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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트디부아르 유혈사태 일단락... 사태 총정리

딸기21 2011. 4. 12. 17: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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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으로 코트디부아르를 좋아합니다. 작년에 일주일 정도 가 있으면서 정(?)도 들었고, 또 박프란체스카 수녀님도 거기 계시고...(수녀님 걱정되네요. 잘 계신건지...)
코트디부아르 사태, 이제 일단락됐으니... 이 나라가 잘 됐음 좋겠습니다. 사태를 정리해봅니다.


-서아프리카 코트디부아르에서 정권을 내놓지 않고 버티던 전직대통령이 결국 체포됐죠.
지난해 대선에서 져놓고도 결과에 불복한 채 아비장의 대통령 관저 지하벙커에서 버티던 
로랑 바그보가 붙잡혔습니다.
대선 승자인 알라산 와타라 측과 프랑스 군이 관저를 공격해 11일 전격 체포를 했습니다.
현지 언론들에 따르면 바그보는 은신처를 급습한 와타라 쪽 군인들을 보고는 “죽이지 말아달라”고 사정했다고 하네요. 헛된 욕심을 부리던 권력자의 말로는 결국 비참합니다. 바그보는 앞으로 국제형사재판소(ICC) 전범재판을 받을 가능성이 높아 보입니다.



반군 공격으로 벼랑끝에 몰린 로랑 그바그보 대통령(사진 왼쪽) | 국제사회로부터 대선 승자로 인정받은 알라산 와타라
 

바그보는 코트디부아르의 전 대통령이죠. 지난해 대선에서 알라산 와타라가 승리를 했는데도 정권을 내주지 않은 채 멋대로 재선 취임식을 했고, 최대도시인 아비장에서 국민들을 볼모로 내전을 벌여왔습니다.

-이제 내전은 종식되는 건가요.
바그보가 체포됐으니, 지난해 11월 이후 근 5개월을 끌어온 유혈사태는 일단락되는 셈이죠.
코트디부아르가 위치한 서아프리카는 분란이 참 많았던 지역입니다. 세상 어느 곳에서보다도 참혹했던 시에라리온-라이베리아 내전이 1990년대 벌어졌고, 그 옆 나이지리아에서는 내전은 아니지만 지금도 종교·종족갈등으로 유혈사태가 빈발하고 있습니다. 코트디부아르의 경우는 사실 서아프리카에선 가장 안정된 축에 속했던 나라입니다. 그런데 2000년대 이후에 뒤늦게 이런 혼란을 겪고 있네요.



-코트디부아르는 어떤 나라이며, 내전 배경은.
코트디부아르는 서아프리카 상아해안에 위치해 있습니다. 자원이 많지는 않지만 약간의 석유가 나오고, 또 이웃한 나이지리아 원유를 받아다가 정제해 수출을 합니다. 하지만 최대 수출품은 역시나 카카오와 코코넛, 야자유 같은 농산물입니다. 최대 산업은 플랜테이션 농업이라 보시면 될 것 같습니다.
1960년 프랑스 식민지에서 독립한 이래 주변국들에 비해 큰 혼란을 겪지 않았습니다. 아프리카에서는 흔한 군사쿠데타나 기근 내전도 없었는데, 1999년12월 뒤늦게 쿠데타가 벌어졌습니다. 쿠데타에 반대하는 거센 시위가 벌어졌고, 시민들이 쿠데타세력을 몰아낸 뒤 권력을 잡은 것이 바그보였습니다.
바그보가 2000년 집권을 했는데 2년 뒤인 2002년에 이번엔 북부에서 반군들이 들고 일어나면서 내전이 벌어졌습니다. 





-그럼 바그보 집권 이래 내전이 계속돼왔던 겁니까.
코트디부아르는 남쪽에 바다가 있고 석호가 이어져 있어서 해안에 도시들이 집중돼 있습니다. 반면 내륙은 개발이 좀 덜 돼있고, 특히 북쪽에는 사막 국가인 부르키나파소, 베냉 같은 가난한 내륙국가들이 이어져 있습니다. 이 쪽에서 이미 수십년전부터 넘어와 살고 있는 이주자들이 있는데요.
이 사람들에게 대선 투표권을 줄 것이냐 말 것이냐를 놓고 분란이 벌어져서 바그보 집권 기간 잠시 유혈충돌이 벌어졌습니다. 하지만 당시 사망자는 몇백명 수준이니 격렬한 내전은 아니었던 것 같고요.
2007년에 정부와 반군들이 이미 새로 대선을 치르기로 합의를 했고, 유엔 평화유지사령부(
ONUCI)가 들어서서 평화정착 과정을 관리해오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약속대로 지난해 대선이 치러졌는데 바그보가 과욕을 부려서 자리를 내놓지 않으려 했다가 이번 사단이 난 거죠.

-국제사회의 결의도 있었지만, 프랑스군이 적극 개입을 했는데.
과거 프랑스의 자크 시라크 대통령 시절에는 아프리카의 옛 식민종주국의 면모를 보이려고 애를 많이 썼습니다. 하지만 니콜라 사르코지 현대통령 들어와서는 프랑스가 아프리카 문제에 거리를 둬온 것이 사실입니다. 그런데 최근 국내 정치에서 좀 밀리고 있는 사르코지가 이번에 뭔가를 보여줘야 한다는 판단을 한 것 같습니다.
유엔 안보리 결의로 인도적 개입이 결정되긴 했지만, 사실 현지에 이미 주둔하고 있던 유엔 평화유지군보다는 프랑스 군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지난 3일부터 군사행동을 시작해 바그보 측을 압박했고, 11일 체포작전도 사실상 프랑스군 주도로 이뤄졌다고 합니다. 

-내전이 끝났으니 일단은 국제사회가 환영을 할 듯.
유엔은 “바그보는 자기가 저지른 범죄에 대한 재판을 받게 될 것”이라며 바그보 체포를 환영했습니다.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은 바그보 군이 시민들을 공격한 행위는 “용납할 수 없는 일”이라면서 ONUCI에 “필요한 모든 수단을 동원해 바그보 군을 제압하라”고 요청했다고 합니다.
반 총장은 유엔을 맡은 뒤 
외교부 차관을 지낸 최영진 유엔 사무총장 특별대표를 보내 코트디부아르 평화유지활동의 총책임을 맡긴 바 있습니다. 그만큼 코트디부아르에서 민주선거를 정착시키는 것이 아프리카 민주화에 관건이라고 봤던 거고요.
내전이 끝난 것에 대해서는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도 성명을 내고 “불법적인 권력이 끝난 것을 환영한다”는 입장을 밝혔습니다. 유럽연합은 코트디부아르산 카카오 금수조치를 하고 있었는데, 와타라 쪽의 요청으로 11일 즉시 이 금수조치를 풀어줬습니다.


(아비장 풍경) 
 
 

-내전이 끝났다고는 하지만 그 사이에 인도적 참상이 많이 벌어졌다고.
지난 몇 주 동안 아비장 떠난 주민들이 100만명 이상이라니, 다들 그 주변에 난민이 되어 떠돌고 있겠죠. 코트디부아르가 그 일대에서는 경제도 그나마 괜찮은 편이었는데 지금은 인도적 위기 상황이랍니다.
유엔 인도주의업무조정국이 아비장 일부 지역에서 주민들에게 식량을 배급하고 있는데, 그조차 제대로 되지 않는 지역이 많고 특히 어린이들과 여성들이 위기에 몰려 있다는 소식입니다. 유엔 안보리 결의로 국제사회가 군사개입을 하고는 있는데 인도적 위기는 갈수록 심해지는 양상입니다. 

-또 대량학살의 정황도 있죠.
지난달 30일 가톨릭 구호단체 카리타스가 서부 두에쿠에에서 민간인 시신 1000구를 발견했다고 주장했습니다. 주검들이 발견된 곳은 반군이 장악한 지역이었지만, 아직 누구 소행인지는 밝혀지지 않았습니다.
국제형사재판소(ICC)는 앞서 6일 성명을 내고 코트디부아르 대량 학살에 대해 조사할 계획이라고 밝혔습니다. 조직적인 살해라고 판단하고 있는 거죠. 코트디부아르는 ICC 체제의 근간인 로마조약을 아직 비준하지 않았지만 와타라 측은 조사에 응하고 ICC의 재판에 협조하겠다는 입장입니다. 
문제는 학살을 와타라 측이 저질렀을 경우입니다. 지금 서방이 바그보 쪽만 비난하며 군대를 투입했는데, 와타라 쪽이 전국을 장악하는 과정에서 수많은 민간인 사망자를 낸 것이 거의 확실해보입니다. 이렇게 되면 성공한 권력에는 손 못 대고, 쫓겨나는 쪽만 재판정에 올리는 꼴이 될 수도 있죠.

[딸기의 오들오들매거진] 코트디부아르의 시골 진료소에서 
[딸기의 오들오들매거진] 아프리카의 슬럼가 풍경  


 
-그럼 내전은 끝났어도 앞으로 정국을 안정시키기가 쉽지 않겠군요.
두에쿠에 사건을 와타라 측이 저지른 것이 확실해질 경우 국정 운영이 쉽지 않겠죠. 지역·부족갈등을 봉합하는 것도 난제가 될 것 같습니다.
제가 지난해 코트디부아르에 취재를 갔었는데요. 2002년 내전이 남-북 갈등 양상으로 전개됐기 때문에, 그 갈등을 무마하려고 애를 많이 쓰고 있었습니다. 이번엔 부족싸움은 아니었다고 하지만 유혈사태가 나고 총 1500명 가량이 희생됐다고 하니 그걸 치유하기가 쉽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코트디부아르 내륙의 시골마을 아이들)
 

-새 대통령 와타라는 어떤 사람. 
1942년생인데, 아버지는 부르키나파소 출신입니다. 그래서 대선 과정에서 바그보 쪽에선 “코트디부아르 토박이가 아니다”라면서 공격을 많이 했었죠.
와타라는 미국 필라델피아의 드렉셀대학에서 공학을 전공했고 펜실베이니아대학에서 1972년 경제학 박사학위를 받았습니다. 학력에서 보이듯 대단한 인텔리 계층이고요. 유대계 프랑스 여성과 90년에 결혼을 했는데, 사르코지 프랑스 대통령이 파리 외곽의 소도시인 뇌이쉬르센 시장 재직 시절 결혼식 주례를 해줬다고 합니다. 
와타라는 젊은 시절 워싱턴에서 국제통화기금(IMF) 소속 경제학자로 일했고, 75년 코트디부아르로 돌아온 뒤에는 주로 중앙은행에서 일했습니다.
코트디부아르의 장기집권자였던 펠릭스 우푸에-부아니 대통령 시절에 중앙은행장을 맡았고, 90년부터는 총리를 지내면서 유력 정치인으로 부상했습니다. 93년 우푸에-부아니가 사망하고 나서 다시 IMF 일로 돌아갔다가 지난해 대선에 다시 나와 승리를 거뒀습니다.

-경제학자 출신인데, 망가진 경제를 재건할 수 있을지.
코트디부아르가 과거엔 역내에서 가장 사정이 괜찮았다고는 하지만, 1인당 GDP가 구매력 기준으로 1800달러에 불과합니다. 뿐만 아니라 거의 10년을 내부 싸움으로 허송세월하면서 경제가 많이 피폐해졌습니다.
산업발달이 늦어진 것은 물론이고 그나마 있던 인프라도 무너진 채로 복구가 안 돼 내륙의 경우는 형편이 몹시 안 좋고요. 경제를 다시 세우는 것이 와타라의 최대 과제가 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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