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전 아술리다에게 이 소설 이야기를 했었는데, 제목이 뭐였는지 기억이 잘 안 나서 다시 한번 곰곰이 생각해보고, 그래도 영 기억은 떠오르지 않고...안개 속에 가물거리던 것을 오늘 우연히, 발견하고야 말았다. <아스테리온 집>.
아스테리온 집 (La casa de Asterion) 그리고 여왕은 아들을 낳았는데, 아스테리온이라 불렀다. 내가 오만하다거나, 사람을 싫어한다거나, 혹은 실성했다고 수군거리는 사람들이 있다. 모두 터무니없는 비난이다(때가 되면 응분의 조치를 취할 것이다). 내가 집밖으로 나가지 않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밤이나 낮이나, 사람들은 물론 동물들에게도 문이(무한히 많다) 열려 있다는 것 또한 사실이다. 들어오고 싶으면 들어오라. 이곳에서 여성적인 화려함이나 궁전처럼 휘황찬란한 물건은 찾아볼 수 없을 것이다. 그 대신 적막과 고독을 발견할 것이다. 또한 지상에서는 둘도 없는 집을 발견할 것이다. (이집트에 이와 유사한 집이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그것은 거짓말이다) 집 안에 ‘단 하나의 가구’도 없다는 것은 나를 비방하는 자들조차 인정하는 사실이다. 또 하나 웃기는 거짓말은 나 아스테리온이 수인(囚人)이라는 것이다. 닫힌 문이 하나도 없다고 되풀이 말할까? 자물쇠도 없다고 덧붙여야 할까? 게다가 어느 날 오후, 나는 길거리로 나간 적도 있다. 밤이 되기 전에 돌아온 까닭은 핏기가 없고, 손바닥처럼 밋밋한 평민들의 얼굴이 두려웠기 때문이다. 이미 해는 저물었다. 그러나 한 아이의 애절한 울음과 신도들의 거친 기도로 미루어보건대 모두들 내가 누군지 알고 있었다. 사람들은 일장 연설을 하거나, 도망치거나, 무릎을 꿇었다. 어떤 사람들은 ‘쌍도끼 신전’ 기단 위로 기어올라가고, 어떤 사람들은 돌을 모으고 있었다. 바다 밑으로 숨어버린 사람도 있었다고 생각한다. 어머니가 여왕이라는 게 공연한 일은 아니었다. 나는 평민들과 같을 수 없다. 겸손하기 때문에 그들과 어울리고 싶지만. 사실 나는 유일무이한 존재다. 그리고 한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전수할 수 있는 것에는 관심이 없다. 철학자처럼 나도 글이라는 기예를 통해서는 아무 것도 전달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내 머리는 오로지 큰 것만을 생각할 뿐, 성가시고 자질구레한 사항은 담아두지 못한다. 그래서 이 글자와 저 글자의 차이점을 눈여겨본 적이 없다. 고결한 조바심 때문에 글을 배우지 못했는데, 가끔 후회가 될 때도 있다. 밤과 낮이 너무 길기 때문이다. 물론, 소일거리가 없는 것은 아니다. 나는 적을 향해 돌진하는 양처럼 석조 회랑을 내닫다가 현기증을 느껴 바닥에 꼬꾸라지기도 한다. 저수조 뒤나 복도 모퉁이에 웅크리고 숨거나, 술래잡기를 하기도 한다. 옥상도 있다. 온몸이 피투성이가 될 때까지 뛰어내리며 노는 곳이다. 어느 때라도 잠을 자는 놀이를 할 수도 있다.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눈을 감고 있는 놀이다. (이따금 정말로 잠을 자기도 한다. 눈을 떠보면 하루의 색깔이 바뀌었을 때도 가끔 있다) 그 많은 놀이 가운데 내가 가장 좋아하는 놀이는 다른 아스테리온이 되는 것이다. 그가 나를 찾아와서 집구경을 시켜주고 있다고 상상한다. 나는 정중하게 얘기한다. "이제 우리 지나왔던 네거리로 돌아갑시다" "이제 우리 다른 안마당으로 들어갑시다." "홈통이 마음에 드실거라고 이미 말씀드렸습니다." "이제 모래가 가득 담긴 항아리를 보시게 될 겁니다." "곧 지하실이 어떻게 두 갈래 갈라지는 되는지 아시게 될 겁니다." 가끔 나는 실수를 하기도 하는데, 그럴 때면 우리 둘은 마주보고 껄껄 웃는다. 나는 이런 놀이만 상상한 게 아니다. 집에 대해서도 명상했다. 집은 모든 부분은 여러 번 반복되기 때문에 어떤 곳은 곧 다른 곳이다. 하나의 저수조, 하나의 안마당, 하나의 가축용 물통, 하나의 구유통이란 없다. 구유통도, 가축용 물통도, 안마당도, 저수조도 열 네 개[무한]이다. 이 집의 크기는 세계의 크기만 하다. 다시 말해서. 이 집이 세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먼지로 뒤덮인 회색 석조 회랑과 저수조가 있는 안마당을 지치도록 돌아다닌 끝에 길거리로 나왔고, 쌍도끼 신전과 바다를 보았다. 이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밤의 비전을 통해 신전과 바다 또한 열 네 개[무한]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모든 것은 여러 번, 즉 열 네 번 반복된다. 그러나 단 한 번인 것처럼 보이는 게 세상에 둘 있다. 위로는 복잡한 태양이요, 아래로는 아스테리온이다. 어쩌면 내가 별과 태양과 그 거대한 집을 창조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제는 기억이 나질 않는다. 구 년마다 내가 악에서 해방시켜주기를 바라며 아홉 사람이 집으로 들어온다. 석조 회랑 안쪽에서 목소리나 발소리가 들리면 기쁜 마음으로 사람들을 찾으러 달려간다. 의식은 몇 분 안에 끝난다. 내 손에 피를 묻히지 않아도 사람들은 차례차례 쓰러진다. 사람들은 쓰러진 그 자리에 있다. 그리고 시체 덕분에 이 회랑과 저 회랑을 구별할 수 있다. 나는 그 사람들이 누군지 모른다. 아는 것이라곤, 그들 중 한 사람이 임종을 하면서 언젠가 나를 구원해 줄 사람이 당도하리라고 예언했다는 것이다. 그때부터는 고독이 고통스럽지 않다. 구원자가 살아 있고, 결국에는 먼지를 밟고 일어날 것을 알기 때문이다. 내가 세상 모든 소리를 들을 수 있다면 구원자의 발소리도 들을 수 있으련만. 제발 복도도 한결 적고, 문도 한결 적은 곳으로 나를 데려가 주기를 바란다. "구원자는 어떻게 생겼을까? 황소일까, 사람일까? 인간의 얼굴을 가진 황소일까? 아니면, 나 같이 생겼을까?" 아침 햇살이 청동검에서 반짝거렸다. 이미 피의 흔적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 테세우스가 말했다.
나는 보르헤스의 작품을 읽으면서 이런 감정이입, ‘새 주인공 만들기’의 오래된 경험을 많이 떠올렸다. 오래오래 사는 사람-이건 내가 아주 좋아하는 모티브인데-이 등장하는 이야기(아마도 <불한당들의 세계사> 첫번째 작품이 아니었나 싶다) 같은 것들. 그러나 내 마음을 와락 끌어당겨서 빙글빙글 돌게 만들었던 것은 바로 이 ‘아스테리온 집’이었다.
보르헤스 글의 특징 가운데 하나는 기존 작품을 다시 쓰는 것이다. 이 다시 쓰기는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하나는 타인의 사고에 대한 다시 쓰기, 말을 바꾸면 메타비평이요, 다른 하나는 타인의 문학 작품과 자신이 상상한 작품에 대한 다시 쓰기, 이른바 메타문학이다. 보르헤스 작품에서 이러한 다시 쓰기의 예를 찾는다면 대표작이라고 할 수 있는 <허구집>(Ficciones)과 <또 다른 심문>(Otras inquisiciones)이다. <허구집>에 수록된 대다수의 작품은 이미 존재한다고 상정한 문학 작품에 대한 일종의 요약이라는 점에서 기본적으로 메타문학의 성격을 지니고 있으며, <또 다른 심문>에 실린 많은 작품은 기존의 문학, 철학, 종교 텍스트를 비평적으로 재해석하고 있다는 점에서 메타비평이다. 사실 메타문학이든 메타비평이든 보르헤스 작품의 핵심은 원전도 아니고 원전과 보르헤스 텍스트의 관계도 아니다. 오히려 원전을 견강부회하고 있다고 말해도 좋을 정도의 과감한 해석, 또는 원전의 모습을 변형시키는 상상의 질서이다. 이 상상의 질서를 언어로 표현한 것이 보르헤스 작품이다. 보르헤스가 작품집을 ‘허구’라고 부르거나 비평집에 16세기 종교재판을 연상시키는 ‘심문’이라는 제목을 붙인 이유도 여기서 찾을 수 있다. 예를 들어, ‘책과 만리장성’(<또 다른 심문>)에서 진시황의 정치적 행위를 미학적으로 접근하고 해석하는 보르헤스의 논의는 역사적 사실과 전혀 무관하다. 마찬가지로 ‘돈키호테의 저자, 피에르 메나르’(<허구집>)에서 보르헤스가 제시하는 메나르 작품의 요약은 이 작품의 실재 여부와 상관이 없다. 역사적 사실이건 타인의 텍스트이건 가상의 작품이건 이것들은 어디까지나 순수한 자료에 불과하며, 이 자료들은 허구의 영역에서 새롭고 낯선 문맥에 위치함으로써 보르헤스 나름의 독특한 세계를 구축하는 데 이바지할 뿐이다.""" (박병규, <보르헤스, 시간의 미로와 담론의 미로> 중에서) <아스테리온 집>에 대한 또다른 설명.
1940년대 말 보르헤스는 문예지 ‘부에노스아이레스 연감’의 편집장을 맡고 있었다. 원고 마감을 하고 편집에 들어간 어느 날 지면은 배정되어 있었으나 작품이 없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보르헤스는 이 빈자리를 채우기 위해 부랴부랴 서둘러 이틀만에 작품을 썼는데, 그것이 <아스테리온 집>이다. 평소 보르헤스는 작품을 창작할 때 단어 하나하나를 엄밀하게 따져가며 퇴고를 거듭했다는 점을 감안하면 분명 이례적인 일이다 - 이 작품에 어떤 모순이나 결점이 있다는 암시인가? 그런데 재미 있는 것은 이러한 내력에 대한 해석이다. 어느 비평가에 따르면, <아스테리온 집>은 시간에 쫓겨 쓴 작품이기 때문에 보르헤스 문학적 상상력의 정수를 보여주고 있다고 얘기한다. 즉, 보르헤스가 평소 사고하고 상상하던 세계를 꾸밈없이 드러내는 작품이라는 뜻이다.""" (‘라틴아메리카문학 21’에서 퍼옴) 어쩌면 사람들이 길을 잃게 집을 짓겠다는 생각이 황소 머리 남자라는 생각보다 훨씬 이상하다. 그러나 위의 두 가지 생각은 상호 관련이 있다. 미로 이미지는 미노타우로스 이미지와 부합하며, 괴물 같은 집 한 가운데 괴물이 사는 것은 아주 당연하다. (그림: 보르헤스가 이 작품을 쓰는데에 영감을 줬다는 George Frederic Watts의 ‘미노타우로스’) 미노타우로스는 반은 황소이고 반은 사람이다. 크레타 왕국의 왕비 파시파에가 해신 포세이돈이 보낸 하얀 황소와 통정(通情)하여 태어난 아들이다. 이러한 사랑이 실현될 수 있기까지는 데달로스의 재주가 한 몫했는데, 이번에는 미로를 만들어 괴물을 눈에 띄지 않게 가뒀었다. 오비디우스는 기발한 형식의 오운시에서 미노타우로스는 "황소인데 반은 인간이고 인간인데 반은 황소"라고 얘기했다. 단테는 고대 언어에는 능통했으나 고대의 동전이나 기념물에 대한 지식이 없었기 때문에 미노타우로스의 머리는 사람이고 몸통은 황소라고 상상했다. 황소 숭배와 쌍도끼(이를 ‘labrys’라고 하는데, ‘미로’라는 단어는 여기서 유래했다) 숭배는 헬레니즘 시대 이전에 신성한 투우 제전을 거행했던 여러 종교의 전형적인 특징이다. 벽화를 보면, 황소머리를 한 인간은 크레타 인들이 믿었던 악마이다. 그리스판 미노타우로스 이야기는 아주 오래된 신화를 후세 사람들이 개작한 것으로, 아마도 실제로는 그보다 훨씬 더 무서운 상상 세계의 흐릿한 그림자에 불과할 것이다.""" (보르헤스,『상상동물 이야기』에서)
엘리너 파아존의 단편들 못잖게 내가 좋아하는 글이다. 황소인간의 오랜 고독, 상상속의 집 구경, 적막하면서도 ‘쿨’한 느낌이 묻어나는 분위기. 그리고 보르헤스다운, 너무나도 보르헤스다운 반전. 믿을 수 있겠어, 그 괴물은 방어도 안 했어.
아폴로도루스, 『도서관』, III권 1장
"아리아드네, 믿을 수 있겠어? 그 괴물은 방어도 안 했어."
그래서 나는 보르헤스를 좋아한다. 누구나 다 그런 경험이 있을 것이다. 어릴 적, 나 자신이 소설에 나오는 등장인물의 하나라고 상상한다거나 아니면 또다른 등장인물을 만들어내 나를 이입하는 짓 말이다. 그런데 항상 내가 나를 이입하는 대상은 소설의 ‘주인공’은 아니었다. 어쩌면 주인공들의 존재는 아주 명백하고 강렬해서(요즘 말로 표현하자면 ‘캐릭터가 확실해서’) 차마 거기에 나를 집어넣을 엄두를 못 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정해진 주인공이 되는 건 좀 재미없다 싶기도 했고.
다시 쓰기의 의의는 고갈의 문학, 양피지 이론, 바로크적 글쓰기, 간텍스트성을 비롯하여 여러 가지 이론과 관점에서 탐색이 가능하다. 그러나 이 이론들은 기본적으로 문화이론을 밑바탕으로 삼고 있는 문학이론이다. 유동적인 세계관이나 삶의 양식을 전제하지 않는 바로크가 몇 가지 수사법으로 환원될 위험을 안고 있듯이, 텔켈 그룹 중심의 텍스트성 이론을 전제하지 않는 양피지 이론이나 간텍스트성 이론은 구태의연한 영향론의 범주를 벗어나기 어렵다.
미노타우로스라는 존재는 소설의 소재로서는 아주 매력적이다. 괴물, 미로, 제물, 그리고 멋진 용사와 미녀. 모든 것을 다 갖춘 모티브라 해도 될 것 같다. 미노타우로스에 대해 보르헤스가 직접 설명한 내용.
미노타우로스는 인육(人肉)을 먹었기 때문에 크레타의 왕은 속국 아테네에게 매년 일곱 명의 처녀와 일곱 명의 총각을 조공으로 바치라고 요구했다. 테세우스는 과중한 조공에 신음하는 조국을 구하겠다는 결심에서 희생물이 되기로 자원했다. 크레타의 공주 아드리아네는 테세우스가 미로에서 길을 잃지 않도록 실꾸러미를 건네주었고, 테세우스는 미노타우로스를 죽이고 미로에서 빠져나올 수가 있었다.
보르헤스의 소설은 사실 좀 난해하다. 그치만, 바로 그 보르헤스가, "독서는 행복이고 작품은 읽기 쉬워야 한다"고 했다니, 나는 그 주장을 따르기로 했다. 보르헤스의 작품 자체는 행복을 묘사하지 않지만 읽는 순간 만큼은 즐겁고 행복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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