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19세기의 샤카 줄루(남아공)
줄루족에게는 살아 있을 떼 이미 유명한 전설이 된 지도자가 있었다. 여러 갈래로 갈라진 줄루족을 통합함으로써 줄루 민족의 창시자로 여겨지게 된 샤카 줄루(Shaka Zulu. 약 1786~1828년)다. 사생아로 태어났고 별로 중요하지 않은 종족 출신이었음에도 그는 새로운 전투 방법을 도입해 젊은 시절 일찌감치 두각을 나타냈다. 1815년부터는 단순한 군사지도자가 아니라 모든 줄루족의 왕이 되었다.
그는 거대한 줄루 왕국을 건설한다는 목표를 위해 학살도 서슴지 않았다. 하지만 단 한 번도 유럽 사람들에 맞선 적도 없이, 샤카 줄루는 1828년 이복형제 딩간의 칼에 찔려 죽었다.
샤카 줄루의 조카인 줄루족의 마지막 왕 케츠와요는 유럽 세력에 맞서 드물게 군사적 승리를 얻은 사람이다. 샤카 줄루 이후로 50년이 지나서 줄루족과 영국 사람들은 여러 가지 일로 자주 마주치게 되었다. 처음의 적대감은 어느 정도 서로를 존중하는 자세로 바뀌었다.
하지만 다이아몬드가 발견되고 나서부터 줄루족에 대한 영국의 태도가 완전히 바뀌었다. 이때까지는 네덜란드계 백인에 맞서 줄루족을 지지하더니 트란스발 공화국을 합병한 이후부터는 이 지역에서 영국이 지배권을 차지하는 데 줄루족이 마지막 남은 방해가 되었다. 케츠와요 왕이 1884년에 죽었을 때 왕국은 샤카 줄루가 처음 시작했던 시절의 규모로 줄어들었다. 1897년에 줄루 땅은 완전히 영국 식민지로 합병되었다.
장 베델 보카사와 이디 아민은 인간적인 권력 남용의 극단적인 예다. 레오폴드 생고르와 줄리어스 니에레레는 그와 대비되는 인물들이고, 토마 상카라는 오류가 없지는 않았지만 많은 사람들을 위한 더 나은 정의를 찾는 과정에서 정직한 모습을 보여준 인물이다.
▶ 루뭄바와 모부투(콩고민주공화국)
중부 아프리카 콩고의 파트리스 루뭄바(Patrice Lumumba, 1925-1961년)는 자유 콩고의 통합이라는 이념을 가졌다. 반면 경쟁자인 죠케프 카사부부(Joseph Kasavubu)는 바콩고족을, 무와즈 촘베 (Moise Tschombe)는 지하자원이 풍부한 카탕가 지방만을 챙겼다.
1959년 콩고의 소요는 점점 심각해졌다. 식민정부는 처음으로 아프리카 사람들과 협상 테이블에 앉았다. 1960년 5월에 투표를 하고 6월 말에 독립을 인정해주기로 합의를 보았다. 선거에서 루뭄바가 승리해 콩고의 초대 총리가 되고, 카사부부가 대통령이, 촘베는 겨우 카탕가의 주지사가 되었는데 그 때문에 그는 몹시 화가 났다.
새 정부는 처음부터 엄청난 어려움에 직면하였다. 폭동 기미가 보이자 루뭄바는 아직 남아 있던 약 1100명의 벨기에 장교들을 모조리 해임하였다. 이렇게 생긴 빈자리는 경험 없는 사람들로 서둘러 채워졌다. 참모총장에는 루뭄바의 개인 비서로 당시 25살이던 조제프 모부투(Joseph Mabutu, 1930-1997년)가 임명되었다.
7월에 촘베는 이런 상황을 이용하여 카탕가 주의 독립을 선언하였다. 루뭄바는 유엔에 원조를 요청하였고, 유엔은 군대를 파견하였다. 루뭄바는 소련에도 군사 원조를 요청하였다. 벨기에 주재 미국 대사는 워싱턴에 이렇게 보고하였다. “루뭄바는 콩고와 아프리카 전체에서 우리의 본질적인 이해를 위험하게 하고 있다…· 루뭄바 정권을 해체하고 또 다른 신하를 찾아내야 한다.”
모부투가 미국의 ‘또 다른 신하’가 되었다. 1960년 9월 14일에 그는 스스로 임시 정부의 수반이 되고 소련 대사를 추방했다. 루뭄바는 연금되었다. 11월 말에 루뭄바는 탈출에 성공하였지만 며칠 안에 두 명의 심복과 함께 모부투의 병사들에게 붙잡혔다. 전 세계로 전해진 사진들은 루뭄바가 모부투 앞에서 머리를 쥐어뜯기고 매를 맞는 모습을 보여준다. 모부투는 자신의 옛 상관을 카탕가에 있는 그의 철천지원수인 촘베에게 보냈다. 1961년 1월 루뭄바와 두 심복은 끔찍한 고문 끝에 벨기에 장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총살당하였다. 그들의 시신은 발견되지 않았다.
그 후 모부투는 미국의 후원을 받아 군대를 조직하여 권력을 잡은 뒤 1965년 카사부부와 촘베를 제거하고 종신 독재자가 되었다. 뒤이어 그는 루뭄바를 국민 영웅으로 선포하였다. 1967년 나라 이름을 자이르로 바꾸고 자신은 ‘모부투 세세 세코 은쿠쿠 은렌두 와 자 방가(Mobutu Sese Seko Nkuku Ngbendu wa za Banga)’ 라고 고쳤다. 그는 다음 30년 동안 아프리카에서 가장 부유하고 가장 부패한 사람, 가장 고약한 폭군의 한 사람이었다. 모부투는 1997년 9월 모로코 망명 중에 사망했다.
▶ 은크루마와 제이제이(가나)
콰메 은크루마(Kwame Nkrumah, 1909-1972년)는 1909년 가나의 남서부의 작은 마을에서 금세공사 아버지와 농부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1945년에 런던으로 건너가서 2년 동안 통합된 강한 아프리카를 지향한다는 범아프리카 이념을 위해 일하였다.
1952년 영국은 황금해안에 최초의 정부를 허용하였다. 은크루마가 이 정부의 총리가 되었고 대부분의 장관은 아프리카인들이었다. 1957년에 유혈 사태 없이 정권 이양이 이루어졌다. 가나는 훌륭하게 경영되는 카카오 농장들과 풍부한 황금과 다이아몬드 광산 덕분에 상당히 안정된 국가로 여겨졌다.
대부분의 가나 사람들, 특히 가난한 사람들에게 은크루마는 영웅이었다. 그는 지치지 않고 수많은 여행을 하면서 통합된 아프리카를 위하여 사람들을 설득하였다. 그 첫걸음으로 기니와 말리와 더불어 최초의 경제 공동체를 만들었다. 하지만 가나의 노력은 식민정권에서 해방된 모든 나라에서 공감을 얻지는 못했다.
물가가 오르고 생활수준이 떨어지자 은크루마에 대한 비판의 소리가 커졌다. 폭탄 공격과 태업이 나타나자 은크루마는 강경한 입장으로 돌아 섰고, 점점 더 독재자가 되어 자신이 소속된 정당만 허용하였다. 1966년 은크루마가 외국에 있을 때 군사 쿠데타가 일어났다. 그는 1972년에 기니에서 망명 중에 죽었다.
그 후 20년 동안은 앞선 정권을 뒤집어엎고 권력을 잡는 정권들이 연이어 등장했다. 나라는 점점 곤두박질쳤다. 1981년의 마지막 날에 젊은 공군 소위 제리 존 롤링스(Jerry John Rawlings, 1947년~)가 두 번이나 군사 쿠데타를 일으킨 끝에 권력을 잡았다. 그는 의회를 해산하고 모든 정당을 금지하였다. 나라 전체에 급격한 절약 정책을 명령하고 억지로지만 어쨌든 지속적으로 국제통화기금과 세계은행의 여러 조건을 이행하였다. 이런 조치가 효과를 발휘하였다. 마침내 생활수준이 올라가기 시작하였다. 사치는 아니라도 어쨌든 이전의 곤궁은 사라졌다.
1992년에 두 번째로 민주주의로 시행하려는 시도가 이루어졌다. 가나에서는 그냥 제이제이(J.J)라고 불리는 롤링스는 정당을 설립하고 조심스럽게 준비하여 선거에 나섰다. 외국 개입이 없이 모든 가나 사람이 선거가 자기들의 일이라고 여겼다. 군복을 벗은 시민 롤링스는 자유선거에서 58퍼센트의 표를 얻어 대통령이 되었다. 이제부터 그는 모든 민주적 규칙을 지켰으며, 헌법에 정해진 두 번의 임기를 끝내고 다시는 취임하지 않았다. 2001년 존 아제쿰 쿠푸오르(John Agyekum Kufuor, 1938년~)가 새 대통령 이 됐다.
▶ 이디 아민과 무세베니(우간다)
이디 아민(Idi Amin, 1925-2003년)은 1925년 우간다 북서부 소수 민족 카콰(Kakwa)족으로 태어났다. 젊은 시절에는 ‘동아프리카 라이플’이라는 영국 식민지 군대에서 근무하였다. 1962년 영국에서 독립을 얻었을 때 우간다는 2년 전 루뭄바의 콩고처럼 다양한 종족들이 뒤섞여 폭발 직전에 있었다. 영국은 마지막까지 일부러 이들이 서로 대립하게 만들었다. ‘간접 통치’ 정책에 따라 가장 큰 종족인 간다(Ganda)족을 관리로 삼아 다른 종족보다 우대하였다. 최초의 독립정부는 간다족인 카바카(왕) 무테사(Kabaka Mutesa) 1세를 대통령으로, 간다족을 미워하는 랑고족 정치인 밀턴 오보테(Milton Obote, 1924년-)를 총리로 삼았다.
오보테와 아민의 병사들은 시민들을 끔찍하게 학살하였다. 오보테는 이슬람교도였지만 영국과 이스라엘의 후원을 얻었다. 이스라엘은 우간다를 거점으로 삼고 수단에서 정치적 불안을 일으키려 하였다. 1971년 오보테가 외국 여행을 하고 있을 때 아민이 오보테의 심복들을 죽인 다음 군사 정권의 수반이 되었다. 영국 정부는 우간다 쿠데타에 개입한 것을 드러내지 않기 위해서 케냐와 이스라엘을 부추겨 아민을 국가수반으로 인정하게 한 다음 영국도 그를 국제적으로 인정해주었다.
아민은 곧 이슬람 세계와의 결속을 선언, 영국과 이스라엘 측을 깜짝 놀라게 만들었다. 리비아의 가다피가 아민을 설득하여 주민의 6퍼센트만이 이슬람교도인 우간다를 이슬람 국가로 만들었다. 사우디아라비아의 파이잘 왕은 우간다로 여행하여 전국적으로 이슬람 사원 건축 비용으로 수백만 달러를 대주었다.
아랍 세계의 후원을 얻은 아민은 이제 유럽 국가들의 개입을 두려워하지 않고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있게 되었다. 이전의 식민지 주인 누구도 살상행위를 끝내기 위해 손가락 하나 까딱 않고, 그가 권력을 잡도록 도와주었던 영국과 이스라엘은 더욱더 움직이지 않았다. 결국 젊은 요웨리 무세베니 (Yoweri Museveni, 1944년~)의 지휘를 받는 저항 투사들이 줄리어스 니에레레가 통치하던 탄자니아 군대의 도움을 받아 1979년에 우간다에서 아민을 쫓아냈다. 아민은 사우디로 도망쳐서 2003년에 죽을 때까지 재판을 받지 않고 그곳에 살았다.
망명지에서 돌아온 오보테는 1980년 선거 부정을 통해 다시 권좌에 올랐다. 무세베니는 덤불숲으로 돌아가서 오보테의 두 번째 테러 정권에 맞서 6년 동안 게릴라전을 펼쳤다. 오보테는 다시 적어도 30만 명을 죽였다. 1986년 1월 무세베니는 국민저항군과 캄팔라로 진입하여 새 대통령에 취임하였다.
무세베니 정부는 오늘날까지도 독자적인 길을 가려고 노력하는데, 그것은 비난과 인정을 동시에 받는다. 비판자들은 우간다에 여러 정당이 없으므로 실제로는 민주주의가 없다고 말한다. 지지하는 사람들은 독립 이후 처음으로 병원과 학교들이 생겨났으며, 언론 자유가 있고, 지역별로 주민들이 직접 선출하는 위원들로 이루어진 풀뿌리 민주주의 위원회가 있음을 찬양한다. 무세베니는 이것을 ‘아프리카 방식의 민주주의 모델’이라고 말한다.
▶ 레오폴드 셍고르(세네갈)
레오폴드 세다르 셍고르(Léopold Sédar Senghor, 1906-2001년)는 다카르 남쪽 작은 어촌에서 귀족 출신의 부유한 상인 아버지와 유목민인 페울 종족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세네갈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한 다음 스물두 살 때 공부하러 파리로 떠났다. 뒷날 프랑스 대통령이 되는 조르주 퐁피두가 그의 대학 친구다. 1932년 셍고르는 프랑스 국적을 얻고 1935년부터 고교 교사로 일하였다. 2차 대전 때 프랑스군에 입대한 그는 전쟁 중 포로로 불잡혀 독일 포로수용소에서 지냈다. 여기서 독일어를 배우고 시를 쓰기 시작하였다. 석방된 다음 아프리카언어 교수직을 얻었다.
1945~58년 셍고르는 프랑스 국회에서 세네갈을 대표하는 국회의원을 하였다. 1947년에 그는 세네갈에 ‘민주세네갈블록당(HDS)’을 설립하였는데, 처음으로 다양한 종족과 가난한 주민 대표가 여기 모였다. 그 밖에도 그는 새로운 아프리카의 자의식을 주장하는 ‘아프리카 문화전통주의’ 소속 작가로 활동하면서 작품들도 인정을 받게 되었다. 그는 앙드레 지드, 알베르 카뮈, 장 폴 사르트르 등 당대의 프랑스 문인들과 함께 활동하였다.
1958년에 그의 당은 사회주의자와 연합하여 ‘세네갈국민연합’을 이루었다. 독립은 조심스럽게 준비되었고, 1959년 말리와 연방을 형성하였다. 1960년 말리(옛 프랑스령 수단)와 세네갈(가장 큰 강의 이름을 따서 붙인 이름)은 프랑스에서 독립하였다.
세네갈은 그 이후로 독자적인 길을 성공적으로 가고 있다. 셍고르는 1980년까지 대통령을 지냈다. 그의 뒤를 이어 아브드 디우프가 다음 20년 동안 관용과 민주주의 정책을 이어갔다. 세네갈은 아프리카에서 가장 평화로운 나라 중 하나다. 가톨릭교도인 셍고르는 처음부터 주민의 90퍼센트에 달하는 이슬람 교도에 대해 상호 존중의 정책을 펼쳤다. 그러면서도 그는 단 한 번도 아프리카 문화전통주의와 아프리카 사회주의 이념을 굽히지 않았다. 그는 아프리카 사람이 다른 대륙의 문화와 대화를 해야 하지만 그래도 독자적인 길을 찾아내야 한다고 확신하였다. 또한 사회주의 기본이념이 아프리카에는 매우 소중한 것이라 여겼다. 언젠가 그가 말한 것처럼 ‘옛날부터 나눔의 이념이 아프리카의 역사에서 중요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 니에레레(탄자니아)
줄리어스 니에레레(Julius Nyerere, 1922-1999년)는 탄자니아 북서부 자나키족의 족장이다. 셍고르처럼 니에레레도 고등학교를 마치고 교사 교육과 3년 간의 실습을 마친 다음, 장학금을 받아 유럽에서 공부할 수 있었다. 그의 경우는 영국이었다. 니에레레는 1954년 서른두 살의 나이로 탕가니카로 돌아와서 타누당(탕가니카 아프리카 국민 연합)라는 정당을 만들었다. 타누의 이념은 사회주의의 방향에, 다양한 민족이 통합을 이루도록 해주는 독자적인 아프리카 노선을 만드는 것이었다.
1959년과 1960년 민주 선거에서 타누당은 승리를 거뒀다. 1961년 이 나라는 평화적인 정권 이양을 통하여 독립하였다. 니에레레는 1962년에 초대 대통령이 되었다. 잔지바르 섬은 1890년에 영국이 독일 황제과 발트 해의 헬골란트 섬과 맞바꾼 곳인데 이곳도 1963년에 독립하였다. 1년 뒤 탕가니카와 잔지바르가 합쳐져서 니에레레 대통령이 이끄는 탄자니아공화국이 되었다.
니에레레는 아프리카 사회주의 이념을 갖고서 지치지 않고 용감하게 이상(理想)을 위하여 노력해 국제적인 인정을 받았지만 불행하게도 경제적으로는 그다지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새로운 탄자니아에서 가장 중요한 이념은 ‘우야마(Ujamaa, 스와힐리어로 가족공동체’)였다. 120개의 서로 다른 종족들은 농업 공동체인 우야마에서 평화롭게 함께 사는 법을 배우게 되었다. 소련, 중국, 쿠바 등의 후원을 받아서 1967년에 시작된 우야마 농촌개혁은 서방 지식인들 사이에서도 인정을 받았지만 산업화를 소홀히 한 채 농업 개혁만으로 점점 심해지는 빈곤을 막을 수 없었다. 그러자 니에레레는 공개적으로 이것이 잘못되었음을 시인하고 1985년 물러났다. 그는 스스로 물러나서 자신의 오류를 사죄한 최초의 아프리카 지도자다.
대통령으로 재직하는 동안 그는 다른 아프리카 나라의 독립 운동을 후원하였다. 1978~79년 우간다의 독재자 이디 아민을 쫓아내기 위하여 손수 무장하고 우간다의 저항 투사들을 도와주었다. 그후 1990년까지 타누 의장으로 있으면서 1999년 죽을 때까지 평화를 전파하는 일과 난민 문제의 해결을 위해 헌신하였다. 탄자니아는 오늘날까지도 식민 지배자들의 언어가 아니라 아프리카 언어인 스와힐리어를 공식 국어로 선택한 아프리카 유일의 국가이다. 니에레레는 오늘날까지도 많은 사람들이 ‘음왈리무(선생님)’라고부르면서 존경하는 인물이다.
▶ 상카라(부르키나파소)
토마 상카라(Thomas Sankara, 1949-1987년)는 고교를 마친 다음 장교 훈련을 받고 스물일곱 살 때 훈련소 지휘관으로 승진, 젊은 장교 블레즈 콩파오레(Blaise Compaore, 1951년~)와 친구가 되었다. 이들은 함께 ‘공산주의 장교그룹(ROC)’을 결성하였다. 서부 아프리카에 인구 약 800만 명을 가진 보수적인 오버볼타에서 부패에 저항하고 정의를 위해 헌신하려는 모임이었다. 상카라는 1981년에 서른 살의 나이로 정보부 차관에 임명되었다. 그는 각료 회의에 처음 참가하면서 자전거를 타고 갔다. 반년이 지난 다음에 넌더리가 나서 정부 일을 그만두었다. 그후 몇 달 동안 여러 번 폭동이 일어나고 그중 일부는 유혈 사태로 발전하였다. 새로운 군사 지도자는 빈곤층에서 인기가 있던 이 젊은이를 1983년 1월에 잠깐 동안 총리로 임명했다가 5월에 해임하고 가택에 연금시켰다. 상카라를 지지하는 항의 시위가 이어졌다. 1983년 8월 초 콩파오레가 리비아의 후원을 받아 쿠데타를 일으키고 상카라를 오버볼타의 새 대통령으로 임명하였다.
처음부터 상카라는 말과 행동을 일치시켰다. 그의 혁명 1년 만에 오버볼타는 듈라(Dyula)어로 ‘정직한 사람들의 나라’라는 뜻인 부르키나파소로 나라이름을 바꿨다.
1984년에 이 나라 역사에서 처음으로 250만 명의 어린이들이 예방 접종을 받았다. 1985년에 북쪽으로부터 사막이 점점 넓어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하여 1,000만 그루의 나무를 심었다. 1987년에는 전국적인 문맹퇴치 운동이 벌어졌다. 상카라는 작은 나라를 훨씬 넘어 희망의 상징이 되었다. 어떤 사람들은 그를 ‘아프리카의 체 게바라’라고 불렀다.
하지만 콩파오레를 중심으로 한 무리가 1987년 11월에 쿠데타를 일으켰다. 상카라는 부하 12명과 함께 집혀서 같은 날 총살을 당하였다. 살인자들은 그의 시신을 이름도 적지 않은 채 땅에 파묻었다. 콩파오레는 스스로 대통령이 되어 오늘날까지도 그 자리에 있다. 전국적으로 ‘인민 위원회’들이 새 정부에 반대하고 상카라에 대한 유대를 나타내기 위해 무기를 들고 일어섰다. 아프리카 안팎의 수많은 나라들에서 이 젊은 이상주의자의 죽음을 큰 충격으로 받아들였다. 상카라의 소박한 무덤은 해마다 사람들이 새로 칠을 하고 유지하고 있다.
▶ 그라사 마셸과 사모라 마셸(모잠비크)
그라사 마셸(Graca Machel)은 여섯 살 때 집에서 멀리 떨어진 마을에서 교사로 일하던 큰언니에게 맡겨졌다. 제때에 학교에 다닐 유일한 방법이었다. 마셸은 감리교회의 장학금을 받아 고등학교에 다녔고, 미국인 여자 선교사의 도움을 받아 리스본에서 대학에 다닐 장학금을 받았다. 스물여덟 살 때 마셸은 포르투갈 병사들의 잔인한 추적을 받고 있던 저항 세력으로 사모라 마셸(Samora Machel, 1933~1986년)이 이끄는 ‘모잠비크 자유전선(FRELIMO)’에 가입하였다. 포르투갈 비밀경찰을 피해 탄자니아로 도망쳤다가 그곳에서 군사 훈련을 받았다. 그리고 모잠비크로 돌아와 프렐리모 학교에서 난민 어린이들을 가르쳤다. 여기서 그녀는 사모라를 만났다. 사모라의 첫 부인 조시나는 저항 운동에 동참했다가 2년 전에 죽었다.
1974년 포르투갈에서 독재 정권이 무너지고, 식민 지배의 종식을 위한 길이 열렸을 때 마셸은 스물아홉 살 이었다. 그녀는 독립된 모잠비크의 초대 교육부 장관을 맡으라는 제안을 받았다. 1975년에 사모라가 모잠비크의 초대 대통령이 되었다. 몇 달 뒤 사모라와 그라사는 결혼하였다.
1976년 남아공 백인정권의 재정적 지원을 받는 ‘모잠비크 국민저항(RENAMO)’이 새 정권에 맞서 공격을 개시하였다. 다음 여러 해 동안 약 10만 명의 일반인을 희생시킨 공격이었다. 1986년 10월 남아공 상공에서 비행기 사고가 일어나 사모라가 죽었다. 마셸은 개인적인 슬픔에도 불구하고 1989년까지 교육부 장관을 계속했고, 이후에도 어린이와 여성들의 권리를 위한 국제적인 활동에 헌신하였다.
넬슨 만델라가 1990년 석방된 직후 모잠비크를 방문했을 때 그녀는 그를 처음으로 만났다. 2년 뒤에 마셸이 케이프타운에서 명예박사 학위를 받을 때 그들은 다시 만났다. 만델라는 1998년 7월 80회 생일에 마셸과 재혼했다. 마셸은 어린이들을 위한 활동을 지금도 계속하고 있다.
'딸기가 보는 세상 > 잠보! 아프리카' 카테고리의 다른 글
유혈사태 끊이지 않는 나이지리아 (2) | 2010.03.23 |
---|---|
나이지리아 이번엔 유목민들이 정주민 공격 (0) | 2010.03.08 |
배워야 하는 것은 선교사들이다 (0) | 2010.03.04 |
처음 읽는 아프리카의 역사/ 유럽 열강의 아프리카 침략 (0) | 2010.03.02 |
처음 읽는 아프리카의 역사/ 노예제도 (0) | 2010.03.0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