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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니더푸, 도널드덕, 헬로키티, 고질라... 우리와 함께 나이 들어 가는 전설의 캐릭터들

딸기21 2014. 12. 19. 2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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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혹(不惑). 어느 것에도 미혹되지 않는 나이. 자기 얼굴에 책임을 져야할 나이라고도 한다. 하지만 불혹이 되어도 머리에 달린 빨간 리본은 그대로고, 앙증맞은 눈과 코 또한 변함이 없다. 일본 산리오사의 하얀 고양이 ‘헬로 키티’ 얘기다. 지난달 1일 키티 탄생 40년을 맞아 일본에서는 대대적인 축하 이벤트가 벌어졌다. 하지만 캐릭터의 세계에서 키티는 젊은 축에 속한다. 영국에서 태어난 ‘위니더푸’는 올해 아흔 살, 디즈니 애니메이션의 성마른 아저씨 ‘도널드덕’은 여든 살이 됐다. 세계 사람들과 함께 나이들어가는 전설의 캐릭터들과 숨겨진 이야기들을 알아본다.


아기곰 ‘위니’는 실제로 있었다


살아 움직이는 곰인형이 처음 모습을 드러낸 것은 그림책이나 만화영화가 아닌 시집에서였다. 영국 작가 겸 문학편집자 앨런 밀린이 1924년 발표한 <우리가 아주 어렸을 때>라는 동시집에 이 곰이 등장했고, 밀린이 편집장으로 일했던 아동잡지 ‘펀치’의 삽화가 어니스트 셰퍼드가 그림을 그렸다. 



당시에는 곰 캐릭터의 이름이 없었지만 1925년 런던 이브닝뉴스에 기고한 동화에서는 ‘위니더푸’라는 이름으로 등장한다. 위니더푸는 밀린의 네살배기 아들 크리스토퍼 로빈이 갖고 있던 봉제인형의 이름이었다. 푸의 모델이 된 이 인형은 현재 미국 뉴욕 공립도서관에 전시돼 있다. 케임브리지대학에서 수학을 전공했지만 문학의 길을 걸었던 밀린은 아들의 인형을 모델로, 착하고 둔하지만 매력적인 캐릭터를 탄생시켰다. 


얘가 바로 '위니' /WIKIPEDIA


밀린의 아들은 캐나다에서 사냥꾼에게 붙잡혔다가 팔려서 런던 동물원에 와 있던 새끼곰 위니에게서 곰인형의 이름을 따왔다. 불쌍한 새끼곰은 우리에 갇힌 신세였으나 밀린의 동화 속 위니더푸는 영국 서섹스의 애쉬다운 숲에 산다. 푸는 순진하고, 느리고, 생각이 깊고, 친절하다. 시 쓰는 걸 좋아하고, 식탐도 많다. 그래서 푸는 종종 꿀단지에 손을 넣거나 벌집의 냄새를 맡는 모습으로 그려진다. 숲속 친구들은 그를 가리키며 “뇌가 없다”고 수군거린다. 하지만 푸는 극히 상식적이고도 현명한 아이디어로 그런 친구들을 돕곤 한다.


1000달러에 팔린 푸


푸는 탄생한 지 몇 년 안 돼 여러 신문과 잡지, 단행본을 통해 인기를 얻었다. 푸가 대서양을 건넌 것은 1930년이었다. 미국 방송·영화프로듀서 스티븐 슬레진저가 위니더푸의 미국·캐나다 내 판권을 사들였다. 좋게 말하면 ‘현대 라이센스 사업모델의 선구적인 예’였지만 밀린에게는 몹시 불리한 계약이었다. 슬레진저는 향후 생길 수익의 66%를 자신이 갖기로 하고, 밀린에게 선금으로 1000달러를 줬다. 


곰돌이 주인공에게 '위니더푸'라는 이름이 붙여진 것은 1925년 런던 이브닝뉴스에 실린 동화에서였다고. /WIKIPEDIA


어쨌든 푸를 세계적인 스타로 만든 것은 슬레진저였고, 푸에게 빨간 티셔츠를 입혀준 것도 그였다. 그는 푸 인형과 음반, 퍼즐과 보드게임을 만들었고 라디오쇼와 애니메이션도 제작했다. 판권계약 이듬해인 1931년에만 푸는 슬레진저에게 5000만달러를 벌어들여줬다고 그 해 11월 포천 잡지는 쓰고 있다.


1953년 슬레진저가 죽은 뒤 푸와 관련된 비즈니스를 맡았던 아내 셜리 슬레진저는 1961년 월트디즈니 프로덕션에 판권을 넘겼다. 그 뒤 푸를 비롯해 숲속 친구들인 호랑이 티거와 돼지 피글렛 등을 주인공으로 한 애니메이션들이 줄줄이 탄생했다. 푸의 인기는 세월이 흘러도 식지 않았다. 폴란드 바르샤바에는 푸의 이름을 딴 푸차트카 거리가 있을 정도다.




지난해와 올해, 인터넷사용자들 사이에서는 푸의 패러디 사진들이 화제가 됐다. 지난해 6월 미국을 방문한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과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나란히 산보하는 모습이 마치 푸와 티거를 연상케한다며 만화 속 한 장면과 두 정상의 사진을 이어붙인 이미지가 소셜미디어로 유통됐다. 하지만 당초 파일이 올라온 중국 웨이보측은 곧바로 삭제해버렸고, ‘중국 외압설’까지 나왔다. 


지난달 시 주석이 아시아·태평양 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 참석차 베이징을 방문한 아베 신조(安倍晋三) 일본 총리와 첫 정상회담을 한 뒤에는 시 주석을 푸에, 아베 총리를 ‘이요르’에 비유한 그림이 온라인에 퍼졌다. 이요르는 푸의 친구 중 하나로, 눈이 처진 당나귀다. 


미군의 상징이 된 오리


도널드덕은 1934년 디즈니 애니메이션 <현명한 작은 암탉>을 통해 탄생했다. 이 캐릭터를 만든 뒤 디즈니 측은 성우 공개오디션을 했는데, ‘오리 흉내를 가장 잘 낸다’는 이유로 클래런스 내시라는 사람이 뽑혔다. 내시는 도널드의 세 조카 휴이, 듀이, 루이는 물론이고 여자친구 데이지의 아역까지 맡아 여러 필름에서 1인 5역의 목소리 연기를 선보였다. 내시는 할리웃 명예의 전당에도 자기 손도장 대신 오리 발자국을 찍고, 도널드덕이라는 사인을 했을 정도로 이 캐릭터를 사랑했다.



도널드는 인생을 낙천적으로 바라보지만, 화를 잘 내는 성격 때문에 종종 낭패를 보곤 한다. 강한 성격 때문에 정치선전 영화에도 많이 등장했다. 특히 2차 세계대전 기간에 만들어진 작품 중에는 도널드를 주인공으로 독일을 비꼰 것들이 적지 않다. 1943년 1월 발표된 <친애하는 총통의 얼굴>이라는 작품이 대표적이다. 이 영화 속 도널드는 나치를 비꼰 ‘너치랜드’의 군수공장 노동자인데, 노동시간은 길고 급식은 손톱만큼이다. 노동자들은 공장 벽에 걸린 퓌러(총통)의 사진을 보면 경례를 해야 한다. 


적을 향해 사납게 달려드는 도널드의 특성 탓에, 미군의 여러 부대가 도널드를 마스코트로 삼기도 했다. 미국 선전프로그램에 자주 동원됐던 탓에 독일 점령지역에서는 도널드 영화가 금지됐다. 그래서 시장을 넓히기 위해 디즈니 측은 남미로 방향을 돌렸고, <살루도스 아미고스(안녕 친구들)><세 명의 카바예로(신사)> 같은 남미 배경의 영화들이 만들어졌다.


도널드에게 투표하라


도널드는 디즈니 만화의 여러 주인공 가운데 가장 많은 논란을 불러일으킨 캐릭터 중 하나이기도 하다. 칠레의 작가·비평가이자 반체제 지식인이었던 아리엘 도르프만은 1971년 펴낸 <도널드 덕, 어떻게 읽을 것인가>라는 책에서 도널드덕 만화책들을 샅샅이 들여다보고, 디즈니로 상징되는 미국의 제국주의와 문화상업주의를 비판한다. 


도르프만에 따르면 도널드 만화책은 “부자와 무일푼인 사람, 고결한 오리들과 추레한 도둑들 사이의 사회적 차이로 가득차 있다”. 도르프만은 도널드를 주인공으로 한 작품들에서 원주민은 통상 범죄자나 열등한 인간으로 그려진다며, 오리의 입을 통해 나오는 디즈니의 메시지들이 2차 대전 후 미국의 강대국 패권주의나 매카시적인 대결 이데올로기와 일치한다고 비판한다. 도르프만의 책은 발간되고 2년 뒤 칠레에서 피노체트의 군부 쿠데타가 일어나면서 판매금지와 탄압의 대상이 됐지만, ‘디즈니를 독해하는 법’을 갈구하는 세계의 좌파 지식인들에게 퍼져나갔다.



1978년 핀란드에서는 도널드가 너무 부르주아적이라는 풍자글이 도서관저널에 실리면서 논란이 불거졌다. 한쪽에선 도널드가 데이지와 동거하면서 일도 하지 않고 빈둥거린다고 비판했고, 한쪽에선 “도널드는 노예처럼 일해 돈 버는 진정한 프롤레타리아”라는 옹호론이 나왔다. 


반대로 도널드가 기성 정치권에 대한 반발의 상징이 될 때도 있다. 핀란드 유권자들은 원하는 후보가 없을 때 투표용지에 도널드덕의 이름을 적곤 한다. 스웨덴에서는 아예 일부 유권자들이 투표용지의 빈칸에 ‘도널드덕당’이라는 가짜 정당이름을 써놓고 투표를 하곤 했다. 반면 미국에서는 대통령이나 의원 선거에 출마한 후보자들 모두에 반대하고 싶을 때 흔히 미키마우스의 이름을 적는다.


/WIKIPEDIA


빌딩이 높아지면 같이 자라는 고질라


일본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투하된 핵폭탄으로 방사능에 피폭된 이들 중에는 피부에 켈로이드 흉터가 있는 사람들이 많다. 상처가 아무는 과정에서 콜라겐 섬유조직이 불거져나와 피부가 붉게 부풀어오르는 흉터를 가리킨다. 고질라의 피부도 그렇다. 1954년 혼다 이시로(本多猪四郞) 감독이 만든 영화 <고질라>를 통해 세상에 나온 공룡괴물 고질라는 핵전쟁의 산물로 그려진다. 뒤에 가서는 정치적 메시지를 없앤 대중적인 캐릭터로 많이 변했지만 초창기의 고질라는 반전·반핵 메시지를 담고 있는 존재였다. 고질라라는 이름은 잘 알려진 대로 ‘고리라(고릴라의 일본식 발음)’와 ‘쿠지라(고래)’라는 단어가 합쳐져서 탄생했다.


첫 작품에서 고질라의 키는 50m였다. 당시 도쿄에서 가장 높은 건물들이 그 정도 높이였던 탓이다. 하지만 도쿄의 마천루는 점점 높아만 갔고, 고질라의 키도 100m 이상으로 커졌다. 1991년 영화 <고질라 대 킹 기도라>에서 고질라는 신주쿠의 도쿄도청을 부수는데, 이 건물은 높이가 242m에 이른다. 이런 초고층빌딩들 옆에서 왜소하게 보이지 않게 하려면 고질라의 크기도 점점 크게 설정하는 수밖에 없었다.


2014년 미국에 온 고질라 /WIKIPEDIA


혼다 감독과 함께 일했던 미술감독 와타나베 아키라는 2003년 발행된 윌리엄 쓰쓰이의 <내 마음 속의 고질라>라는 책에서 티라노사우루스와 이구아노돈의 모습을 합성해 이 거대 괴물을 형상화했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뒤에 고질라라는 공룡이 정말로 생겼다. 일본계 미국 고생물학자 케네스 카펜터는 1997년 뉴멕시코주에서 발견된 신종 공룡 화석에 ‘고지라사우루스’라는 이름을 붙였다. 표기도 영어식 ‘고질라(Godzilla)’ 대신 일본식 ‘고지라(Gojira)’를 택했다. 고지라사우루스의 키는 최대 5.5m로 추정된다.


7조7000억원짜리 고양이


불혹을 맞은 고양이 헬로키티는 산리오사의 초대 디자이너 시미즈 유코(淸水侑子)에 의해 탄생했다. ‘배경’은 당시 일본에서 유행하던 영국풍을 따랐다. 처음엔 아무 이름이 없었던 고양이는 런던 교외에 사는 ‘화이트’라는 성(姓)의 대가족 출신이다. 쌍둥이 언니 ‘미미’가 부끄럼 많이 타고 여성적인 것과 달리 키티는 밝고 명랑한 것으로 설정됐다. 



회사 측 설명에 따르면 키티의 생일은 11월 1일이고 키는 사과 5개만하며 몸무게는 사과 3개 정도다. 키티라는 이름은 루이스 캐롤의 <거울나라의 앨리스>에서 앨리스가 고양이를 ‘키티’라고 부르는 것에서 따왔다.


키티는 영화나 만화, 소설의 주인공이 아닌 상품용 캐릭터로 탄생했다. 처음 키티가 등장한 제품은 작은 비닐 지갑이었다. 리본 달린 고양이의 인기는 선풍적이었고, 4년 만에 산리오의 매출액은 7배로 뛰어올랐다. 1987년에는 첫 애니메이션이 나왔으며 비디오게임이나 음반 같은 파생상품들이 줄을 이었다. 하지만 역시 키티의 본무대는 상품들이다. 키티는 일본의 이른바 ‘가와이이(귀여운) 문화’를 상징하는 존재가 됐고, 초반 산리오의 타겟 구매층인 10대 소녀들을 넘어 어른들도 좋아하는 키덜트 브랜드의 대표가 됐다. 


Hello Kitty greets children during an event to celebrate her 40th birthday at Sanrio Puroland theme park in Tokyo Saturday, Nov. 1, 2014. On Saturday, fans around the world celebrate the 40th anniversary of this global icon of "cute-cool." (AP Photo/Koji Sasahara)


시작은 미미한 비닐 지갑이었지만 고객층이 넓어지면서 대형 제품, 고가품으로 키티 캐릭터가 확장됐다. 2004년 마스타카드는 키티가 디자인된 신용카드를 출시했고, 뱅크오브아메리카도 2009년 키티를 내세운 금융상품을 내놨다. 대만 에바항공은 A330 여객기 겉면을 키티로 장식한 뒤 ‘헬로키티 제트’라 이름붙였다. 키티 캐릭터 상품은 세계 70여개국에서 5만 종 이상 팔려나간다. 산리오는 키티를 알리기 위해 홍보 한 번 하지 않았지만, 영국 BBC방송 등에 따르면 키티의 캐릭터 가치는 70억달러(약 7조7000억원)에 이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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