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란츠 파농의 '검은 피부 하얀 가면'을 읽다가. 문득 마주친 문장에서, 머리 속에 잠시 어떤 생각들이 뒤섞여버렸다.
어떤 사람들은 내가 마음에 들 때 "너의 피부색에도 불구하고"라고 말한다. 내가 마음에 들지 않을 때도 "네 피부색" 때문은 아니라고 말한다. 그 어느 쪽이든 나는 이 끔찍한 순환론을 벗어날 수가 없다.
이것이 원래의 문장이다. 파농은 흑인이었고, 저것은 그가 맞부딪쳐야 했던 현실이었다. 나는 여성이기 때문에 이런 현실에 맞부딪쳐야 한다.
어떤 사람들은 내가 마음에 들 때 "네가 여자임에도 불구하고"라고 말한다. 내가 마음에 들지 않을 때도 "네가 여자이기" 때문은 아니라고 말한다. 그 어느 쪽이든 나는 이 끔찍한 순환론을 벗어날 수가 없다.
이건 어떤가. 다시 파농의 글.
항상 흑인 선생이고 흑인 의사고 그렇다. 점점 더 상처를 받으면서 나는 사소한 구실에도 치를 떨었다. 예컨대 한 (흑인) 의사가 단순한 의료사고라도 내면, 그것은 그 의사 한 개인의 종말 뿐만 아니라 그 이후의 모든 (흑인) 의사 지망생들의 종말을 의미한다. 그래, 흑인 의사에게 뭘 기대할 수 있겠니?
저 문장에서도 '흑인'을 '여성(여자)'로 바꾸면 그것은 그대로 나의 이야기이다. 파농을 여성의 관점에서 읽으려고 애당초 생각했던 것은 아니었다. 어디까지나 파농의 책은 제국주의와 탈식민주의에 대한 이야기이고, 파농은 흑인의 관점에서 제국주의라는 적과 탈식민주의(해방)라는 과제를 바라본다. 굳이 트집을 잡자면 파농 또한 남자이기 때문에 파농의 분석에서 예시되는 사례들은 극히 남성적이다.
하지만 나는 어디까지나 여자이기 때문에 여성의 관점에서 성차별/가부장적 차별이라는 적과 양성평등(인류해방)의 과제를 바라볼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과잉해석 내지는 지나친 상상이라고 비웃고 싶은 사람이 있다면, 같은 책에 나오는 파농의 말을 되돌려주고 싶다. "한 가지 형태의 비인간적인 행위와 다른 한 가지 형태의 비인간적인 행위 사이에서 우열을 가려내려는 것은 매우 유토피아적인 망상이라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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