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이비드 캐너다인 | 버나드 S. 콘 | 에릭 홉스봄 | 테렌스 레인저 | 프리스 모건 | 휴 트레버-로퍼 (지은이) | 박지향 | 장문석 (옮긴이) | 휴머니스트 | 2004-07-12
최근에 다카시 후지타니의 '화려한 군주'를 재밌게 읽었다. 메이지 유신 이래 군국주의 시기 천황을 정점으로 하는 일본 '근대 의례'의 탄생 과정을 흥미롭게 풍부하게 분석한 책인데, 저자는 홉스봄이 주장한 '만들어진 전통' 개념에서 기본 틀을 빌어왔다고 밝혀놨다. 그 덕에 이 책, '만들어진 전통'에까지 손을 대게 됐는데 읽은 느낌을 간략하게 정리하면 '재미는 없지만 유용한 분석이었다'라는 것이다.
홉스봄과 몇명의 영국 학자들이 쓴 이 책은 우리가 '오랫동안 지속돼 온 것'으로 믿어 의심치 않는 '전통'의 상당부분이 실제로는 극히 최근의 시기에 시작된 것이거나 혹은 의도적으로 '만들어진' 것이라고 지적한다. 동시에 이렇게 만들어진 전통들이 어떻게 '역사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지게 되었는지를 설명한다. 영국 학자들의 저술인만큼 책의 대부분은 영국의 사례를 설명하는데에 할애돼 있다(이 책이 나처럼 영국에 별 관심 없는 독자들에게는 재미가 없을 수밖에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책의 대략적인 논지를 설명한 서문을 읽고 나면, 나머지는 케이스 스터디에 해당된다. 저자들이 '만들어진 전통'의 대표적인 사례로 드는 것은 스코틀랜드의 킬트와 백파이프. 일본 만화 '캔디캔디'에서 안소니 등등이 폼잡을 때 걸쳤던 그 옷, 근사한 스코틀랜드 귀족의 상징처럼 여겨졌던 체크무늬 치마가 실은 직물상인들과 과대망상증 귀족주의자들이 손잡은데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이다.
책은 스코틀랜드에 이어 아일랜드와 잉글랜드의 사례를 차례로 분석한다. 빅토리아 시대 영국 왕실 의례의 '발명'에 대한 설명은, 분량은 많았지만 별로 재미는 없었다. 근대 민족주의의 정립과 동시에 이뤄진 여타 유럽국들의 사례에 비해 영국 케이스를 지나치게 '특별한' 것으로 다루고 있다는 느낌도 좀 들었고, 무엇보다 이 책에 참여한 학자들의 글솜씨가 별로였다. 이밖에 영국 식민지였던 인도와 아프리카에서 이뤄진 '전통의 발명' 과정을 설명하는데, 이 쪽은 논지도 명확하지 않고 케이스도 많지 않아서 좀 부실했다는 생각.
오히려 재밌었던 것은 홉스봄이 집필한, 20세기 유럽과 미국 등에서 벌어진 '전통의 탄생' 쪽이었다. 홉스봄의 분석 대상은 국가적/공식적으로 제안되고 진행된 의례들 뿐만 아니라 동창회와 축구(!) 등등 다종다양한 '현대의 전통'들까지 포함하고 있다. 영국에서 시작된 현대 축구가 어떻게 '스포츠=귀족의 것'이라는 도식을 넘어서 중산층 이하의 서민들에게 파고들어갔는지, 그리고 축구의 다종다양한 경기외적인 형식들이 어떻게 '전통'의 성격을 갖게 됐는지를 설명한다.
지금 한창 손톱 물어뜯고 있을 부시와 케리가 미국 예일대 동창인 동시에 해골단(엘리트서클) 멤버들이라는 것은 다 알려진 사실이지만, 이런 '동창회 인맥'의 형성과정도 홉스봄의 칼날 아래 놓인다. 전통의 영역을 넓혀 풍부하게 해석해놓은 홉스봄의 글들은 재미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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