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리아 사태에 제대로 대응하지도 못한 안보리 이사국 자리는 거부하겠다.”
사우디아라비아가 18일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이사국으로 선출된 지 몇시간 만에 시리아 사태와 팔레스타인 문제 등 국제분쟁에 대한 무력한 대응을 이유로 들며 “이사국 지위를 거부한다”고 밝혔습니다. 사우디 외교부는 이날 국영 SPA통신을 통해 공개된 성명에서 “팔레스타인의 지금과 같은 상황이 65년 동안 이어지면서 몇 차례 전쟁이 벌어져 국제평화를 위협하고 있다”며 “이는 안보리가 의무와 책임을 이행할 능력이 없음을 보여주는 증거”라고 비난했습니다.
성명은 또 “안보리는 중동을 대량살상무기(WMD)가 없는 지역으로 만드는 데에도 실패했고 역내 모든 나라들이 핵무기를 개발하지 못하도록 막지도 못했다”고 주장했습니다. 이란 핵문제는 물론이고, 국제 핵확산 금지체제에 들어가지 않은 채 핵무기 보유국임을 사실상 미국과 유럽 등으로부터 인정받고 있는 이스라엘을 겨냥한 것으로 보입니다.
사우디는 이와 함께 시리아 사태 처리에 대한 불만을 강하게 드러냈습니다. “시리아 정권을 억제하기 위한 제재를 방기함으로써 정권이 자국민을 화학무기로 불태워 죽이는 것을 방치, 용인한 것 역시 안보리의 무능력을 드러낸 증거”라는 것이었습니다. 사우디는 안보리가 분쟁 대처에서 ‘이중 잣대’를 들이대고 있다고 맹공격했습니다.
뉴욕 유엔본부에 있는 안보리 회의실
말이야 맞는 말이지만, 그동안 맞는 '행동' 별로 해오지 않은 사우디가 대체 이 시점에 왜??
전날 유엔에서는 올해 말로 임기가 끝나는 아제르바이잔, 과테말라, 모로코, 파키스탄, 토고를 대신해 사우디아라비아와 차드, 나이지리아, 리투아니아, 칠레를 안보리 이사국으로 뽑았습니다.
이 시점에서 잠시 안보리 구조에 대해 들여다보면...
안보리 이사국은 15개국이며, 거부권을 가진 5개 상임이사국을 제외한 나머지 10개 이사국은 지역그룹별로 총회 투표를 통해 선출됩니다. 아프리카 그룹, 아시아·태평양 그룹, 동유럽 그룹, 라틴아메리카·카리브 그룹, 서유럽·기타 그룹의 5개 지역그룹으로 나눠서, 그룹별 쿼터에 따라 뽑는 거지요. 안보리 의장국은 매달 돌아가며 합니다. 순번은 나라이름 영어 알파벳 순서를 따릅니다.
10개 비상임 이사국의 임기는 2년인데, 절반인 5개국씩 해마다 교체합니다. 비상임 이사국이 되려면 193개 유엔 회원국 중 3분의2 이상의 지지를 얻어야만 합니다. 17일 투표에서 사우디는 176표를 얻어 무사히 통과했습니다. 하지만 함께 후보에 오른 리투아니아(187표), 나이지리아와 칠레(186표), 차드(184표)에 비하면 지지율이 낮았습니다.
이 투표에서 한 그룹 안에 있는 국가들 간 치열한 표 경쟁이 벌어지는 경우도 있습니다. 일례로 1979년의 경우 같은 라틴아메리카·카리브 그룹에 속한 쿠바와 콜롬비아가 열띤 경쟁을 벌인 끝에 무려 투표를 154차례 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이번에는 경쟁이 없었기 때문에 5개국이 무사히 통과했습니다.
투표가 끝난 뒤 압둘라 알무알리미 유엔 주재 사우디 대사는 “사우디가 그동안 분쟁의 평화적 해결과 중재를 지지해온 점을 인정받은 것”이라고 자평했습니다. 그러다가 몇시간 만에 이사국이 되지 않겠다며 번복하고 나온 이유를 놓고 해석이 분분합니다.
워싱턴포스트 등은 최근 사우디가 안보리의 시리아 문제 처리에 대해 강하게 불만을 표해왔다는 점을 들었습니다. 사우디는 중동 역내에서의 군사행동에 직접 개입하는 일은 거의 없지만, 미국의 동맹이자 아랍의 맹주로서 막대한 영향력을 끼쳐왔습니다.
사우디는 시리아의 바샤르 알아사드 정권이 내세워온 세속주의·아랍사회주의 노선의 반대편에 서 있고, 동시에 종파에서도 알아사드 정권의 기반인 이슬람 시아파와 다른 수니파입니다. 사우디는 이란이 시리아 아사드 정권을 비롯한 중동의 시아파 세력을 지원하며 힘을 키우는 것을 몹시 경계하고 있습니다. 서방이 아사드에 대한 고강도 압박이 아닌 ‘화학무기 사찰·제거’라는 온건한 방식을 택한 것에 불만을 품었을 수 있습니다. 로이터통신은 이달 초 유엔 총회에서도 사우디 외교장관이 시리아·팔레스타인 문제에 대한 안보리 대응을 비난했다고 전했습니다.
정작 사우디가 안보리 이사국이 되는 데에 인권단체들은 정반대의 이유로 반대하고 있습니다. 여성들에 대한 극도의 차별과 억압이 존재하고 시민들의 정치적 자유가 전혀 없는 인권후진국이 막강한 권한을 갖는 안보리 이사국이 되어서는 안된다는 겁니다. 스위스 제네바에 본부를 둔 인권감시기구 유엔워치는 “사우디나 차드 같은 나라들은 인권 부문에서 심각한 문제를 안고 있다”고 지적했습니다.
말 나온 김에 안보리에 대해 좀더 들여다볼까요.
유엔 산하 여러 이사회가 있지만 안보리는 핵심 중의 핵심입니다. 유엔 헌장 5조에 따라 만들어진 안보리는 평화유지 임무를 부여하고(평화유지군 구성, 파병 등) 국제 제재를 결정하고 군사행동을 결의하는 권한을 갖습니다.
물론 세계 곳곳에서 실제로 벌어지고 있는 전쟁과 평화가 안보리 뜻대로 되는 것은 아닙니다만... 어쨌건 '국제사회의 뜻'이자 '(군사) 개입의 기준'이 되는 최소한도의 틀인 것은 확실합니다. 비록 5개 상임이사국이 횡포를 부리고는 있지만 안보리의 결의는 현실적인 영향력 못잖게 최소한의 '도덕적 잣대'로도 기능합니다. 그렇게 막강하기 때문에, 근 70년전의 국제 현실이 아닌 지금의 현실에 맞춰 '거부권 없는 상임이사국 자리라도 만들라'며 신흥 강국들이 상임이사국 확대를 요구하고 있는 것이고요.
안보리의 결의에는 번호가 붙어 있습니다. 이 번호에도 규칙이 있습니다. 순서대로 수천개의 결의안이 나왔던 것은 아니고요, 몇년 단위로 앞자리를 바꿉니다. 예를들면 1953년까지는 1부터 시작하는 결의가 있었고, 1953년부터 1965년까지는 101부터 시작해서 결의안에 번호를 붙였습니다. 1990년대 이후로는 대략 2~3년마다 앞자리를 바꾸고 있습니다. 2009~2010년에는 1901번부터 시작하고, 2011년~2012년에는 2001번부터 시작하고, 올해 나오는 결의안에는 2101번부터 번호를 붙여나가는 식입니다.
거부권을 가진 상임이사국의 존재는 안보리의 도덕적 권위를 훼손하는 치명적인 요인입니다. 위키를 찾아보니 2007년까지 상임이사국들의 거부권 사용 현황이 나와 있네요. 횟수로 따지면 러시아가 가장 많지만 러시아가 비토를 한 것은 대부분 전후 냉전체제가 고착되던, 유엔 창설 10년 이내에 벌어진 일이었고요.
1984년부터 2007년까지의 사례를 보면 러시아 4번, 중국과 프랑스 각 3번, 영국 10번, 미국 43번으로 미국이 압도적이었습니다. 이 정도면 '몽니'라는 수식어는 미국 앞에 붙이는 편이 맞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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