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사람이 누구인지 아시겠어요?
미국 공화당 대선후보 존 매케인 상원의원(72)이랍니다. 젊은 시절 모습이예요.
본명 존 시드니 매케인 3세. (도대체 3대가 같은 이름을 쓰는 이유가 멀까;;)
매케인이 4일 밤 공화당 대통령 후보직을 수락하는 연설을 했습니다. 이로써 나흘 간의 전당대회는 끝났고요. 민주·공화 양당 대통령·부통령 후보 공식 지명되고 전당대회를 통해 다들 출사표를 던졌으니, 이제 11월4일 대선 향한 대장정이 시작된 셈입니다. 매케인은 미네소타주 세인트폴에서 열린 전당대회 마지막날 행사에서 “겸손한 마음으로 후보 지명 받아들인다”고 밝혔습니다.
"역시 이단아"
이날 매케인 연설은 ‘매버릭’ 즉 이단아로서의 진면목을 다시 보여줬다는 평입니다. 좀 뜻밖인데요... 캠페인 기간 동안 점점 더 우경화되는 줄로만 알았는데...
그동안 보수파들 눈치 많이 보는 듯했던 매케인이 후보 자격 당당히 거머쥐면서 다시 원래의 비판적인 태도로 돌아갔다고 뉴욕타임스는 분석했습니다(혹시 뉴욕타임스의 희망사항이 반영된 것일까;;). 매케인은 “노후하고 돈만 펑펑 쓰면서 아무것도 하지는 않는, 나라보다는 자기 이익만을 생각하는 사람들과는 다른 길을 걷겠다”면서 공화당 기득권층과의 차별화를 노렸다고 하는군요.
“개혁을 위해서라면 누구와도 손잡을 수 있다”, 그러니 민주 공화 양당이 서로 물어뜯는 싸움은 그만하자면서 당을 넘어선 협력을 약속하고, 오바마와 마찬가지로 ‘변화’를 촉구했습니다. 부통령 후보로 페일린을 선택한 것도 주류와는 다른 사람이기 때문이었다고 강조했습니다.
매케인에게는 항상 ‘베트남전의 영웅’, ‘매버릭(이단아)’이라는 설명이 따라붙습니다.
매케인은 1958년 메릴랜드주 애너폴리스 해군사관학교를 졸업했지요. 그리고 나서 미 해군이 자랑하는 핵심 인력인 항모 소속 전투기 전투기 조종사가 됐습니다.
베트남전에 참전한 그는 포리스털 항모 부대에서 근무하며 67년 북베트남을 폭격하러 나갔다가 전투기가 격추되는 바람에 부상을 입고 포로로 붙잡혔습니다. 그의 이름이 널리 알려진 것은 “부하들부터 풀어달라”며 북베트남군의 석방제의를 거절한 사실이 알려지면서부터지요.
5년 반 동안의 포로생활 끝에 73년3월 드디어 풀려난 ‘매케인의 귀환’은 중년층 이상의 미국인들에겐 지금도 생생히 기억되는 당대의 뉴스였다고 합니다. 위의 사진은, 그 때 매케인이 미국으로 돌아와 한 달 뒤 언론 인터뷰 하는 모습이래요.
격추 당시의 부상과 포로 시절 받았던 고문 때문에 매케인은 지금도 팔을 마음대로 움직일 수 없다고 합니다. 그래서 정치인들의 전형적인 포즈인 ‘손을 높이 들어 환호에 답하는 모습’을 보여줄 수 없다고 하네요.
부친 존 매케인 주니어와 조부 존 매케인 시니어는 모두 해군 4성 장군이었습니다. 특히 아버지는 아들이 참전했던 베트남전을 직접 지휘했던 인물...
그런데 매케인이 선대들과 달리 높이 진급하지 못한 것은 매버릭 근성을 어릴 적부터 감추지 못했기 때문이었다는군요. 매케인은 2005년 TV다큐로도 만들어졌던 자서전 <내 아버지의 신념>(1999)에서 “사관학교 시절부터 동료들에게 인기가 많았지만 상명하복을 거부하고 상관들에 자주 대들었다”고 회고한 바 있습니다.
매케인은 아버지가 근무하던 파나마 운하 코코솔로 해군기지에서 태어났습니다. 두 동생과 함께 카리브해와 아시아·태평양의 해군기지를 떠돌며 자랐답니다. 사관학교 입학 전까지 20여개 학교를 돌며 초·중등 교육을 받았던 그는 ‘고향이 없는 사람’이었던 거지요.
81년 군복을 벗은 매케인은 그래서 부인 신디의 고향인 애리조나에 터를 잡았습니다. 그리고 정계에 발을 디뎠는데, 맥주유통회사 헨슬리 상속녀인 신디의 지원 덕에 단번에 하원에 입성했습니다. 82년부터 2차례 하원의원을 지낸 뒤 1986년 상원의원이 됐고요. 이후 내리 4선째입니다.(하원은 임기가 2년, 상원은 6년이예요)
“나는 당을 위해 일하지 않는다.”
4일 전당대회 후보지명 수락 연설에서 보여줬듯, 매케인은 자기가 속한 공화당을 신랄하게 비판하고 ‘적과 동지를 가리지 않는’ 돌출발언을 많이 합니다. 이민법, 동성결혼 등 여러 사안에 대해 공화당 주류 보수파와 시각을 달리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지요.
하지만 정계 진출 이래로 그가 언제나 ‘개혁파’였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1989년에는 저축대부조합장 찰스 키팅으로부터 불법자금을 받은 다섯 명의 상원의원들, 이른바 ‘키팅 파이브(5)’의 하나로 지목돼 당 윤리위원회 특별조사를 받았습니다. 다행히 매케인은 면죄부를 받았으나 정치생명에 큰 타격을 받았습니다. 매케인은 그 이후로 정치자금법 개정과 정치윤리 살리기에 앞장서며 개혁파로 거듭났다는 스토리...
2002년 통과시킨 ‘매케인-페인골드법’은 “정치자금 경로를 너무 투명하게 해 매케인에게 선거자금이 안 모인다”는 얘기가 돌았을 정도였습니다.
매케인은 2000년에도 당내 대선후보 경선에 나왔었지만 보수파들에 밉보여 탈락했습니다. 저렇게 쓴소리들을 해대니...
뉴욕타임스는 매케인이 이번 전당대회에서 본모습을 보여줬다고 평했지만, 보수와 개혁 정책 사이를 왔다갔다(실제 그의 정책들은 '진보적'인 것하고는 거리가 멀다는군요)한다는 비판도 많이 받습니다. 화를 잘 내는 불같은 성격도 자주 뉴스에 오르내리지요. 그의 약점은 'temper'에 있다...는 기사도 읽은 적이 있습니다. 번역하면 '매케인은 그노무 승질머리가 문제야'가 되겠지요. ^^
부인 신디는 조강지처를 버리고 80년 재혼한 아내인데, 이것도 보수파들이 껄끄럽게 여기는 부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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