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화 36

조 사코, '팔레스타인'

팔레스타인 Palestine 조 사코 (지은이) | 함규진 (옮긴이) | 글논그림밭 | 2002-09-16 조 사코의 . 말 하려고 시작하면 할 말이 많겠지만 너무 귀찮아서, 읽고난 뒤에 얌전히 책꽂이에 꽂아놨다. 라고 해봤자 지금의 정신상태를 반영하듯 책꽂이 주변은 어수선하기 짝이 없지만. 책 자체에 대해서는 별다른 설명이 필요 없다. 미국인 프리랜서 저널리스트 청년이 팔레스타인 땅을 돌면서 보고 느낀 것들을 그린 만화책이다. 우선 그림에 대해 이야기하자면, 만화다운 코믹함과 극도의 리얼리티가 양립가능하다는 걸 보여주는, 대단히 잘 그린 그림들이다. 내용은? 군데군데 유머가 엿보이면서도 슬픔을 슬픔답게, 괴로움을 괴로움답게 잘 잡아냈다. 그러면서도 과장하지 않는다. "그냥 보란 말이야, 팔레스타인 사람..

딸기네 책방 2003.02.20

꽃보다 남자와 꽃미남 이야기

★ 나오는대로 주절거리는 꽃미남 이야기. 의 상품성은 정말 대단하다. 유치찬란을 넘어 유치절정휘황찬란으로까지 달려간 만화이지만, 재미와 흡입력은 어느 만화보다 낫다. 부잣집 도련님과 가난한 아가씨의 만남. '상투'의 꼭대기까지 쳐올라간 구도이지만 부자도 그냥 부자가 아니라 세계 몇째 갈만한 재벌, 아가씨도 그냥 가난한 아가씨가 아니라 지긋지긋 속물적인(동정의 여지가 없는) 부모 밑에서 죽도록 고생하는 가난한 아가씨, 왕따도 그냥 왕따가 아니라 승용차에 사람을 매달아놓고 운동장에 질질 끌고 다니는 무지막지한 폭력이고 보면 재미가 있을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 만화의 최대강점은 F4, 즉 '네 명의 남자'가 나온다는데 것. 여기서 중요한 것은, 한 명이 아닌 네!명!이라는 점에 있다. 일본 만화매거진 시스템..

마이 퍼니 베이비 - 엄마 되는 험한 길

마이 퍼니 베이비 김지윤/대원씨아이 "내가 아주 무서운 얘기 하나 해줄까? 내 선배 부인 얘긴데, 실화야. 쌍둥이를 낳고 두달만에 임신이 됐는데 또 쌍둥이였대. 무더운 여름인데 집에 에어컨이 없었던 거야. 두번째 쌍둥이가 태어나니까 남편의 눈길이 싸늘해지더래. 집안은 네 아이로 와글와글. 이 누나의 친정어머니는 돌아가셨고, 시어머니는 와병중. 그런데 하필 옆집이 공사중이라 여름에 창문도 못 열어놓고, 방 두개짜리 좁은 집에서..." 남편이랑, 아내랑 여름밤 에어컨 바람 시원하게 틀어놓고 마루에 드러누워 나누는 납량특집 엽기괴담의 내용입니다. 부모님 집에 얹혀 살면서 쌍둥이 남자아기들을 키우는 종민이와 수진이, 아직 학생티를 벗지 못한 '어린' 부부에게는 임신, 출산, 더위가 그야말로 납량특집이지요. 간담..

딸기네 책방 2002.05.25

디오자망트의 열정

장 클로드 갈 그림, 알렉산드로 조도로프스키 글. 육욕에 빠져 있던 한 여자가 구도의 길로 들어서 결국 진리를 깨닫게 되는 과정. 잔혹함과 육체의 열정에만 빠져 있던 아라스의 여왕 디오자망트. (아라스-이곳은 말 그대로 지옥이다. 약탈과 강간범이 득시글거리는) 디오자망트는 자신을 둘러싼 모든 것들, 뭔지 모를 답답함과 열기(탐욕)에 불현듯(요 부분이 좀 미흡하다...) 싫증을 느끼고 궁전을 나선다. 사라바왕국(아라스의 반대편-화려함, 근엄함, 우주의 질서?)의 위르발 왕을 죽이기 위해 찾아간 디오자망트는 그만 '적과의 사랑'에 빠져 버리는 것이니... 육체적 욕망이 아니라 처음으로 정신적 욕망(진리에의 갈구)에 빠져든 디오자망트는 위르발을 다시 만나 영적으로 결합하기 위해 기나긴 여행을 시작한다. 화려하..

딸기네 책방 2001.09.24

제롬 무슈로의 모험

프랑수아 부크, 이세욱 옮김, 교보문고 거기 서라, 벵갈 호랑이! 심심한 인간들이 괜히 귓바퀴에 담배 끼우고 다니던데, 벵골호랑이는 만년필을 코 밑에 끼우고 산지사방을 돌아다닌다. 코가 밑으로 늘어진 프랑스 아저씨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보험외판원인 제롬 아저씨는 남편을 아끼고 사랑하는 뚱뚱한 아내, 전혀 안 귀엽게 그려져 있지만 '귀여운' 것으로 설정돼 있는 아이들과 함께 시내의 작은 아파트에서 살고 있는 평범한 가장. 가족들을 위해 때로는 목숨을 건 모험에 뛰어들기도 하면서 정글같은 현대사회를 헤치고 나아가는 이 아저씨를 뚱뚱한 아줌마는 '벵갈호랑이'라 부른다. 남편을 하늘같이 아는 사랑스런 아줌마! 그래서, 자신만을 믿고 바라보는 순진무구한 가족들의 눈망울, 저 꿈과 사랑을 지켜주기 위해 오늘도 ..

딸기네 책방 2001.06.09

선계전 봉신연의

봉신연의 후지사키 류 (지은이) | 대원씨아이(만화) 후지사키 류의 '봉신연의'. 어제 22권까지 부리나케 읽었는데, 오후에 연합뉴스에 '봉신연의 23권 완간'이라는 기사가 떴더군요. 신나라~ 내가 원하는 게 바로 이런 거였습니다. "치고 박고 싸우고 갈수록 전력이 강화되는, 이 폭력의 미학"... 이라고 생각하는 건 결코 아니지만, 평소 저의 취향과는 정 반대인 이 만화를 제가 왜 그렇게 재미있어 하느냐. 전 이 세상에 없는 이상한 것들을 꼭 보고 싶은데, 이 만화에는 참으로 이상한 것들이 계속해서 나옵니다. 기묘한 얼굴의 도사와 선인들은 물론이고 동식물에 연원을 둔 여러 종류의 요괴 따위 말이죠. 글구 제가 은빛 여우를 타고 다니게 된 동기이기도 한, 희한한 영수(靈獸?)들! 주인공 태공망의 영수는,..

딸기네 책방 2001.04.03

마쓰모토 레이지, '니벨룽겐의 반지'

마쓰모토 레이지의 '니벨룽겐의 반지'(서울문화사) 1부와 2부를 읽었습니다. 마쓰모토 레이지 하면, 우리나라에서도 모르는 사람이 없을 겁니다. 우주전함 야마토, 하록선장, 그리고 은하철도 999. 국민학교 저학년 때 은하철도 999 만화책을 몇권 봤는데, 기분이 아주 이상하고 음침한 느낌이 들었다는 기억만 남아 있습니다. 재작년에 극장용 후속편을 비디오로 빌려다봤는데 영 꽝이더군요. 니벨룽겐의 반지는 아시다시피 독일의 전설이죠. 그리고 바그너(와그너?)의 오페라이기도 하구요. 마쓰모토는 바그너의 팬이라고 하는군요. 이 만화는 그 오페라를 모티브로 만든 것이라고 하는데, 물론 고리타분한 옛날 이야기는 아니고, SF물입니다. 첫 장면부터 저의 눈길과 마음을 사로잡은 것은 우주선입니다. 일본의 SF물은 메카닉..

딸기네 책방 2001.03.21

기억창고에서 끄집어낸 해적판 이야기

긴 이야기를 시작하기 전에, 최근 읽은 만화 한 편을 소개하면. '하늘은 붉은 강가'는 바로 '나같은 사람', 나이도 잊은 채 어렸을 때 만화방에서 죽때리던 기억에 사로잡혀 헛된 망상에서 아직도 헤어나지 못하는 사람을 위한 만화다. 여기서 잠시 딸기의 전사(前史)를 알아볼 필요가 있음. 국민학교 때부터 각종 만화방을 섭렵했었다. 그 때 가장 감명깊게 읽었던 만화 중의 하나가 바로 '나일강의 소녀' 시리즈였으니. 작가 이름은 당시 해적판에는 '유혜정'이라고 돼 있었음. 1부인 '나일강의 소녀'에 이어 '나일강의 여신', '나일강의 사랑', '나일강이여 영원히', 그리고 연속성이 상당히 떨어지는 '나일강의 수수께끼'와 같은 후속편들이 줄줄이 따라붙는 대작이었다. 이 만화를 보고 고고학자가 될 결심을 했다니,..

H2

나한테도 열일곱살이 있었을텐데, 대체 어디로 갔을까. 바다 건너온 만화책이 이렇게 마음을 흔들어놓다니. 내 마음은 지금 마구 흔들려서, 공중을 떠돌고 있다. 머릿속마저, 야구공처럼 어딘가를 한정없이 날아다니고 있다. 열일곱살. 그 나이를 떠올리면서 칙칙한 교실과 여고괴담 분위기의 유관순 초상화, 무거운 도시락통 같은 걸 떠올려야 된다는 건 비극이다. 그래서 난 좀 다른 걸 떠올려보기로 했다. 내가 열일곱살 때, 서울올림픽이 있었다. 그날, 친구와 올림픽공원에 갔었다. 9월17일, 날짜도 잊어버리지 않는다. 올림픽 개막식 날이었으니까. 올림픽 공원에 갔다는 것 외에는 딱히 내세울만한 추억거리가 그날 벌어졌던 것도 아닌데, 내 머리 속에는 열일곱살에 대한 그런 단편적인 기억들만 떠오른다. 조각조각 흩어진 기..

리드뱅

Lie-De-Vin (리드뱅) Berlion (글) | Corbeyran(그림) | 비앤비(B&B) 여러 만화제에서의 수상경력이 가장 먼저 눈에 띄임. 첨엔 무슨 엽기물처럼 보이다가, 그 다음에는 이웃집 미스테리 여인을 둘러싼 탐정소설로 보이지만 결국에 가서 보면 한 소년의 '성장'을 둘러싼 이야기. 아주 재미있음. 엄마 없는 소년. 성격이 판이한 '고모들'과 함께 사는 고아. 얼굴엔 포도주색의 반점이 있음. '룰루'라는 개를 키웠음. 왜 하필 주인공은 개 이야기를 이렇게 많이 하는 걸까? 룰루가 어떤 끔찍한 경위로 인해 죽었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대체 무슨 엽기적인 이야기가 나올까 의심해가며, 대체 이 만화의 장르는 무엇일까를 생각했음. 이 때까지 나의 결론- 이건 탐정물이다! 이웃집 여인의 살인극 ..

딸기네 책방 2001.02.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