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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정은의 '수상한 GPS'] 미국, 이란, 베네수엘라, 아르헨티나...남미를 흔드는 비행기 한 대

딸기21 2022. 8. 4. 1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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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잉747-300 화물기 한 대가 지난 5월 멕시코에서 자동차 부품을 싣고 출발했다. 지금까지 알려진 바로는 파라과이의 국경도시에 잠시 들렀다. 그러다가 악천후를 만났고, 원래 기착할 곳은 아니었지만 급유를 해야 해서 어쩔 수 없이 6월 6일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에세이사 공항에 착륙했다. 그 뒤로 화물기는 계속 그곳에 묶여 있다. 2달 가까이 지난 8월 3일, 미 법무부는 아르헨티나에 이 비행기를 내놓으라고 요구했다고 발표했다.

미국, 아르헨티나, 베네수엘라, 이란, 이스라엘, 파라과이… 온통 비행기 한 대 때문에 신경전을 벌이게 된 복잡한 사건이다. AP통신 등 외신들도 ‘참 기묘한 사건’ ‘미스테리 항공기’라고들 전한다.

 

A Venezuelan-owned Boeing 747, operated by Venezuela's state-owned Emtrasur cargo line, taxis on the runway after landing in the Ambrosio Taravella airport in Cordoba, Argentina, June 6, 2022. On Aug. 1, 2022, an Argentine judge upheld a ban on the plane and its crew of Venezuelans and Iranians from leaving the country. (AP Photo/Sebastian Borsero, File)


문제의 항공기는 원래 이란 항공사가 가지고 있었는데 베네수엘라에 팔았다. 이란 국영통신 IRNA 등에 따르면 이미 1년 전에 소유권이 베네수엘라 항공사로 넘어갔다. 그런데 미국은 이 비행기가 테러조직과 연결돼 있고, 따라서 미국의 제재를 위반한 거래였다고 주장하면서 아르헨티나를 압박했다. 그런 연유로 아르헨티나는 이륙을 불허하고 억류한 채 조사중인 것이다.

테러에 연루된 항공기? 이렇게만 말하면 무시무시하게 들리지만 테러계획과 이어져 있다는 얘기는 아니다. 미국의 테러조직 지정이 문제다. 이란의 정예부대인 혁명수비대, 그 안에서도 대외임무를 담당하는 조직이 알쿠드스라는 부대다. 미국은 혁명수비대 자체를 2019년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때 테러조직으로 지정했다. 이듬해 봄에는 알쿠드스 사령관을 이라크 바그다드에서 미군이 드론으로 암살해 세계가 시끌시끌했다(그렇게 긴장을 불러놓고 한국에도 호르무즈 해협에 파병하라고 요구해 정부가 결국 군대를 보냈고 말이다).

[Wilson Center] In Argentina, a Mysterious Plane

이란 군 조직 전체를 테러조직으로 미국이 규정했을 때에 비판이 거셌다. 어떤 테러를 어떻게 저질렀다 하는 게 아니라, 미국과 적대적인 이란의 군 조직이고 중동에서 미국의 이익에 반하는 군사활동을 한다는 이유로 테러조직이라 한 것이었으니. 미국의 ‘테러지원국 지정’과 마찬가지로, 테러조직 지정도 모호하고 자의적이라는 비판이 많다. 그럼에도 미국은 혁명수비대를 테러조직으로 지정하고, 관련된 금융거래나 관련인물들을 제재하고 있다.

 

An American flag waves outside the U.S. Department of Justice Building in Washington, U.S., December 2, 2020. REUTERS


그래서 비행기는 이란의 군사조직과 무슨 관계가 있는 것일까.

베네수엘라에 팔리기 전의 소유주는 이란의 마한항공이다. 마한항공은 2000년대 중반 한국에도 잠시 취항한 적이 있는 민간 항공사다. 1991년 설립됐고 테헤란에 본사가 있다. 미국은 마한항공이 혁명수비대를 지원해주고 있다며 2011년부터 제재를 시작했다. 따라서 미국의 허가 없이 마한항공이 화물기를 베네수엘라에 판 것은 미국의 제재법을 위반했다고 주장한다. 지난달 워싱턴DC 연방법원은 미국 수출통제법 위반으로 미국산 여객기를 몰수한다는 영장을 발부해 아르헨티나로 보냈고 미국에 넘기라고 요구했다.

미국은 베네수엘라도 제재하고 있으니, 이래저래 미운털이 박힌 비행기이기는 하다. 마한항공으로부터 화물기를 구입한 것은 베네수엘라의 엠트라수르라는 항공사다. 이 회사는 베네수엘라 국영항공사 CONVIASA의 자회사이고, 미국은 콘비아사도 제재 대상에 올려놓고 있다. 미국 제재를 받는 두 항공사가 멋대로 항공기를 사고파는 것을 그냥 두지 않겠다는 것이고, 기회가 왔으니 몰수를 해버리겠다는 것이다. 미 연방수사국(FBI)은 이란의 범죄행위와 관련된 일을 집요하게 추적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조치라고 주장했다.

[Aerotime Hub] US DOJ asks Argentina to seize Boeing 747 freighter linked to Iran

미국 법에 따라 미국 정부가 미국에서 거래하는 기업이나 개인에게 제재를 가할 수는 있지만, 이 화물기 거래의 경우 이란-베네수엘라 간에 이뤄진 일이다. 하지만 미국은 베네수엘라 측이 다시 이 화물기를 모스크바에 수출하기로 했다면서, 러시아까지 엮고 있다. 이스라엘과 미국 보수파 의원들은 이 화물기가 이란의 정보수집 활동에 쓰였다, 베네수엘라가 그걸 돕는 걸 막지 못했다, 등등 추궁을 하며 미국이 더 강하게 나가야 한다고 주장한다.

 

Police officers confiscate a box of documents during a judicial raid at the Plaza Central Hotel where the crew of a Venezuelan-owned Boeing 747 cargo plane are staying, in Buenos Aires, Argentina, June 14, 2022. (AP Photo/Gustavo Garello)


결국 미국은 아르헨티나를 윽박질러서 항공기를 내놓으라고 했고, 아르헨티나는 일단 억류만 해놨다. 화물기에 타고 있던 승무원 19명 가운데 14명은 베네수엘라인, 5명은 이란인인데 아르헨티나 측은 그 중 이란인 4명, 베네수엘라인 3명의 출국을 막고 조사를 하고 있다. 이럴 때 꼭 부추기는 이스라엘은 이란 승무원들이 시리아, 레바논 헤즈볼라에 보내는 무기밀매에 관여한 사람들이라고 주장한다. 예를 들면 이란인 탑승자 중 한 명은 혁명수비대 출신이고, 알쿠드스와 연결된 또 다른 항공사의 임원을 지냈다는 것이다.

이미 베네수엘라에 판 비행기라면서 이란인들은 왜 타고 있었을까. 이 화물기를 운항하는 데에는 5명이면 되는데 왜 19명이나 탔느냐, 수상하다… 이런 얘기도 나온다. 아르헨티나의 국영통신 텔람은 "이란인 탑승자들은 파일럿 교관들"이라고 보도했으나 이 점이 의혹을 부추기는 것은 사실이다. 그런데 아르헨티나는 이란 혁명수비대를 테러조직으로 간주하지 않는다. 승무원들을 붙잡아 조사하고는 있지만, 혁명수비대와의 연관성은 조사 대상이 아니라고 했다. 이를 놓고 미국이 아르헨티나를 설득 못 했다고, 공화당 일부 의원들은 조 바이든 정부를 질타한다.

 

알베르토 페르난데스 아르헨티나 대통령. twitter.com/alferdez


아르헨티나는 곤혹스런 처지가 됐다. 아르헨티나에서는 2019년 중도좌파 알베르토 페르난데스 대통령이 집권했다. 그러면서 베네수엘라와의 관계에 변화가 왔다. 베네수엘라에서는 미국의 숙적이던 우고 차베스 전대통령의 후계자인 니콜라스 마두로 대통령이 2013년부터 집권하고 있다. 미국과 친미 국가들은 마두로 대통령을 인정하지 않는다(한국의 문재인 정부도 마두로를 인정하지 않는다고 했다). 하지만 아르헨티나의 페르난데스 현 대통령은 집권 뒤 마두로 정부를 인정했다. 그는 베네수엘라 제재에도 비판적이며, 미국의 제재에 협력했던 전임 우파 정부 때의 기조를 바꾸고 있다.

좌우 대립이 심한 아르헨티나에서, 비행기 사건은 정치 쟁점이 돼버렸다. 항공당국은 화물기가 원래 다른 나라로 가려고 했는데 날씨가 나빠 착륙을 허용할 수밖에 없었으며, 착륙을 막을 만한 정보도 없었다고 해명했다. 하지만 일부 언론들은 "왜 다른 나라들은 허락하지 않은 베네수엘라 항공기의 착륙을 허용했느냐"고 비판한다.

특별검사의 죽음으로 드러난 아르헨-이란 비밀거래 의혹

또 아르헨티나에는 유대인 인구가 24만명이 넘는다. 1994년 7월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유대인 단체 건물에서 이란과 연관된 것으로 알려진 테러가 일어나 85명이 목숨을 잃었다. 그후 유대인 공동체의 이란에 대한 반감이 매우 높다. 이들 역시 이란, 베네수엘라와 연결된 항공기를 당국이 경계하지 못했다고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Venezuela's Nicolas Maduro meets Iran's Supreme Leader Ayatollah Khamenei in 2016


사건의 불똥은 파라과이로도 튀었다. 화물기는 아르헨티나에 내리기 전 파라과이에 착륙했고 사흘 뒤 이륙했다. 거기서 담배를 화물로 실었다는 얘기도 있고, 뭔가 숨기기 위해 위장용으로 화물을 실은 것 아니냐는 의혹도 있다. 한데 화물기가 잠시 내렸던 곳이 시우다드델에스테라는 국경도시다. 파라과이, 아르헨티나, 브라질 세 나라가 만나는 이 국경지대는 탈세와 문서위조, 마약밀매 등 범죄가 성행하는 곳으로 악명 높으며 세 나라 간 분쟁도 엮여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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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서 브라질 정보당국이 이 비행기가 이란의 비밀스런 음모와 관련돼 있다고 경고했다는데, 이 남미 나라들은 이란과 친한 레바논의 헤즈볼라가 국경지대에 거점을 두고 있다고 의심한다. 비행기 사건을 빌미로 파라과이의 마리오 아브도 대통령은 의회에 국가정보국(SNI) 예산을 늘려달라는 요청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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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네수엘라의 마두로 대통령은 미국이 자기네 항공기를 강탈하려 한다고 맹비난했다. 마두로 대통령은 3일 국영방송 팟캐스트에 출연해 “그들은 제국주의 법원이 내린 명령을 가지고 베네수엘라의 자산인 비행기를 훔치려 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 항공기가 중국, 러시아, 인도에서 남미 국가로 의약품을 실어나르는 인도적 지원에 쓰였던 것이라는 주장도 했다. 베네수엘라가 만든 중남미 위성방송 텔레수르는 화물기에 아르헨티나의 폭스바겐 공장으로 갈 자동차 부품들만 들어있었다고 보도했다. 미국이 제재를 핑계로 운항을 막아 부품 공급이 안 되고 있다고도 했다. 이란도 미국과 이스라엘의 음모에 의한 압류라고 주장했다.

 

국영방송에 출연한 마두로 베네수엘라 대통령.


미국의 압박 때문에 이란과 베네수엘라는 더욱 밀착하는 구도다. 베네수엘라도 산유국이지만 시설 가동을 제대로 못해 에너지난이 심하다. 2020년 이란은 베네수엘라로 유조선들을 보냈고 그 때도 미국이 제재 위반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지난달 말에 이란과 베네수엘라는 20년 기한의 장기 협력협정을 맺었다. 또 테헤란 주재 베네수엘라 대사가 새로 임명됐는데, 공군 사령관 출신 인사다. 베네수엘라의 우파 정치인들은 신임 대사가 아르헨티나에 억류된 항공기에 타고 있던 베네수엘라인 조종사와 공군 동료였다며 의혹을 키우고 있다. 미국, 남미의 우파들과 이스라엘은 최근 남미에 다시 '분홍빛 물결' 즉 좌파 집권이 늘어난 것을 이란이 정치적 기회로 이용하고 있다고 본다.

[MercoPress] Maduro picks Air Force man linked to Emtrasur for Tehran embassy

비행기 한 대 때문에 벌어진 소동, 영화 소재 같은 사건이다. 그 이면에는 미국과 이란의 적대관계, 적대국을 더욱 고립시키기 위한 이스라엘의 부추김, 베네수엘라를 둘러싼 남미의 정치지형, 좌우로 갈린 아르헨티나의 국내정치 등 온갖 이슈들이 들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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