 덮개 조각. /위키피디아


1385년 26세의 나이로 리투아니아 왕이 된 야기에워 공은 튜턴 기사단에 맞서기 위해 폴란드 피아스트 왕조의 후계자인 야드비가 공주와 혼인, 동맹을 맺었습니다. 기사단은 이교도인 야기에워가 폴란드 왕관을 노리고 거짓 개종했다며 1409년 대군을 거느리고 폴란드-리투아니아를 공격했습니다.


1410년 그뢴발트에서 야기에워가 이끄는 폴란드-리투아니아군과 울리히가 이끄는 기사단 간 전투가 벌어졌습니다. 리투아니아 기병대가 먼저 도망치자 기사단은 이들을 추격하느라 전열이 흐트러졌습니다. 그러자 폴란드군이 기사단을 막아서며 뛰어들었고, 퇴각하던 리투아니아군도 회군해 기사단을 대파했습니다. <삼국지>를 방불케하는 기만전술이로군요 ㅎㅎ


카시미르 대제가 죽고 폴란드와 리투아니아가 통일되기까지의 기간에 일어난 사건들은 훗날의 폴란드의 미래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이 기간을 통틀어 왕실의 권력과 권위는 귀족들에 흔들렸습니다. 즉 강력한 중앙집권국가(어쩌면 동유럽의 패권국가가 되었을지도 모를;;)로 가기 힘들어진 겁니다. 


남성 승계자가 없었던 카시미르는 조카이자 헝가리 왕이던 앙주 공 루이와 협정을 맺은 바 있습니다. 루이가 폴란드 왕위를 잇는 대신 귀족들의 특권을 보장해주도록 한 것이죠. 카시미르의 이런 조치로 폴란드에서는 귀족들의 국왕 선출권이 제도화됐습니다. 귀족들은 피아스트의 남성 승계자들이 모자란 상황을 이용해 루이로부터 더 많은 특권을 얻어냈습니다.


루이 역시 아들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야드비가가 여왕이 된 것이고요. 루이가 숨지자 야드비가와 야기에워는 왕좌를 보장받기 위해 또다시 왕실의 특권 일부를 귀족계급에 내주었고 귀족들은 점점 강성해졌습니다. 15세기가 되자 폴란드 왕실의 권한은 크게 줄어든 반면, 귀족들의 특권은 몹시 강해졌습니다. 귀족들은 지배자를 선출할 권한을 갖고 있었고 정치적 단합을 통해 지위를 유지할 수 있도록 보장받았으며 수없이 많은 세금을 면제받았습니다. 그들은 국왕의 군 통수권까지 빼앗아, 폴란드 군대를 장악했습니다.


하지만 야기에워는 리투아니아 대공으로서는 다른 위상을 갖고 있었습니다. 리투아니아에서는 왕위가 세습됐고 귀족들은 아무리 강력하다 하더라도 중앙 정부의 권위에 복속돼 있었습니다. 야기에워는 강력한 지배자로서 튜턴 기사단에 대항한 영웅으로 알려져 있었기 때문에 왕권을 거부하려 하던 폴란드 귀족계급도 야기에워 만큼은 발트 해와 우크라이나 서부에까지 이어진 폴란드의 영토를 다스릴 지배자로 인정했습니다. 통일될 당시 리투아니아는 폴란드보다 영토가 세 배나 넓었으며 우크라이나 접경의 초원지대도 모두 리투아니아 땅이었습니다.


야기에워는 폴란드 귀족들에게 북쪽으로는 발트 해, 남쪽으로는 흑해까지 이어진 드넓은 통일 국가를 지배하는 데에 참여할 기회를 열어주었습니다. 귀족들은 야기에워 치하의 폴란드가 강성해진 것이 자기들의 공로에 대한 보답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왕실은 통일됐지만 1565년 루블린 합병 조약(이렇게 형성된 폴란드-리투아니아 연합을 '루블린 연합 Lublin Union'이라 부른답니다)이 체결될 때까지 폴란드와 리투아니아는 여전히 자치 국가들로 남아 있었습니다. 15세기 내내 두 나라는 경계선을 놓고 싸웠습니다. 대개는 폴란드가 리투아니아를 누르고 영토를 늘리는 식이었습니다.



15세기가 되자 야기에워의 폴란드-리투아니아는 지역 패권국가로 당시 부상하고 있던 서유럽의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왕가와 경쟁하는 위치로까지 떠올랐습니다. 폴란드-리투아니아는 사실 의식적으로 국제적 위상을 강화하면서, 지역패권을 노린 최초의 유럽 국가이기도 했습니다. 1440년 야기에워의 아들이자 계승자인 브와디스와프6세(1434-44년 재위)는 라즐로1세와 싸워 헝가리 왕위까지 차지했습니다. 하지만 그가 죽고 바르나에서 오스만 투르크 제국과 싸우다 진 뒤 야기에워 왕가는 1490년까지 헝가리 왕좌를 상실했습니다.


카시미르4세(1447-1492년 재위)의 아들은 브와디스와프6세의 후계자로서 1471년 보헤미아 왕위에 올라 블라디슬라프2세(1471-1516년 재위)로 등극했습니다. 훗날 헝가리의 왕위(1490-1516년 재위)까지 챙겼습니다.


그의 아들 루이2세(1516-1526년 재위)는 아버지가 숨진 뒤 두 나라 왕위를 모두 물려받았습니다. 야기에워 왕가가 보헤미아와 헝가리의 왕위를 확보한 것은 중·동부 유럽에서 합스부르크 왕가의 팽창을 저지하기 위한 의식적인 노력 덕분이었습니다. 현대의 역사가들은 이를 ‘야기에워 체제’라 불렀습니다. 


왕실의 덩치를 불려 권력을 공고히 한 야기에워 왕가의 ‘체제’는 1500년경에 정점에 이르렀습니다. 이때가 되자 야기에워 가문의 군주는 유럽 곳곳에서 온 대표단을 정기적으로 바르샤바에 불러 알현케 하는 위치가 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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