숙명의 트라이앵글 1.2
노암 촘스키. 유달승 옮김. 이후
'숙명의 트라이앵글'. 노암 촘스키의 책인데, 원제는 'Fateful Triangle'이고 '미국-이스라엘-팔레스타인'이라는 부제가 붙어 있다.
'숙명'이라는 말, 별로 어렵잖게 접할 수 있는 말이긴 하지만 (나 자신이) 쉽게 쓰는 단어는 아니다. 책을 읽는 내내 나는 공포에 사로잡혀 있었고, 때로는 팔레스타인의 한 여인이 된 것처럼 두려움과 분노에 몸을 떨기도 했다.
국민학교, 중학교, 고등학교를 거치고 대학을 졸업하기까지 숱하게 교육받았던 '식민지의 참상'. 그것은 주입에 가까운 교육을 통해 내 머릿속에 뿌리를 내리고 있음에 틀림없다. 경험해보지 않았음에도 뇌의 한 부분에 굳건히 자리를 잡고 있는 그것을 일종의 '전(前)기억' 혹은 '전승(傳承)기억'이라고 부를 수 있다면, 나의, 그리고 우리나라 젊은이들 모두의 그것은 아마도 식민지의 억압과 차별, 고통이 될 것이다.
'숙명의 트라이앵글'은 나에게 그런 '전기억'을 상기시켰다. '두발 달린 짐승'(팔레스타인 사람들)을 '자비로운 점령자들'(이스라엘인들)이 어떻게 짓밟고 때리고 고문하고 죽였는지, 어떤 과정을 거쳐 땅을 빼앗고 노동을 착취하고 나라를 빼앗았는지를 보면서 나는 내내 고통을 작게나마 공감했고, 무서움에 떨었다.
이 책의 1권과 2권의 절반 정도는 지난 82년 이스라엘의 레바논 침공과 양민학살을 다루고 있고, 2권의 뒷부분은 이른바 '평화과정(Peace Process)'을 비롯한 그 이후의 상황을 설명하고 있다. 레바논 학살 부분은 촘스키가 사건 직후인 83년에 직접 팔레스타인과 레바논을 방문하고 여러 자료를 모아 쓴 것이라서 아주 구체적이고 볼만하다.
올초 아리엘 샤론이 이스라엘 총리가 됐을 때 어째서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그토록 두려움에 떨었는지, 왜 샤론을 '살인마 전두환 보듯' 했는지가 소상히 나와 있다. 그리고 이스라엘인들을 세상에서 가장 잔혹한 인종차별주의자로 만들어버린 이스라엘 내부의 계급구조에 대한 설명도 덧붙여 있다.
언어학자답게 촘스키가 이 책에서 이스라엘의 악행과 사건의 전후관계 못지 않게 주목하고 있는 또 하나의 지점은 '진실은 어떻게 왜곡되는가' 하는 것이다.
"이스라엘 기자들의 근원적 죄악은 '테러리스트'라는 단어를 모든 PLO 전사들, 나중에는 모든 PLO 구성원들-외교관, 관리, 교사, 의사, 팔레스타인 적십자 결국 팔레스타인인들 전체에 대해 사용한 것이다. 이 개념에 따라 그들은 PLO 전사들이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는 팔레스타인 난민촌을 의미하는 '테러리스트 캠프'를 폭격한다"
중동을 장악하고 있으려는 미국과 이스라엘의 이해관계가 맞물리면서 지배와 억압의 '트라이앵글'이 형성되고, 뉴욕타임스 같은 미국내 '유대인 언론'들과 지식인들이 반(反)아랍 논리를 만들어 퍼뜨리고, 그것이 각국에서 재생산되는 과정을 거쳐 '아랍(팔레스타인) 테러집단'이라는 명제로 굳어지고, 그 피해는 이스라엘의 미사일과 총탄에 나가떨어지는 팔레스타인 소년들의 시신을 덮치는 것이다.
이 의도적인 '논리의 악순환'이 지금 미국의 시민들을 죽이고 또 아프가니스탄의 숱한 인명을 죽이는 것을 보면, '숙명의 트라이앵글'은 '극악무도한 저주와 분노와 고통의 트라이앵글'인데 여전히 미국식 평화와 안보라는 이름 아래 그 논리가 재생산되고 있으니.
지구상의 어딘가에서 누군가가 고통받고 있고 그들의 친구들이 고통을 되돌려주기 위해 다시 살인극에 나서고 있음을 안타까와 하는 이들이라면 꼭 읽어볼만한 책이다. 아쉬운 점이 있다면, 번역.
(오늘 알라딘에 들어가보니 이 책의 판매부수가 9000권이 넘었다. 놀라운 일이다...미국 테러참사와 아프간 전쟁을 계기로 해서 사람들의 중동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긴 높아진 모양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