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이란 무엇인가? 그후 50년>을 읽기 시작했다. 슈뢰딩거 <생명이란 무엇인가> 트리니티대 강연 50년을 기념해서 지난 93년에 업계 권위자들이 모여 강연한 내용을 모은 책이다. 책상 위에 놓인 '생명책'(농부아저씨가 좋아하는 '생명책' 하고는 전혀 다른^^) 두 권 중에서 이쪽이 재미나겠다 싶어 책장을 펼쳤는데, 이해 안 가는 구절이 나왔다. '책 읽다 투덜거리기'의 명수인 딸기는 혼자 신경질을 바락바락 내다 못해, 라이브러리에 책의 구절을 하나 올렸다.
"엄격한 다윈주의 세계관의 두 가지 특징은 생명의 역사의 지질학적 행렬을 곧바로 유전 물질의 생리화학적 본성으로는 아니라고 할지라도 최소한 유기체의 순간적 책략으로 환원하는 것을 장려한다. 첫째, 자연선택 이론은 생식의 성공을 위한 유기체의 투쟁을 인과적 변화의 장소로 인정한다. 그리고 종이나 생태계와 같은 '보다 상위의' 생물학적 단위에 적극적인 인과적 지위를 부여하는 것을 분명하게 부정한다... 둘째, 다윈의 정신적 교사였던 찰스 라이엘이 아주 효과적으로 설교한 바 있는 제일성 uniformity 이라는 거대한 시각에서 보아 모든 규모의 시간과 모든 크기의 사건들은 순간순간 발생하는 관찰 가능한 최소 결과의 인과적 사건들의 축적 및 외삽으로서 아래서 위로 매끄럽게 흘러간다"
스티븐 제이 굴드의 글이었다. 이미 굴드의 책을 몇권 읽어본 바 있기 때문에, 굴드가 설마 저렇게 썼을라고! 하면서 젠장. 투덜투덜 하다가, 그러다가 또 에라~ 싶어서 올린 글을 싹 지워버렸다. 마침 그 순간, 내가 다시 지우기 직전에, 김희봉 거사님이 글을 읽으셨다. 투덜투덜 딸기와 토닥토닥 거사님의 '쪽지 대화'가 시작됐다.
거사님: 답글을 달려고 했더니, 그새 지우셨군요. 안그래도 지호 편집장님이 이 책 때문에 걱정을 많이 하더라구요. 딸기님과 비슷한 동기로 과학전문도 아닌 출판사가 덜컥 계약했지만 내용이 생각보다 훨씬 어려웠던 거죠.
L씨가 번역하다 안되서 나중에 ***씨까지 가세해서, 실제로 두 사람이 나눠 맡은 부분이 자기 전문이 아닌 곳이 되었다고 하더군요. 나중에 두 사람이 서로 상대방 번역을 벌겋게 뜯어고쳤다고 하던데, 그래도 자신이 없었는데, 하는 수 없이 출판했다고 하더군요. 아마 그래서 올려주신 부분은 *** 씨 번역이 아닐 가능성이 큽니다. 생물학 전공자가 그렇게 번역하기는 어려워 보이네요.
사실 이 책 저도 관심이 있어서 지호에서 원서와 역서를 다 얻어놓고는 아직 제대로 못봤습니다.
일단 이건 논문집이고, 원문 자체가 대단히 어려운 책입니다. 굴드도 그 따위로 글을 쓸 수밖에 없죠. 대중을 대상으로 한 글이 아니기 때문에요. 번역이 좋은 편은 아니지만 그 정도는 참고 읽으라고 하면 일반 독자들에게는 가혹한가요? 하지만 자연과학을 전공했고 번역도 꽤 해본 저에게는 그 정도 문장만으로도 원문의 형태도 유추할 수 있고, 원뜻을 충분히 알 수 있습니다. 사실 이런 문장을 매끄럽게 번역한다는 것은 번역이 아니라 번안이 되지요. 논문집을 대중 서적으로 만들어야 하니까요. 음 밥먹고 와서 심심하면 그 문장 한 번 번안해 볼께요
딸기: 그 부분은 ***씨 번역이 아닐 거라고는 생각하고 있었어요. 그런데 제가 앞부분밖에 안 봐서 모르겠는데, 저같은 일반독자들한테는 개념 자체가 어려울 것 같아요. 사실 '원전'도 안 읽고 해석판부터 보려고 하는 독자의 태도에 제일 큰 문제가 있다고 봐요. 예를 들면 저같은.... ^^
거사님: "엄격한 다윈주의의 두 가지 특징을 볼 때, 지질학적 조건이 곧바로 유전물질의 생리화학에 영향을 준다고는 할 수 없겠지만, 적어도 생명체들의 임기응변적 대처에는 영향을 준다고 볼 수 있다. (다윈주의의 두 가지 특징을 살펴보면) 첫째, 번식 성공을 두고 생명체들이 다투면서 일어나는 변화를 인과적으로 추적할 수 있는 단위는 유일하게 개체뿐이라고 본다. 종이나 생태계와 같은 상위의 생물학적 단위에 대해서는 이러한 인과적 추적이 불가능하다고 명료하게 선언한다. 둘째, 다윈의 정신적 스승 라이엘이 효과적으로 설명한 제일성uniformity이라는 거대한 시각으로 볼 때, 모든 규모의 시간에서 일어나는 모든 크기의 사건들은 관찰 가능한 최소 단위의 인과적 사건들의 축적과 그것을 바탕으로 한 추론으로 매끄럽게 흘러간다."
물론 이 정도는 다 파악하시겠죠? 사실 영어 번역에서 정확함보다 더 중요할 수 있는 것이 독자에게 인지적 부담을 줄여주는 일입니다.
딸기: 번역을 번역해주시니까, 무슨 말인지 대충 알겠어요. 고맙습니다. ^^
거사님: 1. 독자의 인지적 부담을 줄여 주어야 한다. 2. 쉽게 써라
위의 두 문장이 같은 뜻일까요? 제가 한 말조차 자꾸 걸리네요. 한 마디 한 마디 할 때마다 얼마나 많은 요소들을 고려해서 어휘를 선택하고 길이를 결정해야 할까요?
여하간에 제가 제시한 번역만큼 파악이 안되신다면, 원어로 읽어도 소용없을 것 같네요. 생소한 분야의 (설명적이지 않은) 글은 일차적으로 독서의 대상이라기보다 독해의 대상이고, 더 나아가 기초 지식을 먼저 쌓는 게 순서일 것 같습니다. 글을 이해하기 어렵게 쓴 것은 저자나 번역자의의 책임이지만, 그런 글에서 아무 것도 얻어내지 못하는 것은 독자의 책임이 아닐까요?
내키는 대로 쓰다보니까 마치 딸기님을 책망하는 것처럼 되어 버렸네요.^^
사실 그 번역은 제한된 시간과 제한된 이해력의 범위 안에서는 번역자가 최선을 다한 것이라고 변명을 해 봅니다. 최소한 원문을 보지 않고도 무슨 말인지 알 수 있으니까요. 어쩌겠습니까, 생물학에 문외한인 역자의 입장에서 굴드 같은 대가의 글을 멋대로 번안하기도 이상할 테고,...
생각이 자꾸 엉키네요. 저는 또 책 한 권을 마무리 지어 가고 있습니다. 마지막에 진도가 잘 안나가네요. 알찬 오후 보내세요.
딸기: 우선은 전문분야의 책을 읽을 때에는, 책 읽기 전에 갖고 있는 지식이 많아야겠죠. 그런데 <그후 50년> 이라는 책의 경우는, 사실 번역의 문제도 많은 것 같아요.
적어도 아까 제가 올렸다가 지운 문장 같은 경우는요. 특히 독자 입장에서 제일 열받는 건, 영어식 일어식(영어 번역도 일어식으로 하는 경우가 많더군요)으로 문장을 꼬아놔서 알아듣기가 힘들다는 거예요. 사실 아까 그 글에 제가 '열받은' 부분도 그런 거였는데요,
"다윈주의 세계관의 두가지 특징은(주어) 무엇무엇을 장려한다. 자연선택 이론은 무엇을 무엇으로 인정한다."
굉장히 이상하지 않나요? 주어가 사람도 아닌데 '장려한다' '인정한다' 심지어는 '장려된다' 라는 식으로 문장을 쓰는 경우도 많이 봤어요. '관찰 가능한 최소 결과의 인과적 사건들의 축적 및 외삽'이라고 하면 아마... 우리나라에서 알아들을 수 있는 사람이 몇명 안 될걸요. 그 '몇명'을 대상으로 책을 내는 거라면 모르겠지만. ^^
거사님: 사실 딸기님 말씀이 백 번 지당합니다. 그 따위를 글이라고 내놓은 역자나 출판사 다 한심합니다. 그러니 어쩌겠습니까? 이런 글에서도 정보를 얻어내는 재주를 익히든지, 조용히 책을 덮든지 하는 것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이 아닌가... 이것이 제 메시지입니다. 오늘 집에 가서 다시 그 책 꼼꼼히 읽어봐야겠네요.
딸기님은 그냥 책을 덮으시든지, 아니면 뒷부분부터 마음에 드는 부분을 읽는 게 좋겠네요.
가능하면 그 책을 제가 요약해 볼 생각도 있습니다. 지난 번에 프리먼 다이슨이 쓴 생명에 기원에 관한 사변을 번역 검토하다 포기했는데, 이 책 보니까 그 책을 번역했더라면 하는 생각이 드네요. <숨겨진 질서>가 너무 안 팔려서, 어려운 책을 손대기가 좀 무서워졌거든요^^
딸기: <숨겨진 질서>는 저처럼 생판 모르는 사람도 재밌게 읽었는데 왜 안 팔렸는지 모르겠어요. 그 책은 정말 재밌었는데...
<그후 50년>은, 챕터별로 골라서 뒤죽박죽으로 읽어야겠어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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