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면일기 Journal Extime (2002)
미셸 투르니에 (지은이) | 김화영 (옮긴이) | 현대문학 | 2004-01-29
미셀러니 성격의 글들은, 의외로 익숙해지기가 쉽지 않다. 딱히 주제가 있는 것도 아니고, 굳이 주제를 따지자면-- 아마도 그 글을 쓴 사람 그 자체가 아닐까. 투르니에의 글은 투르니에가 그 소재이자 테마인 것이고, 마루야마 겐지의 글은 마루야마가 소재이자 테마다. 그래서 나는 미셀러니에는 여간해서는 손을 대지 않는다. 어떻게 보면 가장 가비얍고, 어떻게 보면 '사람'을 가장 열심히 들여다봐야 하는 것이 그 장르이기 때문에. 그렇기 때문에, '사람'을 모르고 보면 미셀러니만큼 별볼일없는 것이 없다.
반면에, 짧은 글들 사이에 묻어나는 촌철의 유머로 해서 글쓴이의 내면의 일단을 보게 될때에는 그렇게 즐거울 수가 없다.
투르니에의 글들은 투르니에를 보여준다-- 그리고, 글 속에 나타난 투르니에 할아버지의 모습을 보는 것은 언제나 즐겁다. 그것이, 힘겨운 '적응'의 과정을 참아가며 투르니에의 자질구레한 일상까지 들여다보는, 이유라면 이유다.
다행히도 투르니에라는 사람에게 익숙해지는 과정은 '견딘다'고 하기에는 굉장히 즐거운 과정이었다. '짧은 글 긴 침묵'도 그랬고, '예찬'도 그랬고, '헤르만헤세와 소크라테스의 점심'도 그랬다. 이 할아버지, 보통 웃기는게 아니고, 그래서 투르니에의 책을 손에 잡으면 대개는 키득키득거리게 된다. '외면일기', 나의 내면이 아닌 내 밖의 일기라니. 제목부터가 그럴듯하다.
프랑수아 미테랑 대통령이 우리집에 와서 식사를 하고자 한다고 예고해왔을 때 그 자리에 있던 어머니가 깜짝 놀라 묻는다. "아니, 대통령이 왜 너희 집에 와서 식사를 한다니?" "내가 유명한 사람이니까." 어머니는 한동안 말이 없더니 대꾸한다. "그런다고 내가 믿을 줄 알고!"
아마도 나의 불규칙했던 학교생활의 기억 때문에 어머니는 내가 신통치 않은 인생을 살 것이라고 굳게 믿었던 모양이다. 어느 일요일 아침 어머니가 TV에서 미사 드리는 광경을 시청하고 있다. 사제가 설교를 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솔직히 말해서 나는 세 사람의 동방박사의 모험 이야기에는 별로 흥미가 없습니다. 그러나 작가 미셸 투르니에가 상상해낸 네 번째의 동방박사 이야기는 여간 재미있는게 아닙니다."
나는 그 자리에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다가 텔레비전의 미사가 끝나고 난 다음에 그 설교에 대한 이야기를 다시 화제에 올렸다. "그것 보세요. 내가 아주 이름 없는 존재는 아니잖아요. 일요일 설교 때 내 이름을 들먹이기도 하니까요!" 어머니의 말: "아, 분명히 알아둬! 신부님이 작가 미셸 투르니에라고 했어." 나의 대답: "그래서요? 그건 사실 아닌가요?" 어머니의 대꾸: "그렇긴 하지. 그렇지마 괴테나 빅토르 위고였다면 작가 괴테, 작가 빅토르 위고라고 하진 않았을 거야."
물론이다. 그 '작가'라는 말이 일을 완전히 잡쳐놓은 것이다.
전형적인 투르니에식 우스개랄까. 나 어때? 나 굉장히 유명하다, 나, 꽤나 굉장한 작가라구! 그러니까 내 말 좀 들어보라고. 재미있지? 그게 인생인거야. 이렇게 말하는 것만 같아서, 그의 재치를 좋아하지 않을 수가 없다.
글 사이사이에 나타나는 박식함도 투르니에를 읽게만드는 유인요소 중 하나다. 재치가 결합된 박학다식만큼 재미난 게 또 있을까.
런던여행. 이번의 짧은 체류 중 가장 인상깊었던 것은 '리폼클럽'에서의 식사였다. 화려하고 고색창연한 곳으로, 쥘 베른느에 따르면 거기서 필레아스 포그가 80일간에 세계일주를 하겠다는 내기를 걸었고 마침내 그 여행을 성공리에 마치고 그곳으로 돌아온 것으로 되어 있다. 그 집의 책임자는 유머감각이 별로 없는지 그 클럽의 가장 유명한 회원들의 초상화들 가운데 그 인물이 초상화를 끼워넣지도 않았으니 유감천만이었다. 나는 그 가운데 얼 그레이 경이 끼어있는 것을 보았다. 그러나 그가 거기에 끼게 된 것은 그의 이름을 딴 유명한 차에 베르가모트를 첨가했기 때문이 아니라 1830년에서 1834년 사이에 수상을 지냈기 때문이라는 설명을 듣고 나는 많이 실망했다.
길지 않은 문장을 통해서 나는 어릴적 읽었던 '80일간의 세계일주'의 한장면 한장면들을 떠올린다. 베르가못향이 살짝 감도는 얼그레이의 향기가 맴돈다.
엘리베이터가 우리를 지하 30미터 아래로 싣고 내려간다. 소음이 여간 아니다. 거기다가 환기를 위하여 돌리고 있는 거대한 배기장치의 붕붕거리는 소리가 배경음을 이룬다. 내게 가장 놀랍게 여겨지는 것은 화강암, 편암, 모래로 이루어진 진흙의 순수함이다. 터널을 뚫는 사람들이 그 진흙 속으로 거대한 프레이즈반들을 박아넣고 있다. 쥘 베른느는 그의 예언적인 책 '20세기의 파리'에서 장차 건설하게 될 전철은 당연히 공중에다가 놓을 수 밖에 없는데 그 이유는 이 도시의 지하의 시설들이 너무나도 복잡하게 뒤얽혀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그 지적은 지하 20미터 미만까지는 맞는 말이다. 그러나 지하 30미터가 넘으면 파리의 하수도, 기초지반시설, 지하실 같은 것은 더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거기서는 사막 한가운데나 처녀림 한복판이나 마찬가지인 순수한 대지적 요소를 다시 만나게 되다. 인간의 문명은 불순물들의 얇은 막에 지나지 않는 것 같다. 나는 지하의 그 지점에서 사하라 사막 한가운데서나 발견할 수 있는 것과 같은 장미꽃 모양의 석고 결정체 한 개까지 발견했다.
박쥐가 지나가는 것을 보고 생쥐가 소리친다: "오, 천사로구나!"
내가 M.W에게 말한다. "나는 위대한 작품을 쓰고 위대한 사랑을 경험하는 꿈을 꾸었어." 그가 내게 대답한다. "내가 아는 자네로 보아, 오히려 위대한 작품을 쓰는 쪽이 더 어울릴 것 같네."
'내가 만약 대신(大臣)이라면' 이란 제목의 라디오 놀이프로에 초대받다. 각자가 장관으로 임명되면 자신의 정책을 발표한다. 나는 국방부를 달라고 했다. 나는 즉시 국방부의 이름을 '민간화부'로 바꾼다. 민간화란 군대를 민간인으로 변화시키는 작전이다. 예를 들어서 7월14일의 혁명기념일 군대행진 대신에 1989년 7월14일 대혁명 200주년 기념으로 장 폴 구드가 선보인 대형 퍼레이드 오페라를 보여준다. 라팔 전투기 대신에 산불 진화를 목적으로 하는 카나데르 비행기들의 시범을 보여준다. 항공모함 '샤를르 드 골'은 대형 테니스 코트, 다시 말해서 일종의 물 위에 뜬 롤랑 가로스 경기장으로 바꾼다 등등.
아를르에서 살던 잔느 칼르망이 123세에 사망하다. 그녀는 인류이 長老다. 특별한 섭생법이 있느냐는 질문을 받자 그녀는 이렇게 대답했었다. "분별있게 살아야지요. 그래서 나는 114살 때 술과 담배를 끊었어요."
우리 마을 정육점 주인: "투르니에씨, 나처럼 진짜 당신을 잘 아는 처지라면 당신이 쓴 책 같은 것은 안 읽어도 되는 거죠, 안 그래요?"
오늘밤 라디오를 듣다가 나는 옛 스승 가스통 바슐라르 선생의 부르고뉴 악센트가 섞인 목소리를 즉시 알아차린다. 그런데 애석하게도 그 목소리는 그에게 엉뚱한 질문들을 던지곤 하는 어떤 바보 녀석 때문에 자꾸 끊어지곤 한다. 그리고 방송이 끝나면서 이런 안내의 말이 흘러나온다. "여러분은 지금까지 1949년 가스통 바슐라르와 미셸 투르니에가 주고받은 대담을 녹음한 INA 자료 내용을 들으셨습니다."
"나에게 오직 내 분수에 맞을 정도의 양과 질의 진실만을 말해주십시오."
그래서 투르니에를 좋아한다. 이 할아버지의 재기넘치면서도 따뜻한 말들이 좋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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