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슐러 K. 르귄 (지은이) | 최용준 (옮긴이) | 시공사 | 2004-10-27
어술러 르귄. 이름은 들어봤는데, 이 작가를 만나는 것은 이 책이 처음이었다. 어릴적엔 인간이 아닌 것들이 말하고 꿈을 꾸는 이야기(이것이 내가 판타지를 정의하는 단순한 방법이다)들을 몹시 좋아했었지만, 최근엔 반지제왕 한편 빼면 판타지를 거의 접하지 못했다. 그러면서도 이 책을 선뜻 장바구니에 넣었던 것은 첫째는 제목이 멋져서, 둘째는 르귄이라는 이름 때문이었다.
르귄의 소설책을 본 것은 처음이지만 '오멜라스를 떠나는 사람들'은 예전에 소리님이 여기 올려주셔서 읽어봤었다. 한동안 무력감과 자괴감에 빠져서 우울증같은 기미를 보이던 때, '오멜라스를 떠나는 사람들'을 읽으면서 엉엉 울었다. 나의 무력감과 자괴감을 곱절로 확장해버리는 것 같은 기분에 작가를 반쯤 원망하고, 반쯤 경외하면서.
그래서 내게 르귄이라는 미지의 소설가의 이름은, 잔인하고 무서운 세상에 대한 공포와 무력감, 자괴감, 그리고 멍하니 앉아있는 나를 직시해야 한다는, 깨어있어야 한다는 어떤 절박감, 의식, 이런 것들과 결부되어 있었다. 르귄의 의도와 상관없이 나는 그런 '코드'로 르귄이라는 이름을 받아들였고, 그래서 르귄의 소설집 첫장을 펼치기까지 더없이 두근거렸다.
아마도 르귄은 판타지 업계에선 자못 신화적인 존재인 모양이지만, '초기' '단편' 걸작들이라는 변명조의 선전에서 알 수 있듯, 이 책에 실린 작품들은 초기 시험적('실험적'이 아니라) 작품들이다. 이후의 장편 소설들을 전혀 안 읽어봤기 때문에 이 작가에 대한 평가는 보류하는 수밖에 없겠지만 실망스러운 부분도 적지 않았다.
복제인간(쉽게 말하면 일란성 쌍둥이)을 무슨 기계 부품이나 되는 양 묘사해버린 촌스런 디스토피아적 상상력(<아홉 생명>), 동양 여자는 우주시대가 되어도 여전히 정절의 상징으로 남아있다는 생각(<제국보다 광대하고 더욱 느리게>) 등등이 눈에 거슬린다.
르귄이 저 소설들을 썼던 시기가 1960년대라는 점을 고려하면 대단히 '진보적'이었던 걸로 봐야겠지만, 2004년인 지금, 최소한의 과학 상식이 있는 사람이라면 그렇게 눈먼 독자인 척 해줄수는 없을 것 같다. 나머지 단편들은-- 장편을 읽은 독자들을 위한 서비스 단편집, 말하자면 매니아들을 위한 메이킹 필름 같다는 생각. 뒤편의 역자 후기는 아예 이를 공식화하고 있다.
내게 깊은 인상을 남긴 것이라면, 오히려 판타지라는 장르와 상관없이, 작가가 보여주는 세상에 대한 관심, 그 치열함과 집요함이었다. 모든 소설은 작가가 선택한 은유를 통해 세상을 보여준다. 이 책에 실린 르귄의 단편들은 인간과 사회에 대한 끊임없는 관심을 계속 상기시켜주고 있다. 이것들이 '관심'을 넘어 '통찰력'의 형태로 드러나 있는 르귄의 장편들을 읽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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