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라크 전쟁 정보 조작의혹을 놓고 토니 블레어 영국 총리와 BBC 방송 사이의 대결이 확대될 조짐을 보이고 있다. '공영방송의 대명사'인 BBC와 총리실 간의 싸움은 영국의 이라크전 참전 정당성 문제는 물론, 언론 자유라는 측면까지 맞물리면서 정치적인 이슈로 비화하고 있다.
BBC 이사회는 영국 정부의 이라크전 정보 조작 의혹을 제기한 뉴스 제작진과 그레그 다이크 현 사장의 보도제작 방침을 지지한다는 입장을 정리했다고 영국의 파이낸셜타임스(FT)가 6일 보도했다. 개빈 데이비스 회장은 "이사회는 기자들과 뉴스 제작진이 문제의 기사를 보도하는 과정에서 공정성과 정확성이라는 원칙을 지켰다는 사실을 만족스럽게 생각한다"면서 "공익에 반(反)하는 외압을 거부한다"는 입장을 분명히 밝혔다. BBC는 지난달 25일 라디오 방송에서 익명의 정부 관계자를 인용, "이라크 관련 보고서에 정부가 의도적으로 `이라크는 대량살상무기를 45분 안에 발사할 수 있다'는 문구를 삽입했다"고 보도했었다. 보도가 나올 무렵 블레어 총리는 전쟁 지지여론을 높이기 위해 이라크 위협을 과장했다는 이유로 공격받고 있었다. 발끈한 총리실은 "보도의 근거를 밝히라"면서 BBC에 사과를 요구했다. 그러나 BBC는 사과 대신 블레어 총리의 이라크전 참전결정을 비판해온 로빈 쿡 전 외무장관의 인터뷰를 내보내며 맞불을 놓았다. 리처드 샘브룩 보도국장은 "보도내용의 근거는 추후 밝히겠지만 총리실의 압력에는 굴복하지 않겠다"면서 '외압'을 여론의 이슈로 부각시켰다.
이사회가 현 경영진을 지지하기로 결정함으로써, BBC는 공영방송으로서의 대의를 내세워 정부와의 정면대결도 불사할 것으로 예상된다. 다이크 사장은 지난 4월말 미국 방송사들의 이라크전 `편파보도'를 강하게 비판해 세계 언론의 주목을 받았었다. 그는 총리실과의 싸움에서도 "정부의 위협은 방송의 독립성과 공정성을 훼손할 우려가 있다"면서 강경한 입장을 고수했다.
이런 자신감은 국민들의 신뢰와 지지에 바탕을 두고 있다. BBC는 공영방송의 정신을 규정한 `공익헌장'을 두고 보도 기준으로 삼고 있는데, 이라크전에서도 시종 냉정함을 잃지 않는 보도로 "역시 BBC"라는 소리를 들었다. 미국의 언론들이 국가주의와 선정성에 휘둘린 보도로 지탄받았던 것과 대비되는 평가였다. BBC는 2007년부터 시청료 징수가 불가능하게 되기 때문에 정부와의 원만한 관계를 통해 의회에서 기금지원법안 통과를 추진해야 하는 입장이다. 총리실은 일단 이번 보도와 관련해서 BBC에 재정상의 압력을 가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입장을 밝혔지만, 양측의 감정 싸움이 쉽게 진화되지는 않을 것으로 보여 주목된다.
(그런데 좀 우스운 얘기지만-- 이라크전 때 암만에서 호텔방에 앉아 테레비를 보는데, 주로 틀어놓는 것이 CNN과 BBC, 알자지라였다. 알자지라는 어차피 아랍어 방송이라서 못 알아들으니까 간간히 채널 돌려 '분위기'만 구경하고 주로 CNN을 봤다. 문제는, BBC 보도보다 CNN 보도가 훨씬 더 재미있다는 거다. 사실 CNN은 미국의 폭스뉴스 같은 것에 비하면 그래도 괜찮은 방송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1991년 걸프전 때 바그다드발 뉴스로 성가를 높였던 CNN이 이상하게도 이번 전쟁에서는 그닥 재미를 보지 못했다. 실제로 방송을 비교해가면서 보면, CNN은 스탠딩 리포트가 초반에 거의 없었다. 한마디로 현장 접근이 안 됐다는 얘기다. 반면 BBC는 접근성 면에서는 훨씬 나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무나 점잖게' 보도를 한 탓인지, 전쟁의 긴박감이 전혀 안 느껴졌다는 얘기다. 선정성은 물론 지양해야 하지만 전쟁이라는 상황을, 현장의 분위기를 긴장감 있게 전해주지 못하는 이유가 대체 뭘까. 공영방송이다보니? 선정성을 너무나 경계한 결과? 솔직히, '저런 식으로 보도를 하면 누가 BBC를 보겠누' 하는 생각이 들 수 밖에 없었다. 물론 나는 (웹으로 보는 거지만) BBC 기사를 아주 좋아한다. 실은 대다수 국제부 기자들이 BBC 기사를 가장 많이 참고한다. 왜냐? 이유는 단순하다. '정리가 잘 되어 있기' 때문이다. 사실 국제부 기자로서, 웬만한 머리와 의지만 있으면 외신에 뜨는 내용의 행간을 읽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다--물론 개중에는 무뇌아 같은 기자들도 있긴 하지만--. BBC를 열심히 보는 것은 공정성 때문 만은 아니다. 신뢰도가 높다는 점도 무시할 수 없는 요인이기는 하지만, 그보다는 BBC가 갖고 있는 '축적된 역사'가 외신기자들을 끌어들인다는 편이 정확할 것이다. 무슨 얘기냐면, 일례로 국제형사재판소에 관한 뉴스라 치자. 다른 언론들은 이 뉴스에 대한 팩트들을 시간 순서대로 전달한다. BBC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싸이트가 워낙 잘 되어 있어서, 국제형사재판소를 둘러싼 논쟁과 일지, 설립 과정, 구조, Q & A를 한눈에 볼 수 있다. 우리나라 언론들은 '각을 세운' 보도보다는 아직까지도 '지식 전달' 류의 보도를 선호한다. 그건 언론의 문제만은 아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국제뉴스에 진실로 흥미가 적기 때문에, 계속해서 용어설명 같은 것을 해주지 않으면 '기사가 어렵다'는 얘기를 듣는다. 우리나라 신문들의 국제뉴스를 비난하는 사람들을 많이 봤는데, 그 사람들 진짜로 국제뉴스 안 본다. 내게도 "왜 미국 언론만을 인용해서 보도하느냐"고 묻는 사람들이 있는데, 웃기는 짜장이다. 국제뉴스 정말 안 보는 사람들이 그런 얘기를 한다. 여튼 BBC가 축적해 놓은 정보의 양은 엄청나다. 외국 대형 언론사들 중에서도 해외 특파원 숫자가 가장 많은 축에 끼일 것이다. 국제부 기자로서, 우리나라 신문에서 일한다는 것이 가장 아쉬운 것은 그런 부분이다. 이 문제는, 우리나라 어느 신문사에서 일하고 있느냐의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 회사가 신문사 중에서 마이너인 탓도 있지만--그건 정말 미미한 요인이고, 우리나라 독자들의 세계화 수준이 워낙 얕다. 그게 현실이다. 한마디로 말하면 우리는 '식민지를 경영해본' 역사가 없기 때문에 일본에 비해서도 글로벌한 인식이 대단히 적다. BBC의 경쟁력은 특히 국제뉴스 부문에 있다는 말들을 많이 한다. 이건 식민지와 절대적으로 관계가 있다. 자기네 식민지였던 지역의 뉴스에는 절대적으로 강하기 때문이다. AFP가 아프리카 뉴스에 강한 것도 같은 이유에서다. 이제와서 우리나라는 왜 식민지 없었느냐고 탓하자는 건 아니고, 그냥 그렇다는 얘기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