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기가 보는 세상/잠보! 아프리카

처음 읽는 아프리카의 역사/ 노예제도

딸기21 2010. 3. 2. 2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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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예 제도는 옛날부터 있었다. 그러나 초기 아프리카 문명들에서 나타나는 대부분의 노예 제도는 뒷날 아랍 사람과 유럽 사람의 노예 사업과는 비교할 수가 없는 것이었다. 노예는 각 가족의 일부였고 다시 해방될 가능성이 열러 있었다.
세계는 이제야 비로소 아프리카에서 행해진 체계적인 인간 도둑질이 가져온 파괴적인 결과가 현대 아프리카 국가들의 형식적인 독립만으로는 해결되지 않는 끔찍한 일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있다. 유럽은 이런 부당함을 솔직하게 인정해야 하며, 그 당시와 오늘날까지 여전히 백인 아닌 사람이 겪는 불평등과 불리함을 정당화하는 데 동원된 이데올로기를 이해하는 것도 꼭 필요하다.
아프리카의 사람들은 그렇게 엄청난 규모의 노예 매매가 아랍과 아프리카의 상인들 그리고 자국민을 팔아 부자가 된 정치 지도자들의 협조 없이는 가능하지 않았다는 쓰라린 진실을 바라봐야만 한다. 이런 엄청난 파국에 결정적으로 도움을 준 아프리카의 권위적 구조에 대한 문제 제기도 반드시 이루어져야 할 과제이다. 이 두 가지는 결코 쉽지 않은 작업이다.

▶ 1415년에 포르투갈은 지브롤터 맞은편 모로코의 항구 도시 세우타를 정복함으로써 아프리카 대륙에 최초의 보루를 만들었다. 뒷날 ‘뱃사람 왕’이라는 별명을 얻은 포르투갈의 하인리히 왕 (1394~1460년)은 이곳에서부터 남쪽까지의 해안선을 탐색하였다. 
포르투갈 사람들은 그보다 뒷날 등장하는 프랑스와 네덜란드, 영국, 독일, 스칸디나비아 그리고 벨기에 사람들이 그렇듯이, 처음에는 아프리카 해안을 따라 요새와 무역 거점을 세웠다. 그리고 이곳에서 황금과 상아와 노예를 거래하는 사업을 시작하였다. 내륙 지방에서 인간 사냥이라는 ‘지저분한 일’을 하는 것은 아랍과 아프리카 거간꾼이 떠맡았다.
포르투갈 사람들은 뒷날 식민주의 범죄 행위를 정당화하기 위해 주장한 것처럼 ‘절반쯤 벌거벗은 토인’을 만난 것이 아니었다. 서부 아프리카의 많은 나라들에서는 매우 발전된 형태의 농업이 이뤄지고 있어서 충분한 식량을 얻었고, 이따금 식량이 남아돌기도 했다. 
1483년에 포르투갈 사람들은 콩고 강 유역에 살던 바콩고 민족과 처음으로 접촉하였다. 언뜻 보기에 양측에 모두 좋은 것처럼 보이는 무역이 한동안 활발히 이루어졌다. 콩고왕은 1491년에 세례를 받고 이름까지 ‘알폰소 1세’로 바꾸고서는 신하들에게도 죽음의 형벌을 금지하였다. 한동안은 포르투갈-콩고 협력이 평화로운 공존의 예처럼 보였다. 알폰소 1세는 새로 얻은 무기들을 이용하여 권력을 강화했을 뿐만 아니라 이웃의 다른 민족들에게서 노예사냥도 하였다. 이 노예들은 포르투갈 사람들이 시작한 사탕수수 농장에서 강제 노역을 하거나 국제 무역을 통해 해외, 특히 브라질로 팔려갔다.
포르투갈 사람들이 점점 더 많은 노예들을 요구하면서 콩고 왕도 그 요구를 다 충족시킬 수 없게 되었다. 포르투갈 사람들은 아프리카의 다른 노예 사냥꾼들과 협조하면서 이들에게 알폰소 1세의 신하들도 노예로 잡으라고 부추겼다
알폰소 1세의 권력은 자신의 부하들에 의해 점점 무너졌다. 왕국은 분파들로 갈라져 포르투갈 사람들 과 결합하거나 저항하였다. 1543년 알폰소 1세가 죽자 바콩고 왕국은 완전히 의미를 잃었다.
요웨리 무세베니 우간다 대통령은 이렇게 말했다. “아프리카 지도자들을 빼놓고는 식민주의를 논할 수 없다. 식민주의는 활짝 열린 집 안으로 들어왔다. 마치 강도들이 집 안으로 들어가려고 하는데. 누군가가 안에서 문을 열어준 것과 같다.”

1550년 무렵 포르투갈 인구의 10% 정도가 아프리카 사람이었다. 이들 모두가 하인이나 고용된 사람만은 아니었다. 유럽 사람들이 남북 아메리카의 거대한 농장에서 목화와 담배, 사탕수수를 재배하면서 얻는 엄청난 이윤을 더욱 높이기 위해 점점 더 노동자를 필요로 하면서 사정이 바뀌었다. 극히 짧은 시간 만에 유럽과 아프리카와 아랍 상인들로 구성된 마피아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인간을 멸시하는 태도를 취하며 완전히 새로운 노예 개념을 도입하였다. 이제 노예는 지위가 낮은 ‘인간’이 아니라 이윤을 얻기 위한 ‘상품’으로 취급되었다.
오늘날 서부 아프리카 해안을 방문하는 사람은, 당시 유럽 사람들이 아프리카 사람으로부터 자신을 방어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이 사업을 놓고 자기들끼리 벌이는 싸움에서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대포로 무장한 요새들과 궁성들을 지어놓은 것을 볼 수 있다.
노예 제도의 종말은 아프리카에서 쟁취된 것이 아니라, 영국과 미국의 노예제도 폐지론자와 도망친 노예를 종교적인 입장에서 도와준 퀘이커 교도, 그리고 해외에서 궐기한 노예들에 의해 쟁취되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자본주의와 ‘산업 혁명’을 통해 먼저 유럽에서, 그리고 나중에는 전 세계적으로 노예제도가 의미를 잃었다. 노예 매매 사업이 그다지 큰 이익을 남기지 않게 된 것이다.


▶ 아메리카의 노예 반대자들은 1816년에 모임을 만들고 해방된 노예를 아프리카로 돌려보내는 것이 가장 낫다는 결론을 내렸다. 1821년에 한 백인 선교사가 최초의 해방 노예 무리를 데리고 서부 아프리카의 시에라리온 남쪽 해안에 도착하였다. 영국 사람들이 비슷한 의도로 자유 도시를 시작한 적이 있는 곳이었다.
이곳 해안에는 배 만드는 사람 겸 어부로 생활하는 크루(Kru) 민족이 살고 있었는데, 이들은 땅을 팔 생각이 조금도 없었다. 해방 노예들은 협상을 하지 않고 자기들이 평생 고통스럽게 경험했던 방법, 곧 폭력을 사용하였다. 총과 대포와 그 밖에 아메리카에서 가져온 다른 수단을 동원해서 원주민을 쫓아내고 바닷가에 세운 첫 도시에 미국 대통령 이름을 따서 먼로비아라는 이름을 붙였다.
더 많은 사람들을 쫓아내서 더욱 커진 이 해안지역은 1822년 ‘라이베리아’라는 이름을 갖게 됐고, 미국 총독이 지배하였다. 그새 1만 8,000명 정도가 된 해방 노예들은 1847년 미국의 후견으로 독립을 선언하였다. 그러면서 많은 점에서, 심지어는 국기까지도 미국을 모방하였다.
옛날 노예와 그들의 후손은 라이베리아 국경선에 살고 있던 다른 16개 민족들에게 노예 주인처럼 행동하였다. 커피 농장과 고급 목재를 생산하는 과정에서 이들 민족은 아무런 권리도 없는 노동자가 되어 가장 고약한 착취를 당하였다. 미국계는 인구의 3퍼센트를 넘지 않았지만 모든 권리를 장악했고, 모든 궐기는 잔인하게 진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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