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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인의 고통 Regarding the Pain of Others (2003)
수잔 손택 (지은이) | 이재원 (옮긴이) | 이후 | 2004-01-07
잔혹한 장면, 이른바 '엽기'에 대해 나는 내성이 거의 없는 편이다. 끔찍한 이미지를 보는 것은 정말이지 끔찍하다. 그래서 잔혹한 장면이 등장하는 영화도 보지 않고, 엽기 만화도 보지 않는다. 잔혹한 사진은? 사람의 신체를 훼손하는 모습이라든가 끔찍한 고통 속에 있는 사람들을 담은 사진들을 찾아가며 볼 일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쩔수없이, 내가 의도하지 않았는데도 내 눈에 들어오고야 마는 사진들이 있다.
영화나 만화보다 '현실'의 사진들이 더더욱 끔찍하다는 사실을 부인하기는 힘들다. 호러 영화라면, 굳이 돈 내고 보지 않으면 된다. 하지만 현실 속의 잔인함들, 이 책의 제목을 빌면 '타인의 고통'을 100% 외면하기는 불가능하다. 현실의 힘이란 그런 것일까. 나의 일이 아니다, 라고 애써 외면하려 해도, 그런 일(사건 혹은 사람들)이 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사실 만으로 이미 모른체할 수만은 없게되는 그런 것들. 머리 속에 그려보는 것만으로도 끔찍하지만 내 머리 속에 강하게 남아 있는 끔찍한 장면 몇가지를 다시 떠올려본다.
첫번째는 동티모르의 고문 피해자들 사진이다. 살아 있는 여성의 신체에 못으로 '그림'을 그린 인도네시아의 군인들, 철사로 나무에 묶여 있던 동티모르 남자의 몸에 박힌 못들. 그리스도의 수난? 그런 '은유' 따위는 상상조차 할 수 없게 만들어버렸던 잔인한 장면, 그리고 숨김없이 드러나있던 지배와 억압과 가학의 얼굴.
두번째는, 첫번째 장면에서 '가해자'였던 인도네시아, 그 내부의 피해자들을 담은 사진이다. 사진이라고 하기엔 너무나 끔찍했던 참수된 시신들. 더우기 이것은 2000년대, 지금 내가 살아가고 있는 인도네시아의 아체 지방에서 아주 최근에 벌어진 일들이었다. 타임지에 실린 아체 반군의 시신들을 보는 순간 목구멍이 턱 막히는 것 같은 메스꺼움과 오한이 밀려왔다. 세번째는 1990년대 초반 아프가니스탄에서 벌어진 일이다. 옛 소련 '괴뢰정권' 수반이었던 나지불라 대통령의 시신. 소련군이 물러난 뒤 카불을 점령한 반군들이 가장 먼저 한 일은 나지불라와 그 동생을 처형해 카불 시내 한가운데에 전시한 일이었다.
네번째는, 손택이 이 책에서 간략히 설명하고 있는 사진 에이전시 '매그넘' 전시회에서 지난해 보았던 수전 메이젤라스의 사진이다. 반토막 밖에 안 남은 시신은 아마도 라틴아메리카 어느 나라의 반군의 몸뚱이였을 것이다. 그리고 다섯번째는, 잔혹함을 이야기할 때 도저히 내 기억에서 빼놓을 수 없는, 80년 광주의 사진이다. 고등학교 시절의 이야기를 꺼내보자면-- 누군가에게 들은 이야기이다. 대학생이던 누군가의 책상 서랍 속에 광주학살 희생자의 사진이 들어있었단다. 이 대학생의 어린 조카가 한동안 잠을 못 자고 악몽에 시달리더란다. 왜 그럴까 물어보니, 이모의 서랍속에 들어있던 광주학살 사진을 아이가 보고만 것이었다. 광주학살의 사진들은 그 일을 직접 겪지 않은 사람들에게조차 시각적 내상을 입히기에 충분했다.
이런 사진들에 대한 기억을 왜 다시 끄집어내느냐. 손택이 이 책을 읽는 독자에게 요구하는 첫번째 과제가 '타인의 고통'을 담은 생생한 이미지들을 떠올리는 일인 것 같아서다. 저것들은 현실의 장면들이고, 공포영화의 한 장면이 아니고, 상상의 이미지도 아니라는 사실을 인정하면서 직시할 것을 손택은 주문하고 있다. 그래서 나는 그녀의 요구대로 내가 알고 있는 끔찍한 이미지들을 헤짚어, 나를 둘러싼 주변, 반경 몇100km를 벗어난 곳에서 계속해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을 머리 속에 재현해본다. 손택의 말대로, 사진의 역할은 '따라다니며 괴롭히는' 것임을 실감하면서.
그냥 떠올리는 것만으로는 순교자를 그린 성화를 보는 중세의 수도사들이나 스너프 필름을 힐끔거리는 관음증 환자들과 달라질 수 없다. 손택은 인간의 관음증적인 속성, 잔혹한 것을 보고 싶어하는 욕망에 대한 기존의 텍스트들을 언급하고 있지만 그 욕망 자체에 대해서는 별다른 평가를 내리지 않고 있다. 하지만 손택이 고야의 그림에서 카파의 사진, 중국의 잔혹한 형벌, 2차 대전 당시 유럽의 아이들 사진들을 열거하면서 잔혹한 이미지들을 우리 눈 앞에 들이대는 이유가 '관음증을 충족해보시오' 라는 뜻이 아님은 분명하다.
나는 이미지를 직시하라는 손택의 요구를 받아들여 첫번째 단계를 밟았다. 두번째로 손택이 우리에게 주문하는 것은 좀 특별한 요청이다. 특유의 신랄한 말투로 손택은 "연민을 없애라"라고 말한다. 연민은 사회의 윤활유이자 인간 사이를 흐르는 情의 요체라고 생각해온 내게, 손택의 주장은 너무 가혹하다... 어째서 그녀는, 고통받는 타인에 대해 연민을 갖는 것조차 '집어치우라'고 말하는 것일까. 이유는 분명하다. 우리가 사진 속 사람들에게 연민을 갖는 순간 그들은 '타인'으로 굳어지기 때문이다. 좀 떨어진 곳에서 고통받는 이들을 바라보면서, 혹은 조금 높은 곳에 올라앉아 동정하지 말라는 이야기다. 더불어 연민은 그 자체, 타인의 고통을 그저 보기만 할 뿐인 사람들에게 도덕적 가책을 줄여주는 면죄부 역할을 한다.
이 책에서 손택은 여러 종류의, 여러가지 이름의 전쟁들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스페인 내전과 2차 세계대전, 옛 유고 연방의 내전까지 이어지는 전쟁들, 그 전쟁들을 담은 사진들을 꺼내놓으며 손택은 전쟁으로 고통받는 사람들과 그들에게 고통을 가져다준 전쟁의 잔혹함을 이야기한다. 나는 전쟁을 겪어보지 못했다. 적어도 종군 사진기자들의 '작품'에 나오는 것같은 그런 전쟁을 겪어보지 못했다. 적어도 나는 지구상의 숱한 사람들이 지금도 겪고 있는 고통에서 떨어져 있는 셈이고, 그런 면에서라면 60억 인구중에 행복한 쪽에 들어갈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최근에 일어난 전쟁 중의 하나는 내가 많은 관심을 가졌던 전쟁이었고, 나는 손택의 글을 읽으면서, 사진들을 보면서 그 전쟁에 대해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2003년 미국이 일으킨 이라크전쟁은 미국의 주장대로 '최첨단 전쟁'이었다.
공습은 '정밀목표물'을 향해 집중됐고, 민간인 피해자는 이전의 전쟁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적었다. 전쟁의 이미지를 통제하는 펜타곤의 기술이 발달한 것과 함께 이를 상품화하는 매스컴의 능력도 엄청났다. 이 전쟁에서 대량소비된 이미지들 중 가장 압도적이었던 것은 공습의 불꽃들이었다. 육탄전이 사라진 자리를 공습이란 괴물이 대체한지 오래, 이 전쟁의 피해자들의 모습은 '부수적인 피해'라는 미 국방부의 용어에 버금가게 '부수적인 이미지'로만 존재했다. 이런 시대에는 '타인의 고통'은 눈에 보이기 더더욱 힘들어지고, 손택이 부정한 '연민'조차도 힘들어진다.
전쟁의 변화한 이미지에 당혹해 하고 있는 나에게, 손택은 독설 만큼이나 분명하게 "사색하라"고 말한다. "우리의 특권이 그들의 고통과 연결되어 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숙고해 보는 것, 그래서 전쟁과 악랄한 정치에 둘러싸인 채 타인에게 연민만을 베풀기를 그만둔다는 것, 바로 이것이야말로 우리의 과제이다. 사람들의 마음을 휘저어 놓는 고통스런 이미지들은 최초의 자극만을 제공할 뿐이니."
사색의 다음 단계에 대해 손택은 말하지 않는다. 행동하라, 이것은 이미지들에 파묻힌 나약한 나에게 손택이 글을 통해 요구하는 사항이 아니다. 그녀는 스스로의 행동을 통해 보여주는 사람이고, 나는 그가 제시해놓은 것들을 보면서 전쟁의 광포함과 인간의 나약함을 넘어, 행동해야만 하는 이유를 다시금 확인한다. 남은 것은 행동일 뿐이라는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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