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과 지식의 약탈자들 BioPiracy
반다나 시바. 배기윤 외 옮김. 당대
반다나 시바의 '물전쟁'을 읽고서 좀더 체계적으로 쓰인 이 저자의 다른 책을 읽어봐야지 했었다. 그래서 고른 것이 이 책, '자연과 지식의 약탈자들'이었는데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생태주의에 대한 나의 왜곡되고 못된 인식에 일침을 놓은, 의미깊은 만남이었다.
책은 선진국, 그리고 선진국의 초국적기업들이 주장하는 '지적재산권'이라는 우스꽝스런 권리를 '합법화된 해적질'이라 논박하는 것으로 시작해서 유전공학의 문제점을 비롯한 기술우월주의/과학적 환원주의 전체에 대한 비판으로 나아간다.
책은 단순히 유전공학의 '윤리적 문제점'을 거론하는 것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21세기를 지배하게 될 것으로 보이는 환원주의적/제국주의적/선형적 가치관 전체를 비판하고 있다. 말하자면 환경운동에 대한 글이라기보다는 환경(생태)-여성-지역-평화로 이어지는 대안적 담론에 해당된다. 생태 환경 이런말들에 대해 모종의 거부감을 갖고 있던 내게는 인식을 전환하는데 큰 도움이 된 것 같다.
내가 제일 먼저 접했던 시바의 글은 유전자조작 식물, 그중에서도 번식기능을 거세해버린 이른바 '프레데터 식물'을 언급한 짧은 논문이었다. 이 책에서는 단편적인 언급을 넘어 생명공학 기업들이 하는 일을 상세히 설명하면서, 기술을 독점하고자 하는 초국적기업과 서방 선진국들의 압력을 제국주의의 식민지 개척의 새로운 단계로 단정한다. 과거 유럽이 제3세계를 '무주지' 즉 생명이 없는 '자연'으로 간주하고 식민지화했듯이, 이제는 생명체(그리고 생명체의 내부-유전자)마저도 '무가치한 자연'이라 주장하면서 식민화하고 있다는 주장이다.
이런 제국주의화의 과정은 비서구적 지식체계, 자연과 상호작용하면서 혁신해온 각 지역의 지식체계와 그것을 만든 사람들을 철저히 배제하면서 이뤄진다. 동시에 시바는, 이 과정이 여성의 가치를 평가절하하고 없애버리는 과정이라고 본다. 즉 서구적-남성적-선형적 가치체계가 비서구적(지역적)-여성적-순환적 가치체계를 제거하는 과정이라고 보는 것이다.
시바는 이른바 '지리상의 발견'에서 자본주의의 대약진과 '발전' 개념의 확산, 그리고 자유무역 지상주의와 유전공학 혁명으로 이어지는 일련의 과정을 '모든 다양성을 사상해버리려는 획일화의 과정'으로 보는데 여기서 그녀의 통찰력이 빛난다. 획일화는 지배/억압구조와 위계질서를 기반으로 하고 있고, 이 위계질서는 선진국-후진국/서구-제3세계/남성-여성 등 지구상에 존재하는 모든 차별들을 포괄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야말로 '글로벌한 문제'로 부상한다.
그렇기 때문에 생명공학이라는 이름이 붙여진 기술지상주의/환원주의자들에 맞선 싸움은 단순히 단작이냐 복합경작이냐, 유전자 조작 농산물이냐 유기농이냐 하는 수준의 문제를 넘어서 사회적-경제적-문화적 다양성을 되살리기 위한 싸움이 된다. 이제부터 해나가야 할 정치는 '역동성과 다양성을 통한 재생의 정치'가 되는 것이다.
시바는 인도에서 자신이 주도해왔던 다양한 사티아그라하(투쟁)들을 예로 들면서 몇가지 대안들을 제시한다. WTO의 지적재산권 협정에 대한 대안으로 내놓는 것은 경제적 이해관계 대신 지역 주민들의 생태적 권리를 보장하는 '집단적 지적 재산권' 개념이다. 시바는 DNA혁명 이후 적나라하게 나타나고 있는 '생물제국주의'에 맞선 이런 운동들을 가리켜 '생물 민주주의'를 위한 운동이라 부른다.
이런 운동들이 글로벌 자본주의 앞에서 적실한 영향력을 가질 수 있을까-- 비관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시바 같은 운동가들이 '반세계화'라는 (다소 애매하긴 하지만 그만큼 포괄적이고 포용력있는) 거대한 물결을 이미 일으키고 있으니까.
"오늘날과 같은 다양성의 조작과 독점의 시대에 씨앗은 자유의 장소이자 상징이 되었다. 씨앗은 자유무역을 통한 재식민화 시대에 간디의 실잣는 물레가 했던 바로 그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이 작은 '씨앗들의 싸움'이 다양성과 역동성이라는 결실을 맺을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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