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리반
로베르토 페르난데스 레타마르. 김현균 옮김. 그린비
칼리반. 셰익스피어의 <템페스트>에 나오는 ‘원주민’의 이름이다. 마법사 프로스페로, 그의 딸 미란다, 요정 아리엘, 원주민 칼리반. 프로스페로는 유럽인의 은유이고, 칼리반은 라틴아메리카 원주민의 은유다. 아리엘은 지식인, 미란다와 칼리반 사이의 아이는 메스티소다. 셰익스피어의 원작은 오랜 세월에 걸쳐 거듭 재해석됐다. 그렇게 수백년을 거쳐왔지만 여전히 칼리반은 유럽 문화의 사생아, 신식민주의의 희생양, 제3세계, 개도국으로 불린다.
카리브, 카니발에서 나온 말이라는 칼리반. 쿠바의 작가, 문학평론가인 저자는 이 단어를 가지고 라틴아메리카의 작가들과 그들의 자의식, 라틴아메리카를 바라보는 서구의 시선을 해부한다. 옮긴이에 따르면 “<칼리반>은 라틴아메리카 문화와 정체성 논의에서 빼놓을 수 없는 핵심적인 텍스트다. 프레드릭 제임스는 이 책에 대해 라틴아메리카에서 에드워드 사이드의 <오리엔탈리즘>에 견줄 만한 가치를 지니며 라틴아메리카 땅에서 그와 유사한 불안과 동요를 불러일으켰다고 평가한 바 있다.” (223쪽)
저자가 <칼리반>을 쓴 것은 1971년이었다. 쿠바 혁명이 일어나고 10년 됐을 때다. 비평문 혹은 에세이처럼 보이지만 주장은 명확하고 격렬하다. 쿠바 혁명의 정신적 조상인 호세 마르티의 사상을 연구하는 연구소를 이끌고 있던 저자는 멕시코에서 카를로스 푸엔테스를 비롯한 일군의 작가들이 쿠바의 문화적 독재를 비판하며 '쿠바 혁명을 헐뜯는' 데에 동조하자 열받아서 이 글을 썼다고 한다.
칼리반이라는 개념으로 라틴아메리카를 해석한 전례는 이미 많았지만, 저자의 소개에 따르면(책에는 자뻑;;스러운 구절이 적잖게 나온다) 그 자신의 <칼리반>은 큰 파장을 일으켰다고. 처음 에세이를 쓰고 15년이 지난 1986년 저자는 <다시 돌아보는 칼리반>이라는 글을 썼고, 1991년에는 <현 단계의 우리 아메리카와 칼리반>을 썼다. 그 이듬해에는 콜럼버스 500년을 맞아 <오백 년 뒤의 칼리반>(1992년)을 썼으며 1999년에는 <식인주의 앞의 칼리반>을 썼다. 한국어판 책에는 '원조'부터 시작해서 이 모든 글들, 즉 5편의 '칼리반'이 실려 있다. 보르헤스 비판처럼 반복되는 구절도 조금 있지만 시기순으로 읽는 5편의 글은 모두 흥미로웠다.
갈레아노의 <불의 기억>으로 시작해서 라틴아메리카에 대한 책을 올들어 연달아 읽고 있다. <칼리반> 역시 몇 년 동안 책꽂이에서 묵혀두고 있던 것인데 뜻밖에도 흥미진진했다. 라틴아메리카 문학을 안다고는 결코 말할 수 없지만 그래도 무쟈게 재미있었다.
지구상의 피식민 세계에는 아주 특별한 경우가 존재한다. 메스티사헤가 우연이 아니라 본질이자 중심선인 광대한 지역, 즉 우리 자신, “우리 메스티소아메리카”(호 세 마르티)를 말한다. 감탄할 정도로 언어에 정통했던 마르티는 민족적, 문화적으로 볼 때 원주민과 유럽인, 아프리카인의 후손의 문화인 우리 문화의 차별적 표지로서 이 특정 형용사를 사용했다.
<자메이카에서 보낸 편지>(1815년)에서 해방자 시몬 볼리바르는 이렇게 선언한 바 있다. “우리는 작은 인간종입니다. 우리는 거의 모든 예술과 학문에서 초보적이며 드넓은 대양에 둘러싸인 동떨어진 세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는 또 앙고스트라 의회 연설(1819년)에서 이렇게 덧붙였다.
“우리 민족은 유럽인도 미국인도 아니며 유럽의 소산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아프리카와 아메리카의 혼합이라는 사실을 명심합시다. 다름 아닌 스페인조차 아프리카의 피와 제도, 그리고 그 특성으로 인해 더 이상 유럽 국가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금세기에도 멕시코인 호세 바스콘셀로스는 <우주적 인종>(1925년)에서 새로운 인종, 즉 “이전에 존재했던 모든 인종의 보물로 빚어진 궁극의 인종인 우주적 인종”이 라틴아메리카에서 벼려지고 있다고 지적했다.
- 17쪽
마르티의 메스티사헤 개념은 반인종주의에 뿌리를 두고 있다... (중략) 페루와 에콰도르에서는 원주민이 인구의 3분의 1이 넘는다. 과테말라와 볼리비아에서는 과반수에 이른다. 이 두 나라에서 이른바 ‘국민의 소수’는 실제로 다수다. 그럼에도 파라과이를 제외하면 이베로아메리카의 모든 나라, 심지어 ‘문명론자들’이 원주민을 절멸하는데 이르지 못한 나라들조차 유일한 공식 언어로 스페인어나 포르투갈어를 채택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 아메리카의 상당 지역에 이른바 인디오가 생존해 있다는 것을 확인하기 위해 굳이 통계를 볼 필요는 없다. 그 나라들에서 호텔이나 레스토랑, 상점, 은행을 찾아가 보는 것으로 충분하다. 바닥을 청소하고 옷을 세탁하고 쓰레기를 버리고 허드렛일을 하는 사람들을 찾아보라. 그들의 얼굴에서 수백 년 된 뛰어난 예술품들이 관광객에게 선보이는 특징들이 반복되는 것을 발견할 것이다.
- 109쪽
크리오요 과두 지배 계급은 식민주의자들 못지않게 그들을 학대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백만 아메리카 원주민은 자신의 문화를 보존했다. 풍요로운 메스티사헤는 오직 근원적인 문화적 원형들 간의 상호 침투를 통해서만 생성될 수 있다. 이것이 바로 페르난도 오르티스가 반세기 이상 전에 ‘문화횡단’이라 불렀던 것이다. 호세마리아 아르게다스, 다르시 히베이루, 기예르모 본필, 리고베르타 멘추를 비롯한 수많은 인물이 이 점에 대해 커다란 가르침을 주었다.
- 110~111쪽
에메 세제르의 '네그리튀드'를 떠올리게 하는 '메스티사헤'. 이 책에서 처음 접한 개념이다.
크리스토퍼 콜롬버스의 <항해 일지>에는 칼리반이라는 상징의 소재가 될 사람들에 대한 유럽 최초의 언급이 등장한다. “그들은 그 섬(아이티 섬)에는 이마에 외눈이 달린 사람들과 카니발레스라 불리는 사람들이 살고 있다면서 공포에 질린 표정을 지어 보였다.”
카리브/카니발의 이미지는 콜롬버스가 <항해 일지>에서 제공하는 또 다른 아메리카 원주민의 이미지와 대조를 이룬다. 다름 아닌 대(大)안티야스 제도의 아라와코 족- 주로 우리의 타이노족-의 이미지를 말하는데 콜롬버스는 그들을 평화롭고 온순하며 심지어는 소심하고 겁많은 종족으로 묘사하고 있다.
아메리카 원주민에 대한 두 가지 상반된 시각은 급속도로 유럽 전역에 확산되면서 독특한 방식으로 전개된다. 타이노족은 유토피아적 세계에 사는 천상의 주민들로 탈바꿈한다. 반면 카리브족은 식인종인 ‘카니발’이자 문명 세계의 바깥에 존재하는 야수로서 무자비하게 맞서 싸워야 하는 대상으로 전락한다. 이 두 가지 시각은 실제로는 역동적인 신흥 부르주아 계급이 선택한 두 개의 이데올로기적 무기일 뿐이다.
대체로 유토피아적 관점은 자신들의 국가에서 실현하지 못한 정치개혁안을 이 땅에 투사하며 이러한 관점은 식민지 상태에서 해방된 국가들에 지칠 줄 모르고 훈수를 두는 수많은 조언자들로 이어진다.
- 21~22쪽
1898년 미국은 쿠바의 대스페인 독립전쟁에 개입하여 쿠바를 보호령으로 복속시켰고 1902년부터 1959년까지 쿠바는 미국의 첫 번째 신식민지가 된다.
반면에 푸에르토리코와 필리핀은 전통적인 유형의 미국 식민지로 전락한다. 여러 해 전 마르티가 예견했던 이 사건은 이스파노아메리카의 인텔리겐차를 전율시킨다. ‘98’은 흔히 모데르니스타라는 막연한 이름으로 불리는 존재들을 지칭하기 위해 사용돼야 하는 이스파노아메리카의 연도다. ‘98’은 라틴아메리카에서 미 제국주의의 뚜렷한 존재가 드러난 해이다.
- 28쪽
“자연에서 생겨나 그곳에 묻히는 모든 인종의 사람들에 의해 성장하고 활기를 얻는 그 정신을 섭취하는 게 좋다.
아메리카의 지혜는 토착적 영예다. 인디오를 무력화한 것과 똑같은 타격으로 아메리카가 어떻게 무력화되었는지 보이지 않는가. 인디오가 걷게 될 때까지 아메리카는 제대로 걸음을 떼지 못할 것이다.” (<아메리카의 토착 작가들>)
마르티가 자신을 우리의 토착 문화와 동일시한 것은 당대의 식민지 국가들에서 가장 급진적이고 근대적인 기준을 유지하는 자양분이 되었다. 인디오에 대한 마르티의 이러한 접근은 물론 흑인에 대해서도 존재한다. 그러나 불행히도 아프리카 문화와 그 문화가 아메리카의 메스티소 문화의 통합에 끼친 탁월한 기여와 관련한 작업이 실현되기 위해서는 20세기까지 기다려야 했다. 훗날의 카스트로처럼 우리를 명명할 때 마르티는 우리를 개념적으로 정의하는 하나의 이름을 발견하는 것조차 어렵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 51~52쪽
보르헤스에 대한 부분은 특히 재미있었다. 나 역시 보르헤스를 한때 몹시도 좋아했지만 사실 보르헤스가 어떤 사람인지는 잘 모른다. 저자가 보르헤스에게 갖는 감정은 복잡다단한 애증 같다.
라틴 아메리카가 속해 있는 진영인 자유 세계는 오늘날 훨씬 더 기억할 만한 인물들을 가지고 있다.
예컨대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를 생각하면 그의 이름은 ‘자유’라는 형용사와 결부된 것으로 보인다. 이 작가는 1926년 이렇게 썼다. “태양과 달이 유럽에 있다고 믿는 자들이 아니라 크리오요들에게, 이 땅에서 살고 죽는다고 느끼는 사람들에게 말하고 싶다. 이 땅은 타고난 망명자들의 땅, 먼 곳에 있는 나무의 것을 동경하는 자들의 땅이다. 그들은 혈통에 관계없이 진짜 양키들이다. 나의 펜은 그들에게 말을 걸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 보르헤스는 역사에 기록된 보르헤스가 아니다. 애처롭게 자신의 계급에 충실한 보르헤스, 잘 알려지고 널리 확산되고 공적인 영예와 무수한 문학상을 거머쥔 보르헤스는 다른 보르헤스였다. 이 보르헤스는 “나는 우리의 전통이 유럽이라고 믿는다”라는 1955년의 선언을 통해 “우리는 로마 제국에 속한다”고 했던 사르미엔토의 해괴한 발언을 되풀이한다
- 63~64쪽
메야와 바예호, 카스트로, 체 게바라, 그리고 라틴아메리카의 새로운 혁명 문화가 마르티를 계속 이어간 반면 주변부 아르헨티나 부르주아지의 대표자들은 결국 사르미엔토를 계승했다. 그들은 패배한 계급이다. 사르미엔토가 구상한 부르주아적 발전의 꿈은 실현 가능성조차 없었기 때문이다. 마리아테기가 말한 대로 “자본주의 경제에서 자유경쟁의 시대는 막을 내렸다. 우리는 지금 독점의 시대, 다시 말해 제국의 시대에 살고 있다. 자본주의 질서 내에서 라틴아메리카 국가들은 보잘 것 없는 식민지의 운명에 처해 있다.”
- 67쪽
사르미엔토와 보르헤스 사이의 유대는 한층 분명하게 확인된다. 보르헤스는 전형적인 식민지 작가이며 우리들 가운데서 이미 쇠락한 계급의 대변자다. 대단한 지능의 소유자이니 그가 잘 알고 있듯이 그의 글쓰기 행위는 독서 행위에 더 가깝다.
보르헤스의 글쓰기는 그가 식민주의자이며 소멸하는 계급의 대변자임을 명백하게 보여주는 독특한 식세포작용인 그의 독서로부터 직접 나온다. 그에게 최상의 문화적 창조는 도서관, 아니 외래의 문화적 창조물들이 모여 있는 장소인 박물관이다. 공포와 괴물들, 탁월함, 인용, 그리고 민속예술의 박물관이며 감탄 없이 읽기 힘든 스페인어로 쓰인 보르헤스의 작품은 오늘날 아메리카에서 발생한 스캔들의 하나다.
라틴 아메리카의 다른 주요 작가들과 달리 보르헤스는 좌파적인 인물이 되고자 하지 않는다. 반대로 그는 히론의 침략자들을 지지하는 서명을 하고 레지 드브레에게 사형 선고를 내릴 것을 요구하고 닉슨에게 책을 헌정한다.
“세상은 불행히도 현실이고 나는 불행히도 보르헤스다.” 보르헤스의 쓰기/읽기가 자본주의 유럽이 ‘미국의 도전’ 앞에서 식민적 조건에 놓이기 시작하던 시점에 이 지역에서 특히 우호적인 반응을 얻었다는 것은 흥미롭다.
- 67~69쪽
저자는 19세기 아르헨티나의 작가이자 정치가였던 도밍고 파우스티노 사르미엔토를 프로스페로의 수하가 된 아리엘의 전형으로 꼽는다. 그 반대 지점에는 인종주의를 비롯한 식민제국의 모든 것과 싸우면서 메스티사헤를 대변한 호세 마르티가 있다.
라틴아메리카의 아리엘들이 호세 마르티를 따랐으면 좋았으련만, 일군의 유명한 작가들은 사르미엔토의 길을 택했다. 저자의 견해를 빌면, 그 중에는 보르헤스처럼 복잡한 개성을 지니고 있으면서 사르미엔토의 길에 들어섰다가 분열적이 돼버린 사람도 있고, 좌파였다가 쿠바 혁명의 대의를 등지고 반카스트로 전선에 선 멕시코의 카를로스 푸엔테스 같은 사람도 있다. 애당초 <칼리반>을 쓰게 된 것이 푸엔테스 같은 사람에게 느낀 배반감 때문이었다고 써놨을 정도다.
1961년 미국이 플라야히론의 피그만을 침공했을 때 선언문을 통해 쿠바가 제국주의 용병들에 패했으면 하는 바람을 나타낸 유일한 라틴아메리카 작가 집단은 보르헤스를 필두로 한 일군의 아르헨티나 작가였다. 10년 후인 1971년 혁명 행동을 비방하면서 쿠바와 결별한 대륙의 유일한 국가 단위 작가 집단이 멕시코 마피아였다.
이 점에 비추어 볼 때 카를로스 푸엔테스의 의도는 좀 더 명확하게 이해된다. 푸엔테스에 따르면 문명의 편에 선다는 것은 “피착취자들을 옹호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사르미엔토는 이 말이 실제로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 똑똑히 보여주었다. 푸엔테스는 새로운 과두 지배 계급의 맹목적인 종복이자 아메리카 대중의 사나운 적으로 전락한다. 과두 지배 계급은 제국주의적 이해의 단순한 중개자로 밝혀지고, 푸엔테스 같은 작가는 이제 두 주인을 섬겨야 한다.
- 72~73쪽
두 명의 생존 작가에 대해서 몇마디 하고 싶다. 한 사람은 보르헤스이고 다른 한 사람은 카를로스 푸엔테스다.
보르헤스가 받은 많은 삶과 훈장이 그의 정치적 행보와 모종의 관계가 있다고 생각한 적은 결코 없다는 점을 분명하게 밝힌다. 반대로 나는 언제나 반어적 유머를 구사하는 그가 뛰어난 재능을 지닌 정직하고 소박한 사람이며, 젊은 시절 10월 혁명을 찬양하게 하고 후에 스페인 공화국을 옹호하고 나치의 반유대주의에 반대하게 했던 그의 정치적 나침반은 다른 많은 아르헨티나인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페론이 집권하면서 파괴됐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 사실을 확인할 기회가 있었다. 그의 발언은 횡설수설이 되기에 이르렀다. 게다가 그는 자신의 생각과 반대로 무정부주의와 보수주의 사이를 오가는 정치적 성향의 작가다.
푸엔테스에 대한 비판은 단지 그의 작품만을 고려한 것은 아니었다. 한때 가까운 동지였다는 사실 외에 오늘날 가장 중요한 라틴아메리카 소설가의 하나인 그가 <문도 누에보>의 주요 협력자이자 이데올로그의 한 사람이며 1971년 피델에게 발송된 두 통의 서한의 서명자이자 쿠바에 반대하는 부당한 노선의 작가라는 사실 역시 고려했다. 이것이 내가 당시에 그의 견해를 극단적으로 반박하게 된 배경이다.
- 131~132쪽
보르헤스와 가르시아 마르케스를 비롯해서 남미 작가들이 세계에서 얻은 명성은 어마어마하다. 서구의 충직한 아리엘이 됐기 때문에 명성을 얻은 것일까? 혹은 그저 그들은 작품을 썼는데 서구가 라틴아메리카에서 이색적이면서도 재주 많은 아리엘들을 발견하고 열광했던 것일까?
어찌 됐든 라틴아메리카의 작가들은 스페인어 혹은 포르투갈어로 이야기한다. 지배자들과 분리될 수 없는 피지배자, 프로스페로에게 배운 언어로 이야기를 해야만 하는 칼리반. 그래서 라틴아메리카의 정체성은 유럽과 아메리카와 아프리카가 섞여 있는 메스티사헤가 될 수밖에 없다.
푸엔테스의 <의지와 운명>을 지금 읽고 있는데, 일단 앞부분은 매우 재미있다. <칼리반>의 저자에겐 푸엔테스가 배신자일지 몰라도 작품은 기대가 된다.
뒷부분은 라틴아메리카를 옥죄는 신식민주의에 대한 비판. 갈레아노가 <수탈된 대지>에서 지적한 것과 같은 맥락에서 저자는 라틴아메리카가 '저개발당했다'는 시각을 드러내 보인다.
우리는 언제 어떻게 ‘제3세계’라는 표현이 등장했는지 알고 있다. 이 용어를 창안한 프랑스 인구 통계학자 알프레드 소비가 1971년 아바나에서 나에게 밝힌 바에 따르면 1952년 주간지 <프랑스 옵세르바퇴르> 기고에서 처음으로 이 용어를 사용했다고 한다.
이 글에서 그는 세계를 18세기 프랑스의 사회계급과 비교했다. 제1세계는 귀족 계급에 상응했다. 제2세계는 고위 성직자에 상응했다. 아직 스탈린이 살아있을 당시의 소련과 당시의 이른바 유럽 사회주의 진영의 다른 국가들이 여기에 해당했다. 그리고 제3세계는 이미 저개발국으로 알려진 빈국들이었다.
이 표현은 빠르게 행운을 누렸다. 통치자들과 연구자들, 시인들은 그 이미지와 명칭을 열렬히 받아들였다. 제3세계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각양각색의 사람들에게 하나의 취향이 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제3세계는 저개발의 족쇄를 끊지 못하고 계속 제1세계에 수탈당했으며 갈수록 빈곤과 침체의 늪에 빠졌고 이 세계를 고작 지적인 심심풀이 대상으로 여긴 많은 사람의 관심을 잃었다.
- 142~143쪽
파라과이의 에세이스트 티시 에스코바르는 이렇게 설파한다. “모더니티 프로젝트는 피고석에 서 있다. 우리는 피나는 노력을 쏟고도 아직 채 근대인이 되지 못했는데 이제는 탈근대인이 되어야 한다.”
세계의 국제화로 인해 우리가 포스트모더니티에 계속 무관심할 수는 없는 것이 현실이다. 클라우디오 귀옌의 말을 빌리면 “좋든 싫든 우리가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라벨을 붙여온 예술적 지적 현실”이 카를로스 푸엔테스,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 마누엘 무히카 라이네스, 호르헤 이바르구엔고이티아,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 같은 라틴아메리카 작가들의 작품을 포함하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것은 다국적 자본주의 혹은 후기자본주의와 무관하지 않으며 그럴 수도 없기 때문이다. 부정적인 방식일지언정 우리와 숙명적으로 관련되어 있는 것이다.
- 160쪽
탈식민화가 대부분 금세기 또 다른 대실패로 귀결됐다는 점을 덧붙여야 한다. 왜냐하면 상당수 국가가 식민주의로 인해 다시 식민화돼야 했기 때문이다. 전통적인 식민지는 거의 존재하지 않지만 전통적이지 않은 식민지, 즉 신식민지는 넘치는 제국주의 시대다. 결과적으로 우리의 신식민 시대에 대해 말하면서 탈식민시대라고 부르는 것은 프로스페로의 또 다른 엄청난 거짓말을, 아마도 무의식적으로 받아들인다는 것을 의미한다 - 193쪽
스페인에서는 난민들을 지칭하기 위해 경멸적인 의미의 수다카 sudacas라는 단어가 생겨났다. 북쪽의 쇼비니스트들은 수다카들을 게토나 성벽 밖에 계속 머물게 할 수 없게 되자 이제 포그롬을 획책하거나 자행한다.
포그롬은 용이하지 않다. 수다카들의 인파가 펄펄 끓는 용암의 물결처럼 흘러들기 때문이다. 이 물결은 북쪽 자신이 발전하기 위해 저개발시켰고 지금도 저개발시키고 있는 국가의 사람들에게 야기한 치욕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북쪽이 마침내 모든 영역에서 승자로 간주되고 후쿠야마 같은 궁정의 고문들이 역사의 악몽이 종언을 고했다고 호들갑스럽게 귓속말을 속삭이는 지금, 그들의 성곽은 다른 악몽이 아니라 남쪽에서 오는, 과거가 아니라 남쪽에서 오는 시끌벅적한 다채색의 육체적 존재들에 둘러싸여 있다.
- 198~199쪽
만일 북쪽의 위대한 주인들이 남쪽을 더 착취하는 대신 북쪽에서 생산되는 격조 높은 원료로 남쪽의 조악한 원자재를 대체하거나 이기적인 보호주의를 강화함으로써 남쪽 없이 살아가기로 결정한다면, 그때는 남쪽에서 기아와 질병, 무지, 절망, 광신이 증가하고 무균의 북쪽을 향해 행진하는 남쪽 사람들의 물결은 기하급수적으로 불어날 것이다.
그렇다면 칼리반과 미란다의 불가피한 결합에서 생겨난 후손들, 명료한 통찰력과 선의를 가진 남쪽과 북쪽의 수많은 사람이 상상력과 용기와 힘을 동원해 편견과 증오, 분파주의, 탐욕 어리석음을 강제로라도 쓰러뜨려야 하지 않겠는가. 인류 역시 하나의 생태계이므로 남도 북도 분리돼서는 살아남을 수 없을 것이다.
4반세기 전에 C. L. R. 제임스는 이렇게 썼다. “만일 대지의 저주받은 사람들이 자신의 과거를 깨닫지 못하고 미래의 자신에게 부과될 책임을 인식하지도 못한다면 지구상의 모든 것은 저주받을 것이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다.”
- 199~200쪽
우리의 유일한 선택은 그리스인들이 ‘아나그로니시스’라고 불렸던 것과 유사한 진정한 발견을 통해 그 끔찍한 시작을 완성하는, 그리고 용서하는 것이다.
진정한 발견이란 “물결치는 각양각색의” 복합적 인간 존재의 발견을 말한다. 남자인 동시에 여자인, 범 성적인 완전한 인간 존재. 황인종이고 흑인이며 붉은 피부의 백인이고 메스티소인 존재. 소비자이기 이전에 생산자(창조자). 그의 중심은 동시에 그의 주변이어서 동서도 남북도 없이 ‘유일한 진짜 조국인 인류’(호세 마르티)의 거주자.
극복할 수 없을 것처럼 보이는 사회현실의 도전 앞에서 상상력에 대한 믿음, 본질적으로 시적인 그 힘을 내세우자. 그렇게 우리는 위협받는 미래의 집에 들어갈 준비를 할 수 있을 것이다. 비록 그 집이 아직 월터 페이퍼가 바랐던 <아름다운 집>은 아닐지라도 우리는 시간과 희망으로 지은 그 집에 들어갈 준비를 해야 한다.
개인적으로 내가 만나 사랑했던 아리엘들 중에서 가장 칼리반적인 인물인 에르네스토 체 게바라 같은 인물들의 삶과 죽음은 바로 그 집을 짓는 데 바쳐졌다.
- 202~20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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