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동차의 메카, 갱들의 도시, 모타운 레코드와 에미넴의 고향이었던 미국 미시간주의 공업도시 디트로이트가 오랜 쇠락 끝에 결국 파산에 내몰렸습니다.
디트로이트 시가 18일(현지시간) 미시간주 연방법원에 파산보호 신청서를 제출했습니다. 릭 스나이더 미시간 주지사는 “디트로이트의 막대한 부채를 해결할 방법이 없어 연방 파산법 9장에 따른 파산보호 신청을 승인했다”고 밝혔습니다.
주 정부는 지난 3월 자동차회사 크라이슬러 파산보호 절차를 맡았던 변호사 케빈 오어를 디트로이트 시의 비상관리인으로 임명해 파국을 막으려 애써왔지만, 200억달러(약 21조원)에 이르는 부채를 줄일 방법이 없어 결국 파산보호를 신청했다고 합니다.
미국 언론들은 이런 제목을 뽑았네요.
타임/ Motor City Meltdown: Long Road Ahead for Detroit's Record Bankruptcy
미국 지자체들의 파산보호 신청 규모 /뉴욕타임스
오어 관리인은 지난달 15일 채권단 대표들에게 채무상환 불능을 통보했습니다. 이후 한달 넘게 채권단과 공무원 노조, 연금기금 등과 손실 부담을 놓고 협상을 했으나 합의에 실패했습니다.
채권단은 물론, 공무원 노조와 연금수령자들은 거세게 반발하고 있습니다. 구조조정과 임금삭감 또는 연금지급 보류 등의 부담을 떠안아야 하니까요. 현지 언론인 '디트로이트 프리프레스'는 연금기금 2곳이 오어 관리인과 스나이더 주지사를 상대로 소송을 내는 등 집단 반발이 일고 있다고 보도했습니다.
다들 아시겠지만, 디트로이트는 ‘모타운(Motown·자동차의 도시)’이라는 별칭에서 보이듯 한때 세계 자동차 산업의 메카로 군림했습니다. 지금은 부실 공룡의 대명사가 돼버린 제너럴모터스(GM)와 디트로이트 디젤 등 자동차 관련 대기업들이 이 곳에 수백개의 공장을 거느리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2차 대전까지 최전성기를 구가했던 도시는 전후 유럽·아시아 자동차업계가 약진하면서 쇠락의 길을 걷기 시작했습니다. 더군다나 1950년대부터는 일부 기업들이 신설된 고속도로를 따라 교통이 더 편한 곳으로 공장을 옮겼습니다.
1910년대, 근무 교대를 하는 디트로이트 포드 자동차 공장의 직원들. /위키피디아
1967년에는 흑인 빈곤층과 백인 거주민 간 충돌로 인종 폭동이 일어나 닷새 동안 43명이 숨지고 건물 수백채가 폐허가 됐습니다. 이 폭동은 백인들의 도시 탈출을 부추겼고, 1970년대 이후 도심은 흑인 슬럼지대가 되고 말았습니다.
이후 디트로이트는 마약조직들이 판치는 ‘갱들의 도시’로 전락했습니다. 에롤 플린스, 테이스티 플린스, 블랙 킬러스 등의 마약조직들이 이 곳을 기반으로 코카인 거래를 하면서, 유혈 충돌을 일삼았습니다. 해마다 할로윈 날이 되면 도심을 파괴하는 폭력 사태가 벌어져 ‘악마의 밤’이라는 오명을 쓰기도 했습니다. 1984년 악마의 밤 때에는 하룻밤새 800곳에 불이 나는 ‘기록’을 세웠다고 합니다.
폭력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죠. 디트로이트는 2012년까지 4년 연속 ‘미국에서 가장 위험한 도시’ 1위에 랭크됐습니다. 이 곳에서 벌어지는 살인사건의 65~70%가 마약 때문에 발생하는 것으로 추정됩니다.
1950년 185만명이었던 인구는 2010년 71만명으로 줄었습니다. 지금은 인구의 5분의4가 흑인이고, 그중 3분의1은 빈곤층이라고 합니다. 도심은 말 그대로 ‘공동화’됐습니다. 오어 관리인은 파산보호 신청서에서 “시내 신호등 40%는 고장난 상태이고 빈 채로 방치된 건물이 7만채가 넘는다”고 지적했습니다.
지금은 방치된 디트로이트 시내 패커드 사의 자동차 공장. /위키피디아
세수가 줄어가는데 이렇게 무너진 도시를 관리하느라 당국은 막대한 빚을 져야 했고 그것이 파산보호 신청으로 이어졌습니다.
잠시 연방 파산법에 대해 알아볼까요. 저도 잘 모르지만서도...
연방 파산법은 1, 3, 5, 7, 9, 11, 12, 13, 15장으로 돼 있습니다. 관련법 중 파산과 회생 절차에 대한 것들을 통칭해 '파산법'이라 하다보니, 12장 빼고는 다 홀수 장이네요;; 그 중 7장, 9장, 11장, 12장, 13장은 파산의 주체에 따른 절차를 정하고 있습니다. 9장이 지방자치단체의 파산보호에 관한 것으로, 이 법에 따라 지자체들은 민간기업들에 비해 유리한 조건에서 채권단과 협상을 할 수 있습니다. 그 대신 파산보호가 이뤄질 경우 강도높은 구조조정을 해야 합니다.
1937년 파산법 제정 이래 지자체 640여곳이 파산보호를 신청했는데, 특히 2008년 이후에 40여곳이 이 법의 도움을 빌렸습니다. 미국 지자체들의 재정 상황이 그만큼 안 좋다는 의미겠지요.
디트로이트 시의 파산보호 신청은 연방 제6 순회항소법원에서 담당합니다. 법원은 이른 시일 내 파산담당판사를 지명, 심리에 착수하게 됩니다. 동시에 시 당국의 채무는 자동 추심금지(automatic stay) 조항에 따라 지불이 미뤄집니다. 시를 상대로 한 소송절차도 대부분 자동 중단되고요. 연금·임금 관련 소송은 모두 파산법정으로 이송되기 때문이죠. 하지만 상하수도 관리와 치안·소방 등 시의 기본 업무는 계속 이뤄지며, 이 부분의 비용도 계속 나갑니다.
채권자들은 파산신청이 적법한지를 놓고 시 측과 법정에서 다투게 됩니다. 시 당국이 파산보호를 받으려면 ‘선의(in good faith)의 신청’임을 입증해야 합니다. 또 시 재정이 지급불능 상태임을 증명해야 합니다. 현재 연금기금들은 당국이 협상 도중 갑자기 파산보호를 신청했다며 ‘선의의 신청’이 아니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디트로이트의 리버프론트 야경. 이렇게 보면 아름답기만 하군요. 건너편 캐나다에서 바라본 풍경인 듯. /위키피디아
법원이 파산보호절차를 진행하라고 결정하면 시 당국은 파산법에 따라 공무원 인원 감축과 임금 삭감, 공기업 민영화와 자산 매각, 공공요금 인상과 증세 등 강도높은 재정확보 계획을 내놓아야 합니다. 오어 관리인이 이런 내용을 담은 ‘재조직(reorganization)’ 계획을 만들면 이를 놓고 채권단·노조·연금기금 등이 협상을 벌입니다.
채권단 등의 지지를 얻으면 재조직안이 승인되고 구제절차를 밟습니다. 충분한 지지를 얻지 못할 경우 법원은 시에 재협상을 명령합니다. 최악의 경우 협상에 실패하면 오어 관리인이 ‘크램다운(cramdown·채권 가격을 강제로 줄이는 것)’을 법원에 신청할 수도 있습니다. 채권단 무시하고 걍 진행하자, 뭐 대충 그런 의미라고 하네요.
이런 과정들을 거쳐 디트로이트가 회생하기까지는 길게는 몇년이 걸릴 것으로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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