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잔 손택 (지은이) | 이민아 (옮긴이) | 이후 | 2002-09-09
수전 손택의 '타인의 고통'을 최근 재미있게 읽었기 때문에, 망설임 없이 이 책을 주문했다. 결과는... 참담하다. 대체 저자가 말하고자 하는 테마가 뭔지, 그걸 잘 모르겠단 말이다. 손택은 유명한 문화비평가이고, 이 책은 손택이 1960년대 초중반에 썼던 평론들을 모아놓은 책이다. 아마도 당시는 손택이 이름 그대로의 '평론가' 활동에 가장 열심이었을 시기였던 것 같다. 따라서 이 책에 나타난 손택의 모습은 '타인의 고통'에 나온 것과 같은, '실천하는 지식인'으로서의 면모와는 사뭇 다르다. '타인의 고통'이나, 그 밖에 손택이 뉴욕타임스 같은 언론에 기고했던 많은 현실참여적인 글들과 달리 '장르로서의 평론'에 몰두해 쓴 글들이라는 점이고, 다시 말하자면 이 책이 재미 없다는 얘기다.
재미없는 이유는 여러가지가 있겠지만, 어쩌면 가장 근본적인 원인은 손택의 잘못이 아니라 내게 있을 것이다. 손택이 이 책에서 비평한 여러 장르의 예술작품들을 나는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까뮈의 '이방인' 정도밖에 못 읽어본 내가, 감히 뉴욕의 연극에 대해 무엇을 알리오. 그러니 팍팍 깎아 말하자면 손택의 최근 명성에 기대어 국내 독자들에겐 그닥 상관없는 평론집까지 출간해버린 출판사의 상술을 욕해버릴 수도 있을 것이고, '해석에 반대한다'고 도발해놓고서 해석을 남발하고 있는 손택을 욕할 수도 있을 것이다. 첫머리에 나오는 '해석에 반대한다'에서 손택이 제시한 원칙들이 그녀 자신의 개별 '평론'들에서 어떻게 적용이 되고 있는지 영 알수가 없다.
책의 타이틀이기도 한 '해석에 반대한다'에서 손택이 말하는 가장 확실한 논지는, 예술 작품을 감상하면서 '내용'과 '형식'을 구분하는 이분법적 태도를 극복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스타일'을 강조하는 것으로 나아가기도 하는데, 기존의 '도덕주의적인'(혹은 잘난척하는) 평자들은 작품의 내용을 중시하되 스타일을 무시함으로써 정작 이 두가지가 효과적으로 결합되어야만 가능한 진정한 '감상'을 방해해왔다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내가 궁금해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 '예술 작품을 형식과 내용으로 나누어서 감히 내용이 있어야만 좋은 작품이라 말하지 마라' '예술 작품에 윤리(특정 집단의 도덕)라는 잣대를 들이대지 마라, 히틀러 치하의 예술에도 미학은 있다'라고 말하는 이 시기의 손택과, 이후 실천적 지식인 내지는 평화운동가로서 손택의 면모가 연결이 잘 안 된다는 것이다.
각설하고 책은 별로 재미 없었고, 우리나라의 문화적 토양과 전혀 다른 것들에 대한 비평이었기 때문에 영양가도 별로 없었다. 다만 공상과학 영화들을 비평한 글은 재미있었다.
여기서 내가 궁금해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 '예술 작품을 형식과 내용으로 나누어서 감히 내용이 있어야만 좋은 작품이라 말하지 마라' '예술 작품에 윤리(특정 집단의 도덕)라는 잣대를 들이대지 마라, 히틀러 치하의 예술에도 미학은 있다'라고 말하는 이 시기의 손택과, 이후 실천적 지식인 내지는 평화운동가로서 손택의 면모가 연결이 잘 안 된다는 것이다.---->내 생각은 좀 다른데, 예술에 대해 내용과 형식의 이분법이나 도덕주의를 거부한다는 것을 그의 실천적 지식인으로서의 면모와 굳이 연결시킬 이유가 있을까.(연결의 필요가 없다기 보다는 모순되는 것이 아니라는 뜻...) 무의식적으로 그 둘을 연결시키고 있다는 사실이 바로 수잔 손탁이 '해석에 반대한다'에서 반대하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드네.
이책 전 공짜로 파본을 얻었어요. 기대했는데 좀 미국식 저널리즘을 제가 좀 안 좋아해서(그래서 매튜 리들리도 좀..) 그저 그랬다는 느낌.
근데 여니님이 인용한 부분이요, 전 오히려 그래야 잘 연결되는 거 같은데..^^;
여니언니 말이 맞아요. 제가 문제를 제기하고 싶었던 것은, '타인의 고통'에 나타난 손택의 '실천적 비평'들이, 과연 손택 자신이 주장했던 것처럼 '이분법을 극복한' 것이었는지 의심스럽다는 거예요.
지나간 북리뷰 읽는 재미가 쏠쏠하구먼. 내가 뭔가 할 말이 있는 책들이라서 더 재밌다. 요즘 딸기의 독서경향은 가히 전방위적이구나.
음..나도 사실 이 책, 괜히 샀다 싶은데 뒷부분에 나오는 연극, 문학 비평들이 개인적으로 크게 관심있는 부분이 아니어서,(엄청 두껍잖아 또) 그런, 앞부분, 그러니까 '스타일에 관하여' 부분은 딸기와는 좀 달리 꽤나 공감하면서 읽었는데.
뒷 부분 실제 비평이 이 앞부분의 주장과 매체되는가 하는 문제는 나도 모르겟지만..(책을 끝까지 읽지도 않았음) 앞부분에서 손택이 주장하는 것 자체는, 오늘날의 비평풍토에 비추어볼 때 상당히 공감가는 면이 있었거든. 적어도 "나찌즘 예술에도 윤리는 있다"는 식의 주장은 아니라고 봐. 스타일을 무시하지 말라는 말이 내용보다 형식에 주목하자는 말은 아니잖아. 그보다는 오히려, 예술작품은 결국 '형식'으로만 존재한다는 것, 내용이란 오로지 그 형식을 '통해서만' 끄집어낼 수 있는 것이라는 것, 그래서 예술비평은 작품 '너머에' 있는 개념에 관한 것일 뿐 아니라 '매체 그 자체'에 대한 비평이어야 한다는 것을 쉽게 망각하는 비평 풍토에 대한 경고라는 거지. 아마도 이건 취향적으로 문학적 혹은 텍스트적 기반을 가진 사람들에게는 쉽게 공감가지 않는 부분일지도 몰라. 언어는 가장 개념화된 매체니까. 하지만 비텍스트적 예술(미술이나 영화) 분야에서 일하는 나 같은 사람에게 손택의 경고는 쉽게 공감이 가는 부분이었다는.
물론 미술작품은 어차피 텍스트적 비평이 접근하기 어려운 분야이니 젖혀놓고라도, 내러티브가 있고 스크립트가 있기 때문에 자주 텍스트적 비평의 '먹이'(?)가 되는, 영화같은 분야에서 손택의 경고는 의미가 있다고 봐. 영화의 개념은 오로지 영화라는 시청각적 매체를 통해서만 주어진다는 것을 우리나라 영화 비평가들은 자주 잊는 것 같아. 그러니 이데올로기비평 혹은 내러티브 비평은 있어도 진정한 의미에서 '영화매체' 비평은 없는 거지.
아, 그리고 실천적 입장과 이 문제는 결코 무관하지 않은 것 같아. 왜냐하면 빌렘 플루서의 말대로(이 사람 책 참 좋은데 조만간 여기 소개하고 싶음), 오늘날 비판적 지성의 임무는, 우리를 둘러싼 각종 기술장치들이 우리와 어떻게 투쟁하고 또 어떻게 협력하는가, 암튼 그 코드해독을 하지 않고서는 해결될 수 없는 것 같으니까. 한마디로 요즘같은 시대에 19세기의 문자중심적 사고방식만을 가지고는 요즘 문화의 정체를 올바로 알 수 없고 그래서 비판적 대안도 제시할 수 없다는 거지. 예컨대 플루서는, 사진에 대한 올바른 비평(정치적으로건 사회적으로건 올바른 비판적 시각을 갖는 비평)은, 사진을 '어떤 현실을 단순히 모사한 것'으로만 보아서는 결코 이루어질 수 없고, '사진은 결코 세계를 향한 단순한 창이 아니라 (그 자체 코드를 갖는) '그림'이라는 것'을 이해해야 가능하다고 하더라고. 전자의 태도가 이데올로기적, 개념적 비평(손택이 비판했던, '너머' 만을 보려고 하는)이라면 후자의 비평이 진정한 비평이라는 거지.
언니, 멋져요!
헉..쑥스.. (근데 저 리뿔에 적어놓은, 플루서의 '사진의 철학을 위하여'는 혹 시간되면 함 읽어봐라. 좋더라. 사진에 관한 이야기만이 아니라 요즘의 문화코드를 이해하고 비평의 가닥을 잡는데 도움이 되더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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