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기가 보는 세상/칼럼

[정동길에서] 바이러스는 인종주의자가 아니다

딸기21 2020. 6. 9. 2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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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에서 흑인 남성 조지 플로이드 사망을 계기로 항의 시위가 계속되고 있다. 폭력사태로 나아가면 어쩌나 했는데 플로이드의 추도식을 거치며 분위기는 한결 차분해졌고, 동시에 인종주의에 대한 고민들은 깊어지고 있는 것 같다. 몇 년에 한번씩 이렇게 미국에서 백인 경찰이 흑인을 살해하고 흑인들의 시위가 일어나곤 한다. 갈등이 몹시 격화됐던 2014년 ‘퍼거슨 사태’ 때나 지금이나 미국은 달라진 게 뭐가 있나 싶지만, 현지 언론들로 전해지는 소식만 보자면 이번에는 곧바로 구조적·제도적 인종주의 이야기가 나오고 경찰 개혁이 논의되는 모양이다. 
 

인종주의에 항의하는 시위는 다른 나라들로도 퍼졌다. 미국 흑인들에게 연대를 표명하는 사람들을 보면 그들이 짊어져야 했을 그들만의 고통을 상상하게 된다. 시크시카잇시타피. 영어로는 블랙피트(검은 발) 부족이다. 원주민 보호지역에 사는 블랙피트 부족민은 미국에서 인종 문제가 불거지고 ‘흑백’ 갈등에 시선이 쏠릴 때에 그 땅에 대대로 살아온 원주민들은 끼지도 못한다면서 한 매체에 “누구도 원치 않았던 잊혀진 의붓자식 같은 느낌”이 든다고 했다. 

 

 

호주 퀸즐랜드에서도 원주민 문제와 플로이드 사건이 겹치면서 최근 3만명이 모였다. 경찰이 코로나19를 이유로 집회를 막았지만 모여든 이들은 이례적으로 원주민 깃발을 들어올리며 경찰서 앞에서 시위를 했다. 호주 인구에서 원주민 비율이 2%인데 교도소 수감자 중에서는 27%를 차지한다고 한다. 미국 흑인들에게 공감하는 게 이해된다. 예루살렘에서는 이스라엘군이 팔레스타인 민간인들을 사살하는 것에 항의하는 시위가 벌어졌다. 
 

영국 스코틀랜드 신문 선데이내셔널은 며칠 전 1면을 “인종주의는 팬데믹이다”라는 글귀로 채웠다. 에딘버러의 플로이드 사망 항의시위에 나온 흑인 여성이 들고 있는 팻말에도 같은 문장이 쓰여 있었다. 플로이드가 숨진 미네소타주 미니애폴리스에서 4일 열린 추모식 때에도 추도사에 “인종주의라는 팬데믹”이라는 말이 나왔다. 배우 조지 클루니는 흑인 차별을 가리켜 “이것이 우리의 팬데믹이다. 모두를 감염시킨, 그리고 400년 동안 아직도 백신을 찾아내지 못한 팬데믹”이라고 했다.
 

인종주의를 전염병에 비유하는 게 낯설거나 어색하지는 않다. 어차피 올해는 팬데믹의 해이니까. 비유를 넘어, 팬데믹과 인종주의는 뒤섞여 있다. 뉴욕 시장은 인종차별의 구조를 비판하며 코로나19 사망자도 흑인이 더 많다는 걸 지적했다. 실제로 이를 보여주는 통계 조사들도 나와 있다. 지난달 미국의 한 연구에서는 흑인들의 치명률이 백인 감염자의 2.4배인 걸로 나타났다. 뉴멕시코주 나바호 원주민들 대상으로도 조사해보니 ‘매우 제한된 통계이지만’ 치명률이 백인 감염자의 8배였다고 한다. 
 

바이러스는 인종주의자인 걸까? 그럴 리가. 보건의 불평등 속에 숨겨진 차별 구조가 전염병 시대에 어떻게 작동하는지 알기는 어렵지 않다. 그럼에도 바이러스는 인종주의의 빌미가 됐다. 이 바이러스가 퍼졌을 때 한국에서 나타난 반중국 선동과 혐오감정. 중국에서 나타난 아프리카계에 대한 인종주의적 공격. 유럽에서 나타난 아시아계에 대한 인종주의적 반응. 특정 집단을 낙인찍는 식으로 질병을 규정한 나라들이 방역에 실패한 것을 보면 최소한 코로나바이러스는 인종주의에 반대하고 있는 게 분명하다.
 

몇몇 단체에서 플로이드 살해를 비판하는 성명을 냈고 집회를 하기도 했지만 세계적인 항의의 물결 속에서 한국은 대체로 조용하다. 미국 인종주의를 지적한 글에 “흑인은 아프리카로 돌아가라”고 적은 악플들을 봤다. 흑인을 조롱하는 한국인들은 적지 않다. 노예무역의 역사에 대한 무지를 논하기조차 아깝다. K방역은 세계의 모범인데, 인종주의와의 싸움은? 시비쿠스라는 국제 비영리기구 웹사이트에 이달초 한국의 인종주의를 지적한 글이 올라왔다. 코로나19를 계기로 치솟았던 반중 감정, 성소수자 감염 사례를 보도하고 혐오를 부추긴 언론 보도, 지나친 개인정보 추적 같은 걸 언급했다.
 

이것이 진짜 인종주의인가 하는 의문도 든다. 한국의 차별은 인종보다 국적을 향한다. 국적은 그 나라의 부의 수준으로 평가된다. 그렇다면 그저 강약약강일 뿐인 것 아닐까. ‘다수자 혐오’는 없다. 타깃은 언제나 약자다. 태평양 건너편에 앉아 미국 경찰을 비판하기는 쉽지만, 우리 안의 혐오를 선동하는 사람들에게 백신을 주입하는 건 참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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