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중동 소식.
미국 조 바이든 대통령이 사우디아라비아 국왕과 통화를 했다. 백악관은 "조지프 R 바이든 주니어 대통령이 사우디의 살만 빈 압둘아지즈 알 사우드 국왕과 (미국시간 9일) 통화를 했다"고 발표했다. 지역 개발을 논의했고 이란의 지원을 받는 예멘 후티 반군의 사우디에 대한 공격을 비롯해 공통의 우려사항들에 대해 대화를 나눴다고 밝혔다.
[백악관] Readout of President Joseph R. Biden, Jr.’s Call with King Salman bin Abdulaziz Al-Saud of Saudi Arabia
사우디 국왕과의 통화가 뭐 대단히 오랜만인 것은 아니다. 1년 전에도 통화를 했었다. 현재 86세인 살만 사우디 국왕은 2015년 즉위했는데 왕위에 올랐을 때부터 고령이었고 건강 상태가 좋지 않다는 소문이 많았다. 살만 국왕보다는 그 아들인 무하마드 빈 살만 왕세자가 사실상 국정을 맡고 있다. 사우디 국왕과 바이든이 통화한 것은, 사우디 측에 공적인 예우를 하는 느낌이랄까. 아니면 무하마드 왕세자와 통화하기가 싫은 것이거나. ㅎㅎ
지금 우크라이나 쪽이 시끄러운데다 미국은 중국, 러시아와 세계 곳곳에서 대치하고 있다. 야심차게 시작했던 이란 핵합의를 복원하기 위한 협상은 교착상태이고, 중동 상황도 여의치는 않다. 친미국가의 대명사였던 사우디와는 과거 버락 오바마 정부 때 미국이 이란과 핵합의를 하면서 관계가 벌어졌다. 뒤 이은 도널드 트럼프 정부는 사우디 편에 섰지만 바이든 정부가 들어서면서 아프간 철군으로 한동안 시끄러웠고, 미국에 의존해왔던 사우디와 아랍에미리트연합(UAE) 등 걸프 왕국들은 각자도생하는 분위기로 가고 있다. 그런 상황에서 사우디를 다독이기 위해 통화를 한 것으로 보인다.
통화 내용 가운데 맨 먼저 언급된 것은 예멘 문제였다. 무하마드 왕세자는 아버지 살만 국왕이 즉위하고 얼마 안 돼서 예멘을 공격했다. 당시 예멘은 ‘아랍의 봄’으로 독재정권이 무너진 뒤 정정불안을 겪고 있었다. 사우디는 이란의 지원을 받는 반정부 세력 후티를 무너뜨리겠다면서 공격을 했는데 작전은 형편없었고 어마어마한 민간인 피해만 불렀다. 그 여파가 한국의 제주도 예멘 난민 입국사태로까지 이어졌던 것이고.
후티 반군은 꺾이기는커녕 사우디와 UAE를 드론으로 공격하고 있다. 지난해 11월에 후티 반군은 사우디 항구도시 제다의 산유시설, 사우디의 자랑인 석유회사 아람코 시설을 공격했다고 주장했다. 올 1월에는 UAE의 아부다비 산유시설을 공격해 3명이 사망했다. 바이든은 살만과의 통화에서 "미국은 자국민과 영토를 지키려는 사우디를 지지하며, 예멘의 전쟁을 종식시키기 위한 유엔의 노력도 지지한다"는 점을 강조했다.
[월스트리트저널] U.S. to Send Jet Fighters, Warship to U.A.E. After Houthi Attacks
또 이란은 핵무기를 가져서는 안 된다는 점을 사우디에 확신시켰다고 백악관은 밝혔다. 중동은 지금 이란과 밀접한 나라와 이란과 사이 나쁜 나라들로 나뉘어 있는 형국이다. 걸프의 카타르에서부터 이라크, 시리아, 레바논 등등 이란의 입김을 받는 나라들이 있고 그 나라들에서 미국과 이란 간, 혹은 사우디와 이란 간 대리전이 벌어지고 있다. 중동의 안정을 위해서는 미국과 이란의 40년 적대관계를 풀어야 한다. 이란 핵 개발을 막아야 한다는 목적도 있다. 그런데 이란과 관계를 푸는 걸 사우디는 경계한다. 바이든은 이번 통화에서 이란과의 협상 과정에 대해 설명하고, 이란 핵 프로그램에 반드시 고삐를 매놓겠다고 말했다.
사우디 국영 SPA통신은 바이든이 살만 국왕과 협력 강화 및 지역 안정을 논의했다면서 예멘 전쟁 관련해 미국이 사우디를 지지했다는 점을 강조했다. 살만 국왕은 이란이 핵무기를 개발하는 것을 막아야 한다는 점을 지적했다고 전했다. 사우디 언론은 미국이 이란과의 핵합의를 되살리기 위해 협상 중인 시점에 최근 이란이 사거리 1450m 미사일을 개발했다고 보도하면서 이란의 위협을 부각시켰다.
[아랍뉴스] King Salman, US president discuss Houthi aggression against civilians
예멘 전쟁에 대한 바이든 정부의 입장은 좀 거시기하다. 예멘 내부의 정치권 싸움을 사우디가 전쟁판으로 만든 것인데 군사적으로도 엉망이었고 성과는커녕 인도적 재앙만 불렀다. 당초 사우디 편에 서서 함께 예멘 후티반군 공격에 나섰던 UAE조차 손 털고 나와버렸고, 올들어 후티 반군으로부터 반격을 받자 걸프의 맏형 격인 사우디에 볼멘 소리를 내고 있는 실정이다.
바이든도 그걸 모르지 않고, 그래서 예멘 내전을 종식시키려는 유엔의 노력을 지지한다는 점을 표시한 듯하다. 바이든은 지난해 취임하고 몇 주 안 됐을 때 사우디가 예멘에서 공격작전을 진행하는 것을 더 이상 지원하지 않겠다고 밝혔다. 그러면서도 사우디에 6500만달러 어치 공대공 미사일을 팔고 5000만달러 규모의 군 헬기 유지보수 관련 계약을 추진, 미국 내에서 비판이 일기도 했다.
[알자지라] Biden pledges US support against Houthi attacks to Saudi king
게다가 사우디는 인권 측면에서 보면 세계 최악의 국가들 중 하나다. 바이든 정부는 중국의 인권문제 제기하고 있지만 굳이 따지자면 사우디는 중국과도 비교되지 않을 정도로 인권 점수가 바닥인 나라다. 알자지라방송도 미국의 이런 이중잣대를 지적했다. 알자지라는 “바이든 대통령은 인권을 미국 외교의 중심에 놓겠다고 약속했고, 미국 안에서도 바이든 대통령이 사우디에 인권향상을 촉구해야 한다는 압박을 받고 있다”고 보도했다. 하지만 이번 대화에서 인권 얘기는 없었다.
우크라이나 문제로 지정학적 불안 커지면서 기름값이 치솟고 있는 상황인지라, 인권은 제쳐놓고 기름값 얘기를 했다. 지난해 10월에 바이든은 사우디가 주축이 된 석유수출국기구(OPEC)가 공급량을 늘리지 않아서 유가가 오르고 있다고 비난했다. 이번에도 에너지 시장을 안정시키는 문제를 살만 국왕과 논의했다. 우크라이나 때문에 유럽의 에너지 걱정이 클뿐 아니라, 올 11월에는 미국 중간선거가 있다. 기름값이 올라가면 이래저래 바이든 정부는 곤란한 상황이다.
하지만 사우디 측은 뜨뜻미지근한 답변만 했던 모양이다. 살만 국왕은 '석유시장의 균형과 안정'을 언급했다고 사우디 언론은 보도했다. OPEC도 중요하지만 OPEC에 속하지 않은 산유국 중에 중요한 나라가 러시아다. 그래서 OPEC+로 범위를 확대해서 러시아 등 비회원국들과도 산유량을 함께 조절하고 있는데, 살만은 러시아를 포함한 OPEC+와의 공급협정을 유지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한마디로 미국이 요구한다 해서 기름값을 떨어뜨리기 위해 더 증산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최근 OPEC은 산유량을 완만하게 늘리기로 결정했다. 올해 들어서만 국제유가가 20% 반등했고, 배럴당 100달러를 넘어설 것으로 시장분석가들은 보고 있다. 며칠 전 JP모건은 우크라이나 긴장이 더 고조되면 배럴당 120달러에 이를 수도 있다는 예측을 내놨다. 반면 미국 에너지정보국(EIA)은 지정학적 리스크 때문에 올라간 것이며, 수급 균형이 맞아떨어지면 올해 말까지는 안정을 되찾을 것으로 봤다.
[CNN] Oil could 'easily' hit $120 if Russia-Ukraine crisis escalates, JPMorgan warns
[미 에너지정보국] Short-Term Energy Outlook
코로나19로 침체됐던 경제활동이 재개되는 국면이라 석유 수요가 늘고 있는 것은 사실이며 OPEC이 나선다고 해서 유가가 순식간에 떨어지는 것은 아니다. OPEC은 회원국들의 산유량 쿼터를 늘렸다 줄였다 하면서 유가에 영향을 미친다. 2000년대 중반 미국이 이라크를 침공한 뒤 유가가 천정부지로 치솟았을 때, 사우디가 유가를 조절하지 않는 게 아니라 실제로 조절할 여력이 없다는 얘기가 많았다. 2년 전 러시아와 증산 싸움을 하다가 유가가 바닥을 치게 만든 일도 있었다.
OPEC 회원국은 13개국인데 중동과 아프리카 나라들이 대다수이고 남미의 베네수엘라가 포함돼 있다. 세계 석유 매장량을 놓고 보자면 OPEC 회원국에 묻혀 있는 게 약 80%다. 생산량을 놓고 보면 37%에 불과하지만 국제적으로 거래되는 원유의 60%가 OPEC 국가들에서 나온다. OPEC+는 러시아, 멕시코, 카자흐스탄, 말레이시아, 수단, 남수단 등과 중동에서 OPEC에 가입하지 않은 오만, 바레인 등을 포함한 10개국을 지칭한다. 이 나라들은 2016년부터 OPEC과 협력해서 산유량을 결정한다. 이 정도면 수출을 거의 하지 않는 미국을 빼고 대부분의 산유국은 포함된다고 볼 수 있다.
이런 국면에서 또 하나 눈길을 끄는 것은 최근에 트럼프 사위 재러드 쿠슈너가 사우디를 방문해 실세 왕세자와 만난 일이다. 트럼프는 계속 다음 대선에 나올 심산으로 지지자들을 규합하고 있다. 미국 블룸버그통신을 보니 트럼프 정부의 중동정책 틀을 만든 쿠슈너가 최근 중동 여러 국가들을 돌았으며 사우디에서는 무하마드 왕세자를 만나고 아람코의 아민 나세르 최고경영자와도 회동을 했다고 한다.
정치적 의도가 있는지는 해석이 분분하지만, 쿠슈너의 중동 이권만큼은 확실해 보인다. 쿠슈너는 백악관에서 일하는 동안 이스라엘과 아랍국들의 관계 정상화를 중간에서 도왔는데 그러고 나서 사모펀드인 어피니티 파트너스를 출범시켰다. 최근 방문에서 무하마드 왕세자가 움직이는 5000억 달러 규모의 사우디 국부펀드에 투자를 요청한 것으로 알려졌다.
[가디언] Specter of problematic crown prince looms over Biden’s Saudi Arabia policy
바이든은 살만 국왕하고는 통화를 했지만 무하마드 왕세자와는 집권 뒤 대화를 하지 않았다. 중동의 분란을 일으키는 인물로 보는 시각이 강한 듯하다. 2018년 사우디 왕정에 비판적인 기사를 쓰던 언론인 자말 카슈끄지가 터키의 사우디 대사관에 감금됐다가 잔혹하게 살해당한 사건이 있었다. 무하마드 왕세자가 이 살해의 배후로 지목됐다. 사우디의 인권탄압을 그대로 드러낸 사건이었고, 바이든 정부가 무하마드 왕세자를 대하는 태도에도 영향을 미쳤다.
무하마드 왕세자는 미국과 사이가 벌어지면서 중국에 가까이 가는 모양새였다. 중국으로의 석유 수출을 늘려서, 중국이 연간 사들이는 전체 수입액의 17%를 사우디가 차지하게 됐다는 보도도 있었다. 2020년 두 나라는 ‘포괄적 전략적 협력관계’를 맺었다. 무하마드 왕세자는 ‘비전 2030’이라는 대규모 국가적 프로젝트를 내세우고 있는데 중국의 일대일로 계획과 엮어서 경제협력을 늘리려는 움직임을 보여왔다. 지난해 11월 사우디 국부펀드는 중국 증시에 거래허가를 신청했다.
[로이터] Saudi Arabia expands share in China oil market, Russia lags
그럼에도 여전히 사우디에는 미국과의 관계가 매우 중요하다. 무하마드 왕세자는 이번 베이징 동계올림픽 개막식 참석자 명단에 올라와 있었지만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개막 직전에 ‘일정 상의 이유’를 들어서 빠진 것이다. 미국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는 사우디의 처지를 보여준다.
중국, 러시아와 무리하다 싶을 정도의 대립 국면을 만들어가면서 또한 세계 곳곳의 긴장에 대처해야 하는 바이든. 외교 전문가 대통령이라고 해서 기대를 모았는데, 세계의 분열과 대립은 그의 집권 뒤 오히려 심화되는 것 같다. 복잡하게 꼬인 문제를 어떻게 풀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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