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인한 이스라엘 The Hidden History of Zionism (2002)
랄프 쇤만 (지은이) | 이광조 (옮긴이) | 미세기 | 2003-04-15
나더 아푸리는 건강하고 활력이 넘치는 남자로 요르단의 역도 챔피언이었다. 하지만 1980년 다섯 번째 투옥에서 풀려난 이후로는 보지도 듣지도 말하지도 걷지도 못했고 신체기관을 움직이지도 못했다. 그는 1967년부터 1980년 사이에 10년6개월 동안 행정처분으로 억류돼 있었다. 다섯 번의 투옥기간 동안 자행된 가혹행위와 고문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당국은 나더 아푸리를 기소할만한 아무런 자백도 증거도 얻지 못했다.
첫 번째 투옥(1967-1971)
나는 점령 첫해인 1967년에 처음 체포되었다. 그들은 나블루스의 내 집에서 나를 체포해 눈을 가린채 헬리콥터에 매달아 이송했다. 나블루스 근처에 있는 베이트 푸릭과 살렘 마을의 모든 주민들이 이 장면을 목격했다.
그들은 나를 가장 악명 높은 사라판드 군사감옥으로 데리고 갔다. 헬리콥터가 착륙하자 그들은 나를 밀쳐내며 뛰라고 명령했다. 그때 나는 총성을 들었다. 그들이 나를 향해 사격을 했던 것이다. 나는 뛰었다(나더 아푸리가 이때 사살됐다면 이스라엘 군은 아마도 "도망자를 처형했다"고 발표했을 것이다).
그들은 나를 녹색문에 쇠사슬로 묶었다. 문에는 도르래가 달려 있었다. 그들이 문을 열면 쇠사슬에 묶인 내 손과 다리가 잡아당겨졌다. 그들은 내가 의식을 잃을 때까지 도르래를 감았다. 의식을 깨고 보니 나는 창문에서 내려온 쇠사슬에 묶인 채 의자 위에 앉아 있었다. 그들은 천천히 의자를 빼냈다. 묶인 손으로 내 몸무게를 지탱해야했기 때문에 근육이 찢어지는 듯한 고통을 느꼈다. 대여섯명의 남자들이 나를 때렸다. (중략)
수사관이 담배를 빨다 담뱃불이 빨갛게 되면 그는 담뱃불을 내 얼굴과 가슴, 성기 등 몸 전체에 지져댔다. 한 수사관은 다른 수사관들이 지켜보는 앞에서 내 성기에 볼펜심을 쑤셔넣었다. 성기에서 피가 흐르기 시작했고 나는 라믈레 감옥병원으로 옮겨졌다. 하지만 곧 다시 조사를 받기 위해 사라판드로 끌려갔다.
나는 열두달 보름 동안 사라판드에 구금된 채 조사를 받았다. 다른 감옥에 있는 내 친구는 네 번이나 내가 죽었다는 통보를 받았다고 한다. 사라판드에서 첫 한달 동안 나는 항상 눈이 가리워지고 손과 다리에 쇠사슬이 묶인 채로 지냈다. 한달 후 그들은 눈가리개와 손에 묶인 쇠사슬을 풀어줬다. 하지만 발에는 항상 쇠사슬을 차고 지냈다. 내 발목에는 아직도 그 자국이 남아 있다.
나를 때리고 심문하고 그런 다음 독방에 처넣고 내가 잠깐 휴식을 취하고 나면 다시 나를 데리고 갔다. 이는 일상생활이었다.
독방은 가로 1미터, 세로 1.3미터, 높이가 1.3미터였고 내 키는 1.7미터였다. 잘 때도 몸을 웅크리고 자야 했다. 독방에는 창문도 비품도 없었다. 요강 하나와 담요 두 장이 전부였다. 바닥에는 날카로운 돌들이 박혀 있어 걸을때면 발바닥이 찔렸다.
수사관들이 다른 죄수들을 데려오기 시작했다. 그들은 우리에게 등번호가 적힌 군복을 나눠줬다. 나는 1번이었다. 그들은 내 이름을 부르지 않고 번호로 불렀다. 우리가 쇠사슬에 묶인 채 바깥으로 끌려가면 사나운 개들이 우리에게 달려들어 옷을 물어 찢고 몸을 물어뜯었다.
내가 구금된 이후 30명이 넘는 사람이 끌려왔고 그들 모두 똑같은 고문을 당했다. 그들 모두는 고문을 견디지 못해 자백서를 썼고 종신형을 살고 있다. 하지만 나는 자백하지 않았다. 고문으로 성기가 망가져 나는 오줌도 제대로 못 눈다. 조사가 끝난 다음 처음 백일 동안은 제대로 걷지도 못했다. 그러나 나는 자백하지 않았다. 나는 열두달 보름동안 한마디도 말하지 않았다.
25일간의 단식투쟁 이후 나는 라믈레의 감방으로 보내졌다. 그들은 내 머리를 마구 때렸다. 그들은 내 손에 쇠사슬을 묶고 코에 관을 넣었다. 일종의 전기충격 같은 것이었다. 온몸이 부르르 떨렸다. 그 뒤로 나는 음식이 목구멍을 넘어갈 때면 비명을 지르게 되었다. 히스테리에 걸린 것이다. 그러면 그들은 내 엉덩이에 주사를 놓았고 발작은 진정되었다. 이 고문으로도 내 입을 열지 못하자 그들은 나를 라믈레의 교도소 병원에 데리고 갔다가 다시 나블루스 감옥으로 보냈다.
15명의 군인들이 의자로 내 머리를 때렸다. 나는 의식을 잃고 쓰러졌다. 그들은 내 셔츠로 입을 틀어막고 구타를 계속했다. 나는 발작을 일으켰다. 그러자 그들은 내게 주사를 놓았고 나는 다시 의식을 잃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복도에 혼자 누워 있었다. 나는 앞을 볼 수가 없었다.
두 번째 투옥(1971-1972)
세 번째 투옥(1972-1973)
네 번째 투옥(1973-1976)
헤브론과 모스코비야, 라말라와 나블루스 감옥에서 나는 3개월씩 독방에 갇혔다. 헤브론 감옥에서 심문을 받고 있을 때 눈이 내렸다. 그들은 나를 벌거벗긴 채 바깥으로 내몰았다. 그들은 나를 기둥에 쇠사슬로 묶어 놓고 얼음물을 퍼부었다. 그들은 쇠구슬을 내 음낭 사이에 끼우고 고환을 쥐어짰다.
수사관 중의 한 사람인 아부 하로운은 내 얼굴을 불독처럼 만들어 버리겠다고 공언했다. 그는 자신의 말을 그대로 행동에 옮겼다. 그는 거의 두시간 동안 내게 주먹을 휘두른 다음 나를 거울 앞으로 데리고 갔다. "네 얼굴을 봐라." 내 얼굴은 정말 불독같이 보였다. 나블루스 감옥에서 수사관들은 담배꽁초로 나를 지지고 쇠구슬을 고환사이에 끼우고 압박을 가했다. 그들은 집게를 사용해 내 이빨을 네 개나 뽑았다. 나는 행정처분만으로 3년 동안 구금됐다. 내가 수감돼 있는 동안 그들은 내 집을 폭파했다.
다섯 번째 투옥(1978-1980)
그들은 내게 냉소적인 인사를 건넸다. "네 항문이 자백을 하도록 만들어주마." 나는 그들에게 입으로 말하지 항문으로 말하지 않는다고 대꾸했다.
수사관들은 우리(Uri)와 아부 하로운, 정신과 의사인 조니, 그리고 손가락이 하나 없는 아부 니머와 아부 알리 미카, 닥터 짐스였다.
그들은 나를 기둥에 묶은 다음 내 가슴을 집중적으로 때렸다. 그런 다음 나를 바닥에 눕혀 놓고 공중으로 뛰어올랐다가 내 가슴을 짓밟았다. 그런 구타가 일주일동안 지속되었다. 그들은 군화 굽으로 내 손톱을 짓밟았고 결국 내 손가락이 부러졌다.
눈이 오는 날이면 그들은 내게 얼음물을 퍼부었다. 그들은 내게 종이를 건네주고 자백을 위해 두 시간의 여유를 주었다. 하지만 나는 아무 것도 모른다고 대답했다. 그러자 그들은 나를 의자에 묶고 주먹과 발로 마구 때리기 시작했다. 나는 곧 바닥에 머리를 부딪치며 쓰러졌다. 그때 우리(Uri)가 공중으로 뛰어올랐다. 나는 머리에 엄청난 통증을 느꼈다. 이것이 지난 2년 동안 내가 겪었던 것 가운데 기억할 수 있는 마지막 사건이다.
그리고 나서 나는 감방으로 질질 끌려갔다고 한다. 다른 수감자들이 내게 밥을 먹이고 씻기고 잠자리에 눕혔다고 들었다. 나는 대소변도 제대로 가리지 못했다. 손을 움직이지도 못했고 걷지도 못했다. 듣지도 못했고 사람들을 알아보지도 못했다. 나는 오직 입술만을 움직일 수 있었고 사람들이 입안에 넣어주는 것을 무엇이든 삼켰다. 동료들이 내 머리는 물론 손발까지 움직여줘야 했다. 내 몸무게는 47kg까지 떨어졌다. 2년 후 나는 한 정신병원에서 의식을 차렸다. 나는 엉치 등뼈에 다섯 군데나 골절상을 입었고 걸을 수가 없었다.
+++ 이스라엘 관리들과 기자들은 나더 아푸리가 '쇼'를 하고 있다면서 그를 뛰어난 '연기자'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그를 돌봤던 죄수들과, 그가 마지막으로 병원에 후송됐을 때 그를 방문했던 기자들은 그의 상태를 직접 목격했다. 그를 치료했던 병원 관계자들도 그의 상태를 증언했다. 나더 아푸리는 팔레스타인 사람들 사이에서 유명인사가 되었다. 그는 고난의 상징이자 저항의 영웅적인 상징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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