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골빵집에서 자본론을 굽다
와타나베 이타루. 정문주 옮김. 더숲
어쩐지 지난해부터 계속해서 '탈성장'에 관한 책들을 읽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든다. 관심이 없는 문제를 굳이 골라서 파고드는 것일 리야 없지만, 그렇다고 내가 탈성장이라는 주제를 놓고 책을 골라서 읽는 것도 아닌데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다.
따지고 보면 탈성장은 이제 우리가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아니 적극적으로 추구해야 하는 가치다. 탈성장에 대한 책들을 주로 문화부 책상자에서 주워와 읽었는데, 거푸 내 손에 잡혔다는 건 이 문제를 다룬 신간들이 그만큼 많이 나오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저성장, 뉴노멀, 신창타이, 이름들은 거창하지만 탈성장은 우리가 망가진 지구에서 적극적으로 받아들여야만 하는 가치다. 이런 책들이 계속 나오니 참 좋다.
와타나베 이타루라는 빵집 주인은 젊은 시절 방황하며 '찌질하게' 보낸 뒤, 빵 만들기라는 자기만의 일을 찾는다. 아들을 평생 마음에 들어하지 않았던, 대학 교수 출신인 인텔리 아버지가 아들의 생각을 듣고서 건네준 것은 마르크스의 '자본론'. 와타나베는 빵을 만들고 자본론을 읽는다. 빵을 만들면서 효모와 부패, 자연과 경제를 생각한다.
그러던 차에 터 잡고 있던 지바와 가까운 후쿠시마에서 원전 사고가 일어난다. 와타나베는 서쪽의 오카야마에 있는 산 좋고 물 좋은 곳으로 이사가 새 출발을 한다. 이 책은 새 출발을 하고 3년이 지나 쓴 것으로, 시골빵집 주인이 되어 '썩지 않는 경제'를 고민하게 되기까지 그가 생각하고 느낀 것들을 담고 있다. 쉽고 재미있다.
와타나베의 빵집의 목표는 일본 고택의 천연균으로 만든 주종으로 발효시킨 빵을 만들고, 그렇게 '땅'과 갈라서지 않는 지역 경제를 조금씩 만들어 나가는 것이다. 경영 면에서만 보면 이윤을 남기지 않고 '현상유지'를 하는 것이 그와 아내 마리가 운영하는 빵집 '타루마리'의 목표다. 아직 그가 성공했다고 말하기는 이르다. 누구든 예상할 수 있겠지만 시골살이도 그리 아름답지만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다른 상상'을 할 수 있게 해준다는 점에서 읽는 것만으로도 즐겁다. '어떻게 사는 것이 옳을까' '내 아이를 어떻게 키우는 것이 좋을까' 하는 생각으로, 책을 읽는 동안 머리 속이 바빴다.
빵이 일본에 본격적으로 상륙한 시기는 바쿠후 말기에서 메이지 초기, 즉 19세기 말이다. 미국과 유럽의 제빵 기술자들이 일본으로 건너와 요코하마와 고베, 나가사키 등 개항지에서 조금씩 빵을 퍼뜨렸다.
빵을 발효시키는 기술은 빵집의 비전 중의 비전으로 여겨져 스 숭이 제자에게 도제식으로 전수하는 방식으로만 전해졌다. 당시 일본의 빵집은 마르크스 시대의 영국 빵집처럼 스승이 기술을 인정한 기술자만이 분점을 차려 자기 가게를 가질 수 있었다. 그랬던 관습이 일대 변화를 맞게 되는 계기가 바로 이스트의 순수 배양이었다. 1920-1930년에 걸쳐 이스트의 제조법과 이스트를 이용한 제빵 기술이 확립되면서 누구나 간단히 빵을 만들 수 있게 된 것이다.
이스트는 빵집의 경영과 노동 형태를 크게 바꾸어놓았다. 제빵이라는 작업에서 기술과 숙련도가 필요 없어졌고, 스승에서 제자로 기술을 전수하는 도제제도가 무너졌으며 대신 자본가(경영자)와 노동자라는 자본주의적 고용관계가 빵집에 뿌리를 내리게 되었다. (62쪽)
그런데 이스트처럼 인공적으로 배양된 균은 원래 부패해서 흙으로 돌아가야 하는 물질마저도 억지로 일정 기간 썩지 않게 만들어버린다. 균은 균인데 자연의 섭리를 일탈한 ‘부패하지 않는’ 물질을 만들어내는 인위적인 균인 것이다.
시간에 의한 변화의 섭리로부터 벗어나 있는 것이 하나 더 있다. 돈이다. 돈은 시간이 지나도 흙으로 돌아가지 않는다. 영원히 ‘부패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부패는커녕 오히려 투자를 통해 얻는 이윤과 대금업을 통해 발생하는 이자로 인해 끝없이 불어나는 성질마저 있다. 곰곰이 따져보면 참 이상하지 않은가? 바로 이 부패하지 않는 돈이 지본주의의 모순을 낳았다. (80쪽)
이런 사태를 더욱 부채질하는 것이 통화량 늘리기다. 재정정책(적자국채 발행)과 금융정책(제로금리정책 · 양적완화)을 통해 돈을 마구 풀어서 시중에 돈이 넘쳐나게 만드는 것이다. 자본주의는 모순으로 가득 차 있다. ‘부패하지 않는’ 돈이 자본주의의 모순을 낳는 주범이다. 그렇다면 차라리 돈과 경제를 ‘부패하게’ 만들어버리면 어떨까? 이것이야말로 발효의 힘을 빌려 발효와 부패 사이에서 빵을 만드는 나에게 딱 맞아떨어지는 발상이었다. (83쪽)
사람들은 돈이라는 이름의 비료를 대량으로 투입해 경제를 뒤룩뒤룩 살찌게 한다. 내용물이야 어떻든 이윤만 늘면 된다, GDP만 키우면 된다, 주가가 오르면 된다는 생각을 한다. 비만이라는 병에 걸린 경제는 거품을 낳고 그 거품이 터지면 공황(대불황)이 찾아온다. 거품붕괴는 어떤 의미에서는 너무 살쪄서 비정상이 되어버린 경제가 균형을 되찾는 자정작용이다.
그런데 부패하지 않는 현대 자본주의 경제는 공황도 거품붕괴 도 허용하지 않는다. 적자 국채를 발행하는 등의 재정 출동(出動)이나 제로 금리정책과 양적완화 같은 금융정책을 통해 돈이라는 이름의 비료를 대량으로 살포하는 수법을 써서 한없이 경제를 살찌우려고만 한다. (147쪽)
헝가리에서는 첨가물이나 방부제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없었고, 모든 식재료가 재료 그대로의 모습으로 유통되고 있었다. 그렇게 신선하고 소박한 먹거리를 나의 몸은 참 좋아했다. 10대 후반부터 내 몸은 정크식품에 절어 있었다. 항상 몸이 나른하다고 느꼈는데 놀랍게도 헝가리에 산 지 l년 만에 내 몸은 달라졌다. 나중에 귀국한 후, 예전에 항상 마시던 캔 커피를 마시고는 갈색 물감이라고 느낄 정도였다. (164쪽)
마리는 모코와 히카루를 데리고 구마모토로 시집간 대학 동창 집으로 피난을 갔다. 혼자 지바에 남아 가게를 꾸리던 그때만 해도 세 사람이 지바로 다시 돌아오지 못할 거라는 생각은 하지 못했다. 원전 사태는 전혀 수습되지 않았다. 한 달이 지나고 두 달이 지나도, 세 사람을 불러들일 만한 상황이 아니었다. 아니 그럴 기미조차 보이지 않았다.
그때 문득 떠오른 것이 ‘물’이었다. 여기서 불투명한 미래 때문에 불안에 떨 것이 아니라, 미래가 보이는 곳으로 이사를 가자는 생각이 점차 굳어졌다. 최고의 주종 빵에 도전할 수 있는 최고의 물이 있는 곳에서 다시 빵을 만들고 싶었다. (169쪽)
큰 아이 모코는 병원에서 낳았다. 종이기저귀는 쓰기 싫다며 마리는 천기저귀를 고집했고, 덕분에 빨아도 빨아도 쌓이는 기저귀 빨래에 우리는 심신이 지쳤다. 아이 키우기는 힘들었다. 마리는 엄마로서의 자신감을 잃기도 했지만 뭔가 잘못됐다는 생각을 했던 모양이다.
그래서 둘째 히카루는 집에서 낳았다. 8개월쯤 되었을 때 기저귀 안 쓰는 육아법을 알게 되었다. 아이를 안고 있다가 조금이라도 응가를 할 기미가 보이면 마당으로 데리고 가 변을 보게 했다. 그랬더니, 전에는 항상 설사 기가 있어서 자주 기저귀를 갈던 아이의 변이 거짓 말처럼 좋아졌다.
기저귀 안 쓰는 육아법을 몰랐다면 지진 때문에 기저귀 구하기가 힘들었던 시기에 더 크게 당황했을 것이다. 아이들의 생리에 맞춘 육아법은 결과적으로 자연에도 좋고 비상시에도 흔들리지 않는다. (204쪽)
전기밥솥이 없던 시절에는 집집마다 대가족의 하루치 밥(쌀과 보리를 섞어 지은 보리밥)을 아침에 한꺼번에 지었다. 보리는 쌀보다 쉽게 상한다. 그래서 특히 무더운 여름에는 보리밥이 상하지 않게 보관하는 것이 중요했다. 냉장고가 없던 그 시절, 사람들이 생각해낸 것은 잡균의 번식을 막는 대소쿠리였다.
우리가 이주지를 찾아 이곳에 왔을 때 제일 먼저 만난 사람이 히라마쓰 씨였다. 대나무는 천연 누룩균의 자가 채종을 돕는 숨은 공로자다. 가쓰야마와의 인연이 죽세공 장인과 먼저 닿은 것만 봐도 우리는 이곳으로 올 운명이었던 듯 싶다. (214쪽)
집에서 일을 하면 아이들에게 멋진 모습만 보일 수는 없다. 빵이 잘 안 만들어지면 나는 금세 어깨가 처진다. 마리는 팔다가 실수라도 한 날이면 풀이 죽어 백배사죄한다. 하지만 아이들이 이런 모습까지도 기억했으면 좋겠다.
저희들이 눈을 떴을 때 아빠는 이미 일터에서 굵은 땀을 흘리고 있고, 집안에는 온통 향긋한 빵 굽는 냄새가 퍼졌다는 것, 손님들로 가게가 북적이면 엄마와 아빠는 힘들어하면서도 무척 기뻐했다는 것, 녹초가 될 때까지 일한 뒤에는 ‘한 잔의 술’과 함께 이 세상 최고의 행복을 니눴다는 것 ...... 부모가 열심히 일하며 사는 모습을 기억 속에 깊이 새겨준다면 얼마나 좋을까?
사람을 만든다는 것은 주제넘은 소리다. 다만 우리는 사람이 자랄 수 있는 터를 만드는 일에 도전하려 한다. (22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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