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의 오늘 68

도쿄 대공습과 커티스 르메이

1945년 3월 10일 새벽, 미군 B29 폭격기 340여대가 2400톤이 넘는 소이탄을 일본 도쿄에 떨어뜨렸습니다. 몇개월 뒤 히로시마·나가사키 핵폭탄 투하로 이어지는 미국의 일본 패퇴작전의 서막인 ‘도쿄대공습’이었습니다. 일본은 이미 그 몇년 전부터 태평양전쟁을 벌여 아시아 거의 대부분 지역을 전쟁터로 만들었지만 정작 일본 ‘본토’의 국민들은 전쟁 분위기를 실감하지 못하고 있었다 합니다. 일본이 태평양 주요 전선에서 연일 승승장구하고 있다는 군국주의 정부의 선전이 사실이 아님을, 미국이라는 사상 유례없는 강력한 적을 상대하고 있음을 국민들에게 각인시킨 것이 바로 이 도쿄대공습이었습니다. 이미 도쿄는 1923년의 간토 대지진으로 한차례 초토화된 뒤였습니다. 20여년 동안 도쿄를 재건하면서 일본 당국은 ..

니체의 죽음

그는 19세기를 살았지만 20세기를 예언한 인물이었다. 독일 철학자이자 시인, 저술가, 미학자였던 프리드리히 니체. 그는 해체와 부정과 허무의 철학으로 합리주의와 계몽주의, 서양의 근대성 전체에 도전했다.니체는 1844년 독일 작센 주의 뢰켄에서 태어났다. 개신교 목사였던 아버지는 5세 때 숨졌고, 어머니·누이와 함께 조부모 집에서 자랐다 한다. 본 대학에서 신학과 철학을 배웠고, 뒤에는 문헌학을 공부했다. 라이프치히로 옮겨간 뒤에는 그리스 고전문헌을 연구하는 한편 쇼펜하워를 읽고 바그너 음악에 심취했다 한다. 1869년 스위스 바젤대학의 교수가 되어 고전문헌 강의를 시작했으나 이듬해에는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에 나가야했다. 하지만 입대한지 얼마 되지 않아 두통과 질병에 시달리다 바젤로 돌아왔다. 1872..

헬륨

원소기호 He, 원자번호 2. 헬륨(Helium)은 화학 원소중에서도 아주 특별한 원소다. 지금까지 알려진 것 중 끓는점이 가장 낮으며, 절대온도(-273.17도)에서도 얼지 않고 액체로 존재할 수 있는 유일한 원소다. 공기보다 가벼운데다 다른 원소들과 반응하지 않는 비활성 기체여서 폭발 위험이 없기 때문에 비행선·애드벌룬에 많이 쓰인다. 잠수부용 산소통에 질소 대체제로 넣기도 한다. 산소통에는 산소만 있는 게 아니라 대기 성분과 비슷하게 질소 대 산소를 8대2의 비율로 넣는데, 질소 대신 헬륨을 넣으면 혈액 내 용해도가 낮아 잠수병을 예방하는 데에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끓는점이 낮다는 걸 이용해 초저온 냉각제로 쓰기도 한다. 헬륨풍선의 가스를 들이마시면 목소리가 변한다. 헬륨가스에서는 공기중에 비해 ..

우리별1호 날아오르다

남미 대륙 북쪽 끝부분, 대서양에 면한 곳에 기아나라는 곳이 있다. 수리남과 브라질 사이에 위치한 기아나는 프랑스의 ‘레지옹’, 즉 해외 영토다. 한국 과학사에 한 획을 그은 ‘이벤트’가 18년전 그 곳에서 일어났다. 1992년 8월 11일 한국 최초의 인공위성인 ‘우리별1호’가 프랑스령 기아나의 우주센터에서 발사됐다. 프랑스는 자국 내 인구밀도가 높고 로켓발사에 적합한 부지를 찾기 힘들어 기아나 등 해외 영토에 주로 우주기지를 두고 있다. 그곳에서 발사된 우리별 1호는 무게 48.5㎏에 크기는 길이 67㎝, 높이 35.2㎝, 너비 35.6㎝의 초소형 위성이었다. 영국 서리(Surrey) 대학의 위성본체를 바탕으로 만들어졌고, 아리안4호 로켓으로 발사됐다. 100% 우리 기술로 제작되었다고는 할 수 없지..

안네가 잡혀간 날

1944년 8월 4일,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시내 프리센가 263번지 앞에 나치 독일의 비밀경찰 게슈타포 요원들을 실은 차가 멈춰섰다. 곧이어 건물 안으로 들이닥친 게슈타포들은 건물 안 사무실 벽의 책장을 밀어내고 비밀 다락방에 숨어있던 유대인 가족 8명과 이들을 도와준 네덜란드인 2명을 붙잡아갔다. 잡혀간 유대인 가족은 암스테르담에서 향신료 판매 사업을 하던 오토 프랑크와 에디스 프랑크 부부, 그들의 두 딸인 마곳과 안네, 페터 페퍼와 프리츠 페퍼 형제 등이었다. 프랑크 가족은 나치가 네덜란드를 점령하고 유대인 체포령을 내리자 42년 프리센가의 사무실 건물 뒤 비밀 다락방으로 은신해 들어갔다. 프랑크 부부의 둘째딸 안네는 13살 생일에 선물받은 일기장에 42년 6월12일부터 44년 8월1일까지 일기를 썼..

숱한 비화를 낳은 탕산대지진

1976년 7월, 중국 허베이(河北)성 탕산(唐山) 주변의 한 우물에서는 하루에 세번씩 우물의 물이 갑자기 솟구쳤다 가라앉았다. 또 다른 우물에서는 그 달 들어서 가스가 세 차례 새어나와 주민들이 고개를 갸웃거리게 만들었다. 지진의 전조였다. 탕산은 물론이고 베이징, 톈진, 보하이, 장자커우 등지에서 이상 징후가 속속 탐지되고 있었다. 국가지진국에서 일하던 왕청민(汪成民)은 탕산 주변 지각작용을 분석해 “7월22일부터 8월5일 사이에 큰 지진이 날 수 있다”고 경고했다. 마자거우쾅(馬家溝曠) 지진대의 지진전문가 마시룽(馬希融)과 겅칭궈(耿慶國), 탕산시 지진사무실의 양유천(楊友宸) 등도 상부에 지진 가능성을 보고했다. 대지진이 일어나기 보름도 더 전에, 이미 이렇게 ‘경보’는 나와 있었다. 하지만 문화대..

아스완 하이댐

고대 이집트인들이 수십미터 높이의 기둥들로 이뤄진 룩소르와 카르나크의 신전을 세우고 ‘세계의 불가사의’로 불리는 거대한 피라미드들을 쌓을 수 있었던 것은 모두 나일강이 있었기 때문이다. 해마다 범람하는 나일강이 이집트인들에게 비옥한 충적토를 선사해 농경지를 만들어줬던 것, 흘러넘친 강변을 정비하고 관개를 하면서 사람들이 모이고 나라가 생기고 문명이 발전했다는 것은 잘 알려져있다. 하지만 나일강은 이집트인들의 생명줄인 동시에 늘 걱정거리였다. 현대에 이르러서까지도 나일강의 홍수는 사람들이 제어하기에는 힘든 상대였다. 이집트를 ‘위임통치’했던 영국은 1889년부터 강이 넘치는 것을 막기 위한 댐을 쌓기 시작했다. 그렇게 해서 1901년 만들어진 것이 아스완 댐이다. 지금은 후대의 아스완 하이댐(High Da..

이라크의 7.14 혁명

미국 조지 W 부시 행정부는 2003년 이라크를 침공하면서 장기집권 독재자 사담 후세인을 축출하고 ‘레짐 체인지(정권교체)’를 이뤄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이라크인들은 물론 국제사회가 일제히 ‘이라크 정치는 이라크인들의 손에 맡기라’고 했지만, 미국의 보수파 이데올로그들은 “오랜 독재에 시달려온 이라크인들에겐 스스로 후세인을 몰아낼 능력이 없다”고 주장했지요. 그러나 미국의 왜곡된 선전과 달리, 이라크 현대사에는 부패한 왕정을 몰아낸 혁명이 분명 있었습니다. 1958년의 ‘7·14 혁명’입니다. 당시 이라크는 현 요르단 왕실과 한 뿌리인 하솀 왕가가 다스리고 있었습니다. 하솀 왕가는 예언자 무함마드의 계보라 주장하고 있지요. 하지만 당시 이라크 왕실의 정통성에 대해서는 논란이 많았습니다. 이 왕정이 탄생..

미-소 이어준 소녀 서맨사 스미스

“안녕하세요, 미스터 안드로포프. 제 이름은 서맨사 스미스이고, 나이는 10살입니다. 새로운 일을 맡게 되신 걸 축하드려요. 저는 러시아와 미국이 핵전쟁을 할까봐 무서워요. 혹시 전쟁을 할 것인지를 놓고 투표를 하실 생각인가요? 그런 게 아니라면, 전쟁이 일어나지 않도록 어떤 일을 하실 생각인지 제게 얘기해 주세요. 꼭 대답하셔야 한다는 건 아니지만, 왜 이 세상을, 최소한 우리 나라를 정복하려고 하는 건지 알고 싶어요. 신은 우리가 싸우지 않고 평화롭게 살라고 이 세상을 만드셨거든요.” 1982년 11월 레오니트 브레즈네프가 숨지고 유리 안드로포프가 소련 공산당 서기장에 오른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한 미국인 소녀의 편지가 공산당 기관지인 프라우다에 실렸다. 물론 안드로포프의 답신은 없었다. 하지만..

나치제국의 내분, '긴칼의밤'

하인리히 히믈러는 나치 제국의 지도자 중 한 사람으로, 유대인 강제수용소와 대량학살의 주범으로 꼽히는 인물이다. SS라는 약칭으로 알려진 아돌프 히틀러의 친위대를 이끈 것이 히믈러다. 1900년 뮌헨 근교의 중산층 가정에서 태어난 히믈러는 23년 에른스트 룀이 이끄는 나치 돌격대(SA)에 가입했고, 히틀러·룀과 함께 뮌헨에서 ‘맥주홀 폭동’으로 알려진 폭동을 일으켰다. 2년 뒤에는 친위대에 가입했으며 친위대 안에서 고속승진을 거듭했다. 히믈러는 맥주홀 폭동 때 히틀러와 룀이 징역형을 선고받은 반면 자신은 그냥 풀려났던 것에 끝없는 회한을 표했을 정도로 맹목적인 히틀러 추종자였다. 히틀러도 히믈러를 점차 신임하게 됐고, 마침내 히믈러는 29년 친위대의 사령관으로 임명됐다. 룀의 돌격대가 대규모 무력부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