깃발의 세계사 - 왜 우리는 작은 천 조각에 목숨을 바치는가 Worth Dying for: The Power and Politics of Flags
팀 마샬 (지은이),김승욱 (옮긴이) 푸른숲
‧ 해제 : 베테랑 언론인이 보여주는 깃발의 정치학
2019년 중국 정부의 억압에 항의하는 홍콩인들의 시위가 벌어졌을 때, 친중국파로 알려진 배우 재키찬成龍은 ‘중국의 국기인 오성홍기五星红旗의 수호자’를 자처하고 나섰다. 재키찬뿐 아니라 중국의 여러 유명 배우들과 가수들이 잇달아 소셜미디어 웨이보에 “오성홍기를 지지합니다”라는 글을 올렸다. 홍콩 시위대 일부가 오성홍기를 태우거나 바다에 버린 일이 알려지면서, 홍콩의 반反중국 감정 못지 않게 본토의 반홍콩 감정이 높아졌을 때였다. 대중들의 지지를 먹고사는 스타들로서는 공개 사상검증이나 다름없는 ‘웨이보 애국선언’을 해야 했던 것이다.
팀 마셜Tim Marshall은 영국 저널리스트다. 주로 스카이뉴스Sky News 채널에서 국제 이슈와 외교 문제를 다루었뤘고, BBC에서도 논평을 했으며 영국 일간지들에도 글을 싣고 있다. 30여 년 간 언론인으로 활동하면서 발칸 전쟁과 코소보 내전, 아프가니스탄 전쟁과 이라크 전쟁, 리비아와 이집트 등을 휩쓴 ‘아랍의 봄’ 혁명의 현장에서 보도를 했다. 1991년 걸프 전쟁 때 스카이뉴스 특파원으로서 ‘여섯 6시간 연속 생방송’을 한 것으로 유명하다. 자기 이름을 내걸고 ‘더 왓 & 더 와이The What & The Why’라는 뉴스 플랫폼을 운영하고 있으며 《지리의 힘The Power of Geography>과 《장벽의 시대Divided :- Why We're living in an Age of Walls》라는 책으로 국내 독자들에게도 알려져 있다.
이번 책의 주제로 그는 ‘깃발’을 선택했다. 깃발은 상징이고 디자인이다. 깃발의 이름과 유래에서부터 장식적인 디테일까지 꼼꼼히 짚으면서 저자가 펼쳐 보이는 것은 그 상징에 스며 있는 역사와 민족과 정치적 갈등과 분쟁과 평화와 혁명의 이야기다. 말 그대로 깃발을 통해 들여다보는 세계사, 그리고 현재의 세계인 셈이다.
세계의 모든 지역에서 ‘상징 전쟁’은 언제나 진행 중이다. 손기정과 일장기 말소 사건까지 굳이 거슬러 올라갈 필요는 없다. 한국의 ‘태극기 시위대’는 태극기와 함께 성조기, ‘다윗의 별’이 그려진 이스라엘기, 더불어 일장기까지 들고 나오는 것이 한국의 현실이다.
홍콩에서 오성홍기를 불태우는 시위와 그에 대한 탄압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중국 정부는 2021년 홍콩의 학교들에 ‘오성홍기를 게양하고 국가를 부르게 하라’는 지시를 내렸고, 중국 네티즌들은 유명 배우 판빙빙范冰冰이 나오는 미국 영화의 포스터에 오성홍기가 등장하자 “국기를 상업적으로 이용했다”며 문제 삼았다. 아프가니스탄을 장악한 탈레반은 국기를 다시 게양하려던 시위대에 총을 쐈으며, 미국 점령 뒤 출범한 정부가 채택한 국기를 자신들의 깃발로 바꾸려는 시도를 하고 있다.
2000년대에 브라질은 거대 신흥 경제국이자 여러 진보적인 정치실험들의 중심지였다. 하지만 저자가 칭찬한 브라질의 ‘소프트파워’는 몇 년 새 우파 정부의 아마존 파괴와 반민주적인 행태로 추락했다. 국제행사에서는 아마존 파괴에 항의하는 원주민들이 국기를 들고 시위를 하고, 브라질 안에서는 우파들이 역시 국기와 함께 성조기를 들고 나와 파시스트 같은 구호들을 외치며 집회를 한다.
인도군은 카슈미르의 해발 4,500m미터 고지에 최근 대형 국기를 내걸었다. 크로아티아, 몬테네그로 등 발칸반도 곳곳의 세르비아인들은 세르비아의 국경일(9월 15일)에 맞추어춰 국기를 내걸었다. 분쟁의 역사가 있는 곳에서 깃발은 이처럼 민감한 문제다. 반면 2020년 8월 이스라엘 텔아비브에 이스라엘과 아랍에미리트연합(UAE) 깃발이 나란히 휘날리는 모습처럼, ‘영원한 친구도, 영원한 적도 없다’는 국제관계의 진리를 보여주는 장면들도 있었다. 저자가 언급했듯이, 2015년 프랑스 파리 테러 뒤 세계의 소셜미디어에 걸린 삼색기처럼 종종 깃발은 애도와 연대의 표시가 되기도 한다. 그 프랑스 깃발의 파란색은 최근 조금 더 짙은 톤으로 바뀌었다. 정치적인 이유뿐 아니라 심미적인 이유에서도 깃발들은 진화한다.
책의 앞부분은 미국과 영국, 유럽 깃발들에 많은 분량이 할애되어돼 있다. 아랍에 이어 나오는 것은 이슬람국가(IS)다. 이슬람 조직들을 다루는 저자의 시각 밑에는 ‘서구인’들이 가진 중동이나 이슬람권에 대한 편견이 깔려 있는 것이 사실이다. 레바논의 헤즈볼라Hezbollah나 팔레스타인의 하마스Hamas는 무장력을 갖춘 정치 조직일 뿐 ‘테러 조직’이 아니며, 그들이 연루된 분쟁과 떼어놓을 수 없는 것은 현대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에서 저지르는 반인도적인 행위들이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싹 지우고 이슬람 정치 조직들을 모두 ‘공포의 깃발’로 묶었다. 팔레스타인 저항의 상징인 파타Fatah의 깃발조차 공포의 이름 아래 집어넣은 것이 온당할까.
그의 시선에서는 또한 미국에 대한 공감이도 짙게 느껴진다. 이슬람 예언자를 모독한 서구의 만평에 항의해 이슬람권 곳곳을 휩쓴 ‘성조기 화형식’을 보면서 그는 “그 행동에 동반된 흥분과 분노에는 다소 아이 같은 부분”이 있었다고 평하면서, 그런 행위를 하는 이들조차 잠재의식에서는 미국의 성공에 대한 무력감을 스스로 인정하고 있는 것 같다고 표현한다. 2001년 9.11 테러에 대해서도 세계무역센터에 꽂힌 성조기를 강조하지만, 그로부터 20여 년이 지나면서 미국은 도널드 트럼프Donald J. Trump가 부추긴 인종주의와 그 상징인 ‘남부연방기Confederate flag’로 갈등에 휩싸였다. ‘성조기의 감동’을 희석시키는 미국식 애국주의의 두 측면이다.
유니언온잭의 흔적이 남아 있는 옛 영국 식민지들의 깃발을 논할 때 저자의 시선에 제국주의의 과거에 대한 반성은 그다지 눈에 띄지 않는다. 심지어 일부 인도인들에게서 찾아볼 수 있는 식민시절에 대한 향수 비슷한 감정을 ‘객관적인 묘사’인 양 전달하기도 한다. 저자가 이 책을 쓰고 난 뒤인 2021년 11월 중미의 섬나라 바베이도스는 영국 여왕을 ‘국가원수’ 지위에서 몰아내고 공화국으로 재탄생하면서 왕실 깃발을 내렸다. 바베이도스 시인 윈스턴 패럴Winston Farrell은 “식민 시대의 모든 페이지들”을 접을 때라면서 “어떤 이들은 유니언온잭 아래에서 어리석게 자라났고, 피부색의 성(城)에 갇혀 길을 잃었다”고 말했다.
그럼에도 저자가 보여주는 다채로운 세계의 깃발들, 그 깃발들을 든 세계의 풍경은 국내 독자들에게겐 충분히 새로운 경험이 될 수 있다. 아시아와 중남미와 아프리카의 국가적 상징들과 그것들이 만들어진 과정, 깃발 하나가 올라가기까지의 역사와 정치적 곡절을 이렇게 상세히 소개한 책이 국내에 거의 없기 때문이다. 그 점만으로도 저자의 작업은 충분히 의미가 있다. 역사에 대한 백과사전적인 지식을 나누어 눠받는 것만으로도 재미가 있지만, ‘지금 세계’의 이슈들을 폭넓게 다루고 있다는 것도 이 책의 큰 장점이다. ‘세계’를 서구로만 인식하는 경향이 아직도 남아 있는 한국에서 마셜의 이 책은 인식의 폭을 넓혀주고 국제 문제에 대한 관심을 가지갖는 데에 도움이 될 것으로 믿는다.
독일 총리 앙겔라 메르켈Angela D. Merkel은 기자회견장에서 슬그머니 연단 위의 독일 국기를 치우는 모습이 영상에 잡힌 적 있다. 국가주의의 상징물을 치우는 총리의 행위에 한쪽에서는 ‘국기를 중시하지 않는다’는 비판이 나왔지만, 많은 이들이 독일 지도자의 성숙한 행동을 높이 평가했다. 한국인들의 상당수는 ‘국기에 대한 맹세’를 외우며 자랐다. 그 시절의 강도 높은 억압과 떼어놓을 수 없는 것이 ‘맹세’와 ‘경례’로 이뤄루어진 예식들이었다. 집단의 상징물이 가지갖는 중요성 못지 않잖게, 그 상징물이 내포하고 있거나 유발하는 것들이 때로는 폭력적일 수 있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되새기게 된다. 세계의 역사와 지리를 씨줄과 날줄로 엮으면서 저자가 들려주는 깃발의 역사학과 깃발의 정치학은 흥미진진한 동시에, 이처럼 고민거리들도 던져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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