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에는 '데모'가 별로 없다. 사람들은 조용하고, 정치에 무관심하며, 부당한 일이 벌어져도 나서서 항의하길 꺼리고, '튀는 것'을 극도로 겁내고, 순응하며 조용히 살아간다. 통상 일본에 대해 갖고 있는 이미지이고, 어느 정도는 사실이다. 하지만 정말 그럴까? 1960년대 전공투로 상징되는 격렬한 사회변혁 운동이 분명 있었다. 적군파같은 급진주의자들까지 있었다. 일본엔 예나 지금이나 '공산당'이 있다.
정치적 스펙트럼에서 극좌파가 허용된다는 것뿐 아니라, 좀 다른 세상을 만들어보려는 풀뿌리 흐름, 비판적 지식인들의 잔잔하지만 울림 있는 목소리는 한국보다 컸으면 컸지 작지 않다. 마루야마 마사오같은 인물이 공개적으로 전쟁을 비판했던 것이나 니시카와 나가오처럼 민족주의를 끊임없이 경계하고 비판을 가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도 일본을 '조용히 순응하는 나라'로만 보는 시각에 얼마나 허점이 많은지 알려준다.
요즘 젊은이들은 저항할 줄 몰라, 라고 하던 한국 '꼰대'들의 세대차이 나는 지적질은 촛불집회 이후 쏙 들어간 것 같다. 광화문 100만명 앞에 나와서 당당히 할 말 하던, 그것도 아주 실감나고 설득력있게 조목조목 연설하던 고교생들 심지어 초등생들을 떠올린다. 나는 '학우대중들' 틈에 섞여서, 군중 속의 1인으로 대학 시절 여러 집회에 나가봤다. 하지만 만약 지금 나더러 100만명 앞에 나와 정치적 목소리를 내라고 한다면 저 어린 학생들처럼 조리있게 말할 수 있을 것 같지는 않다.
이런저런 생각이 들게 만든 것은 일본의 실즈(SEALDs)가 펴낸 <이것이 바로 민주주의다!>(정문주 옮김. 민음사)라는 책이다. 아베 신조 정권의 '전쟁법안'에 반대하는 학생들의 조직이 만들어졌고, 2015년 도쿄를 비롯한 일본 곳곳에서 데모를 했다. 게릴라같은 조직은 어느 순간 만들어졌고 어느 순간 해체됐다. 이 책은 거기 참여한 젊은이들의 목소리를 쭉 나열한 것인데, 어느 정치인이나 학자들의 말보다 가슴에 콕콕 박힌다.
"저는 수영복이나 속눈썹 연장 따위를 고민하는 사람이 정치에 관해서도 입을 여는 게 정상이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일이 정상이기를 원하기 때문에, 우리 사회가 정상이 될 때까지 반복해서 목소리를 높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이 자리에 섰습니다. 2015년 6월 12일, 저는 전쟁 법안에 반대합니다." (21쪽)
하시모토 베니코라는 여성이 국회 앞 항의집회에 나와서 한 말이다. 사진 속 하시모토는 꽃무늬 민소매 원피스 차림에, "평화헌법 9조를 지키자"고 쓰인 무지개빛 부채를 들고 있다.
실즈의 모태는 SASPL이라는 단체다. 아베 정부가 국가안보를 들며 국민에게 정보를 숨길 수 있도록 합법화하는 '특정비밀보호법'이라는 걸 만들자, 학생들이 나섰다. 사실 그 전인 2011년에 동일본 대지진이 일어났고, 시민들이 원전 반대 집회를 하기 시작했다. 히비야 공원에 2012년 100여명이 모였다고 한다. 이들을 중심으로 SASPL이 태어났고, 그것이 발전해 실즈가 됐다. 소박하지만 의미 있는 출발이었다.
"SASPL을 시작할 당시에, 그러니까 특정비밀보호법이 국회에서 통과되었을 때 말이야. 욕이 절로 나왔잖아. 그런데 누군가가 그런 욕을 했을 때 공감해 주는 사람들이 이미 그 자리에 있더라고. 모두가 '이제 어떻게 해야 하나'를 두고 논의할 수 있다는 것, 그런 커뮤니티가 있다는 것 자체가 대단하다는 생각이 든 거야." (50쪽)
모임을 초창기에 주도한 사람들 중 하나인 우시다 요시마사의 말이다. 그렇게 청년들은 모였고, '내 생각을 말하기를 겁내던' 것에서 벗어나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이들은 처음에 얼마나 겁이 났는지, '나선다'는 것이 얼마나 부담스러웠는지를 솔직하게 털어놓는다.
"제가 집회 참가라는 큰 도전을 하게 된 데는 이유가 있습니다. 오늘날 일본에서 뭐라 말할 수 없는 부자연스러움을 느꼈기 때문입니다. 너는 학생이니까, 너는 직장인이니까, 너는 주부니까 정치 문제에는 입도 뻥끗하지 말라는 분위기. 정치인에게 모든 것을 맡겨 놓고, 그들이 뭔가 나쁜 짓을 저질러도 방임한 책임은 느끼지 못한 채 디스하기 바쁜 우리 국민들. 이 상황이 어딘가 이상하다고 느꼈습니다. 이상한 건 이상하다고 솔직하게 말하고 싶습니다. 아직도 약간 겁이 나기는 하지만 이제 확실히 밝히고 싶습니다. 이건 '이벤트'가 아니라 집회입니다." (75쪽)
세상 사람들이 모두 같은 생각을 할 리 없고, 저마다 생각의 결은 다를 수밖에 없다. 다른 건 다른 대로 인정하기. 이런 구호가 싫으면 집회장에 나와서 따라하지 않아도 되고. 마음에 들면 따라 하면 되고. 내가 사는 곳에 또 다른 문제가 있다면 그것에 대해 목소리를 내면 되고. 그렇게 실즈에서 갈라지고 교차하고 새로 싹튼 씨앗들이 오키나와와 간사이와 도호쿠 여러 지역들로 퍼져 나갔다. 주제는 제각각이지만 이들의 말 속에는 한 가지 핵심이 있다. '말하는 것' 자체가 중요하다는 것.
"스스로 사고하는 일은 말 그대로 자기 자신밖에 못 합니다. 스스로 말하는 일도 마찬가지입니다. 자기주장은 자기 자신밖에 못 합니다. 왜냐하면 그래야 내가 나 자신이 될 수 있고, 당신이 당신 자신이 될 수 있으며, 그가 그 자신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138쪽)
그 핵심은 역사를 꿰뚫는다. 70여년 전 일본 제국주의의 특공대에게, 가미카제로 동원된 젊은이들에게 "아니야 이건 아니야"라고 말할 자유와 기회가 있었다면 어땠을까. 특공대 출신 노인이 실즈 집회를 보고 신문에 투고를 했다는 얘기가 이 책에 살짝 언급돼 있다.
"특공대에 관한 책이나 기사를 읽어보면 하나같이 당시에 20살밖에 안 된 젊은이들이예요. 그들 대부분이 이 세상에 존재하는 수많은 행복을 맛보지도 못하고 죽었죠. 그런 특공대 출신 어르신이 '너희들처럼 살고 싶었다'라고 얘기한 거예요. 곰곰이 생각해보면 그분은 바로 저예요. 저는 그분들이 하지 못했던 무언가를 하고 있다고 생각해요. 이런 게 바로 세대를 잇는 의식이 아닐까 싶기도 하고요. 역사의식이라고 하나요?"
"그러니까 그분들의 이야기는 과거로부터 온 편지 같은 거라고 봐요. 과거가 얘기해준 거예요. '젊은이들아! 너희들이 하는 일, 그게 바로 우리가 하고 싶었던 일이다'라고요." (169쪽)
과거를 돌아보고 미래를 상상하기. 역사에서 힘을 얻고, 미래를 포기하지 말기.
"전 그 상상력이 정말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역사적으로 우리와 비슷한 일을 했던 사람들이 얼마나 많아요? 자유, 평화, 뭐 그런 것들을 위해서 끊임없이 싸어 온 역사가 있잖아요. 상상력을 가지고 있으면 그 역사 속에 있는 자기자신을 발견하게 돼요." (170쪽)
거창하다고? 꿈보다 해몽이라고? 이들의 상상력은 깜찍하고 유쾌하다.
우시다: 우리는 인류가 역사적으로 쟁취한 결과 위에 살고 있잖아요. 예를 들면 헌법만 해도 그래요. 우리가 이렇게 즐겁게 살아갈 수 있는 건 헌법이 있기 때문이고, 헌법은 중학교 교과서에서 배운 대로 로크나 몽테스키외 덕분에 존재하죠. 우리는 그들이 쟁취한 결과 위에서 살고, 그들은 또 우리 뒤를 지켜봐 주고 있고, 같은 편인 거죠.
오쿠다: 연설하는 내 뒤에 존 로크가 있다....
우시다: '저항권이다!'라고 외치지.
오쿠다: 'I have a dream!'이라고 외치는 사람도 있고.
우시다: '비폭력이다!'라고 외치는 사람도 있을 거야.
오쿠다: 사실 난 'I have a dream'이라는 말을 정말 높게 평가해. 생각해봐. 킹 목사는 공민권 운동을 어떻게 성공시킬지에 관한 계획은 언급한 적이 없어. 어떻게 하면 의회를 뒤집을 수 있을까 하는 내용은 입에 담지도 않았다고. '이렇게 하면 법률이 통과되니까 의회에서 이렇게 공격합시다'라는 말 따위는 하지 않은 거야. 만약 워싱턴에서 킹 목사가 20만 명을 이끌고 행진하면서 사람들 앞에서 'I have a plan!'이라고 외쳤으면 그건 좀....
(172쪽)
그래서 어떻게 됐냐고? 특정비밀보호법은 통과됐고, 아베의 전쟁법안들도 통과됐다. 일본이 자랑해온 70년 역사의 평화헌법은 위기를 맞았다. 그렇다면 이들은 패배한 걸까? 역사는 그렇게 단선적으로, 의회에서 법안 하나 통과될 때마다 승리하고 패배하는 식으로 흘러가는 게 아니다. 촛불의 경험이 한국의 민주주의에 미칠 영향은 당장 박근혜가 탄핵되고 아니고가 아니라, 한 세대, 아니 여러 세대에 미칠 '공동체의 역사'로서 나타나게 될 거라는 우리의 믿음처럼.
"'포기하지 마'가 아니라 '한번 더'가 중요하다고 강조했잖아. 나는 포기하지 말라는 말을 자꾸 내뱉는 사이에 우리가 점점 약해지는 느낌이 들어. 그런데 '한번 더'는 한번 끝나고 힘을 다 소진했더라도 '아냐, 다시 한번!'이라는 도전 정신으로 이어지니까 매번 제로에서 다시 시작할 수 있을 것 같고." (166쪽)
"전 통상산업성 관료 출신인 고가 시게아키 씨에게 들었는데, 너희들이 나타나기 전까지 어른들은 모두 어쩔 수 없다며 포기하고 있었다. 그런데 너희들이 반드시 저지한다고 하니까 '어, 저지할 수 있는 거야?'라며 놀랐다 그러시더라고요." (167쪽)
"결국 통과됐으니까 진 거 아니냐는 비판에 대해서는 마루야마 마사오씨가 반세기도 전에 철저하게 반박한 적 있어. 그는 애당초 '이겼느냐, 졌느냐'라는 이분법으로 생각하는 것 자체가 이상하다고, 반대 운동에는 그 자체로 큰 의미가 있다고 했지. 만약 반대 운동이 일어나지 않으면 법안은 아무런 문제도 없이 시행된단 말이야. 하지만 큰 반대 운동이 일어나면 당국은 그 법률의 운용에 신중을 기할 수밖에 없다고. 그런 고로 단순히 승리냐 패배냐를 가릴 일이 아니라는 게 마루야마 마사오씨의 정치적 리얼리즘이야." (215쪽)
위의 말은 요즘 내가 꽂혀(?)있는 다카하시 겐이치로와 실즈 주역 중 한 명인 오쿠다 아키의 대담 중에 다카하시가 한 말이다. 오쿠다는 이렇게 답한다.
"예컨대 원전만 해도 재가동이 시작됐으니까 탈원전 운동은 패배한 거라고 말들 하지만, 거꾸로 보면 50기 중에서 고작 1기만 돌아가고 있죠."
마지막 장은 이렇게 끝을 맺는다.
"포기하지 말고 계속해야 한다. 끝나면 다시 시작하면 된다. 쉬운 일이다. 몇 번이고 외치자. '좋았어, 한 번 더!'라고. 그리하여 30년 후, 일본은 100년 동안 전쟁을 하지 않은 나라가 될 것이다. 1000년 뒤에도 걱정 없다. 아마 누군가가 다시 시작할 테니까 말이다." (254쪽)
그런 거다. I have a plan이 아니라 I have a dream이 감동적인 이유, '한번 더!'를 외치게 만드는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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