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덩샤오핑 평전 Deng : A Political Biography (1997)
벤저민 양 (지은이) | 권기대 (옮긴이) | 황금가지 | 2004-08-20
덩샤오핑이라고라고라... 덩샤오핑의 평전이라고라고라...
덩샤오핑. 너무 거대한 이름이라서, 책을 손에 쥐기까지 우습게도 나는 조금 쉽지 않은 여러가지 생각의 단계들을 거쳐야 했다. 마오쩌둥과 함께 현대중국을 만든 지도자, 13억 중국의 현재를 설명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인물, '개혁개방의 설계사', 아흔을 바라보는 나이에도 장강을 헤엄쳐 건너 세계를 놀라게했던 작은 거인. 덩샤오핑이라는 인물에 접근하는 방법을 찾기가 쉽지 않을 것 같았고, 어떤 책을 읽어야 과연 이 사람의 진솔한 모습을 볼 수 있을지 고민이 됐다. 또한 어떤 책을 읽은들 이 사람의 진면목에 접근하는 것이 가능할까, 하는 섣부른 회의도 있었다.
"오늘날 중국인들이 가장 존경하는 지도자는 마오쩌둥이지만 가장 고마워하는 지도자는 덩샤오핑이다."
이 책의 광고문구를 보는 순간 '고마워하는'이라는 말에 '좋아하는'이라는 느낌이 겹쳐졌다. 중국 사람들은 덩샤오핑을 좋아하나보다, 이런 생각이 들면서 결국은 책을 손에 잡게 됐다. 처음에 나는 이 책의 저자인 벤저민 양이라는 사람을 색안경 끼고 바라봤던 것 같다. 어떤 인물인지 사전 지식은 전혀 없었고, 책을 다 읽고난 지금도 저자에 대해서는 별로 아는 바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책에 쓰여진 간단한 약력- 중국에서 태어났고 미국에 유학했다가 눌러앉은 사람이라는 것, 그것때문인지 몰라도 나는 책의 전반부를 넘기는 동안 저자가 덩샤오핑을 폄하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을 거두질 못했다.
책은 덩샤오핑의 키가 작다는 것에서 시작된다. 풍채 좋은 마오쩌둥과 달리 작은 키에 귀염성있는 얼굴이었던 덩샤오핑, '작고 평범한 덩씨'를 강조하면서 저자는 이 '작은 덩씨'가 어떻게 거인이 됐는지를 추적한다. 책은 '평전'이라는 이름에 걸맞고, 딱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덩샤오핑과 관련된 일들을 시시콜콜 오만가지 주워섬기면서 이 사람의 성격과 취향을 묘사해보는 것. 그 점이 이 책의 탁월한 점이고, 또한 단점이기도 하다.
덩샤오핑의 정치인생의 전반부(무려 일흔이 넘도록 덩샤오핑은 인생의 '전반부'를 보냈지만)는 수동태로 진행된다. 저자는 덩씨 아저씨에게 별다른 재능이나 특출난 사상이 없었다면서, 재능이 있었다면 '정치적인 재주' 즉 '마오쩌둥의 눈치를 살피는 재주' 뿐이었다고 말한다. 1970년대 중반까지 중화인민공화국은 마오의 제국이었고 마오는 제왕이었기에, 덩의 저런 재주는 덩의 운명을 결정한 핵심적인 요인이었다고. 곡절을 겪긴 했지만 덩은 어쨌든 마오에게 끝까지 버림받지는 않았었다.
죽어가는 마오가 덩을 후계자로 지목하진 않았지만 중국인들은 마오 사후의 혼란을 잠재울 지도자로 결국 덩을 선택하지 않을 수 없었고, 나이로 따지면 늙을대로 늙은 덩은 혼돈 속의 공화국을 이어받아 경제대국의 초석을 닦는다--는 것이 책의 줄거리다.
마오와의 관계를 덩의 인생의 핵심으로 놓았기 때문에 덩의 인생의 '전반부'는 그다지 재미가 없다. 책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는 전반부의 덩은 그저 눈치 잘 보고 대인관계 감각이 있는 인물에 지나지 않아보인다. 책이 재미나게 느껴지기 시작한 것은 덩의 행위가 '능동태'로 해석되기 시작하는 후반부부터였다. 시기적으로 따지자면 대약진운동이 비극으로 귀결되고 덩이 마오의 카리스마에 의심을 품기 시작하는 때부터라고 볼 수 있겠다.
덩은 마오의 제왕적 카리스마의 위력을 잘 알았고 거기 거스르지 않게 노력하긴 했지만 이 때부터 마오에 대한 인간적인 존경심과 애정은 사라지기 시작했다는 것이 저자의 분석이다. 더불어 덩을 평가절하하는 듯했던 저자의 시선에서도 존경심이 묻어나오기 시작한다. 책의 묘미라면 묘미랄까, 저자는 앞서 덩을 폄하했던 부분들, 바로 그것들이 위대한 지도자 덩을 만든 힘이었다는 역설을 강조한다.
"덩은 수많은 부대와 함께 전투를 치렀지만 전문가의 관점에서 보면 군사 문제를 그다지 잘 알지 못했다. 소련측과 마르크스-레닌주의를 두고 유창하게 논쟁을 했지만 사실 잘 아는 편은 아니었다. 근대 경제나 경제학에 대해서도 아는 바가 적었지만 1980년대를 통틀어 경제 재건에 폭넓게 관여했다. 또한 국제 문제에도 전혀 전문가가 아니었지만 그는 국제연합과 여러 외빈들 앞에서 자신만만하게 연설했다. 사실을 말하자면 덩은 모든 일을 조금씩 할 줄 알았지만 어느 분야에도 전문가가 아니었다. 정치만 제외하고 말이다. 덩은 자신이 다른 무엇이 아닌 정치인임을 보여주었고, 그가 정통했던 것은 바로 인간관계와 조직력이었다."
저자의 주장에 따르면 '좋은 일이건 아니건 덩은 처음부터 공산주의 교리 원칙에 노예처럼 헌신하지 않았으므로 궁극적으로 그것들을 떨쳐 버리기가 더욱 수월했다'는 것이다. 철저하게 '반교조적인' 생애를 살았던 덩샤오핑의 철학, 즉 '실용주의'는 철학이라 이름붙이기 뭣할 정도로 '내용이 없다'. 말 그대로 실용주의이기 때문에 어떤 도그마도 갖고 있지 않은 것, 그러나 가장 큰 힘을 발휘할 수 있는 것이 바로 덩샤오핑의 철학이라는 것이다.
책에는 덩의 면모를 보여주는 여러가지 일화들이 나와 있어서, 적어도 덩샤오핑이라는 지도자에게 접근하는 한가지 길은 되어주었다. 하지만 여전히 남는 의문들. 중국은 대체 어떤 나라인가. 중국은 대체 어떤 나라를 향해 가는가. 일단 현재의 모습은 경제대국/미국의 카운터파트로 가는 것같긴 하다. 책은 97년 덩 사망 직후에 출간된 것 같은데, 덩이 만들어놓은 기본 틀이 앞으로도 계속 유지될 것이라는데에 방점을 찍고 있고, 적어도 덩 사망 이후 7년이 지난 지금 저자의 예상은 들어맞고 있는 것 같다.
하지만 덩이 고심 끝에 후계자로 낙점했던 장쩌민, 상하이 출신의 벼락출세 정치인이란 소리를 들었던 그 사람은 그닥 뚜렷한 인상을 남기지 못한채 결국 물러나버렸다. 장쩌민의 은퇴와 뒤를 이은 후진타오 세력의 집권을 어떻게 봐야할 것인가는 또다른 문제이겠지만, 장쩌민이 사실상 '실각'한 것으로 봐야 한다는 견해가 최근 많이 나온 모양이다.
그렇다면 덩의 '후계자 선택'은 잘못된 것이었나?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개혁개방은 중국에서 대세가 된 듯하고, 실용주의 또한 시대의 흐름으로 인정받는 모양이다. 세계 곳곳에는 '마오주의 게릴라'들이 적잖게 존재하고 있지만 '덩주의자들'에 대해서는 별로 들어보지 못했다. 하지만 저기, 13억 인민들이 마오주의 대신 덩주의를 추종하고 있다지 않은가. 그러니 덩은 과연 '거인'의 대열에 오를법한 인물이다. 천안문 사태로 숱한 비난을 받긴 했지만 '귀엽게 생긴 덩씨 아저씨'의 약발은 당분간 계속될 것 같다.
책은 덩의 인간적 면모, 성격, 행동 양태 따위를 들어 덩의 정치행보를 서술하는데 촛점을 맞춘 것이어서 개혁개방을 향한 덩의 정치적 선택과정에 대해서는 의외로 소홀하다. 독자로서 유추해볼 수 있는 것은, 덩이 비록 '정치적 인간'이긴 했지만 정치적 야심이 인민을 위한다는 마음까지 잡아먹지는 않았다는 것 정도. 저자의 말대로 덩은 '정말로 원시안적이고 복잡한 마음을 소유한 정치인'이었던 탓에 여전히 내게는 '미지의 거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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