삐딱하게 보기 Looking Awry
슬라보예 지젝 (지은이) | 김소연 (옮긴이) | 시각과언어 | 1995-03-01
라캉도 모르면서 지젝을 읽는다? 나는 라캉에 대해 전혀 아는 바가 없다. 라캉이라는 이름은 여기저기서 봤지만 도대체가 머리가 아파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젝의 책을 읽고난 느낌은 한마디로 '재미있었다'가 되겠스무니다... 라캉을 모르면서 지젝을 읽는 만용을 저지른 보람은 충분히 있었다.
라캉을 모르기 때문에 지젝을 읽었고, 지젝이라는 훌륭한 선생님을 따라서 '라캉식으로 대중문화 삐딱하게 보기'를 하는 작업은 재미있었다. 이 책은 라캉의 이론을 대중문화 작품들을 통해 해석해주는 것이기도 하고, 대중문화 작품들을 라캉의 눈을 빌어 들여다보는 것이기도 하다.
책은 현실과 실재, 욕망과 충동의 문제를 다루는 것에서 출발해 헐리우드 영화와 추리소설 같은 대중문화 장르들을 넘나들며 이미지의 이면에 숨겨진 공포와 환상을 파헤친다. (안타깝게도, 이 책을 읽으면서 뼈저리게 느낀 나의 무지함은-- 예상과 달리 라캉의 정신분석 이론에 대한 무지함이 아니라 히치코크 내지는 영화에 대한 무지함이었다)
영원히 거북이를 따라잡을 수 없는 아킬레스의 패러독스처럼(양자역학 전문가들이라면 이 패러독스 자체에 극심한 거부감을 느꼈겠지만) 쾌락은 '내재적으로 불가능한 것'이라는 데에서 지젝은(혹은 라캉은) 출발한다.
지젝은 현대의 욕망의 역설을 적나라하게 드러낸 소설들을 예로 들면서 "욕망은 환상을 통해 만들어지는 것이며, 욕망의 실현은 '충족'에 있는 것이 아니라 충족되기까지 '끝없이 쫓아가는' 그 과정에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지젝에게 있어 외디푸스의 아버지, 즉 '살해된 아버지'라는 모티브는 애초부터 불가능한 것이었던 아들의 쾌락을 방해하는 역할을 하는 것이 아니라면서 신화적 모티브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보여준다.
그에게 아버지의 역할은 근원적으로 불가능한 쾌락에 터부(금기)를 덧씌우는 기제로 작용함으로써 사실상 우리를 교착상태에서 구해주는 존재라는 것이다. 죽음에서 돌아온 아버지를 통해 우리는 쾌락의 충족을 지연시킬 핑계거리를 찾게 된다.
그러나 지젝(라캉)이 보여주는 현실과 실재의 메커니즘은 좀더 복잡하다. 상징적 메커니즘은 실재의 어떤 한 조각에 고정돼야만 의미가 있는 것으로 판명된다. 핼리혜성(기호)이 공포감과 불안감을 불러일으킨뒤 재앙(실재의 응답)이 일어나는 것처럼, 어떤 사물/사건이 '기호'로 읽히는 것은 실재의 응답이 있을 경우에 한한다.
오늘날 우리 모두가 직면해 있는 '실재의 응답'으로 지젝은 생태학적 위기를 거론한다. 생태학적 위기는 '우리 삶에서 자명한 확실성의 영역을 잠식하는 것'이기에 궁극적인 형태의 위기가 된다. (하지만 '자연의 균형이라는 관념을 폐기하라'는 '라캉식 요구'를 구체적으로 어떻게 충족시킬지에 대해서는 아쉽지만 언급하지 않았다).
본격적인 대중문화 분석으로서 지젝의 작업은 이 책에서 히치코크의 영화들에 집중돼 있다. 지젝에 따르면 '내가 대상을 보는 것이 아니라 대상이 나를 응시한다'. 이 지점에서 관점의 전복이 이루어지는 한편, '응시'는 대상과 나의 관계를 분열로 이끄는, 즉 나의 현존을 교란시키는 '오점이자 얼룩'이 된다. 나는 거리를 두고 (안전한 곳에) 떨어져서 대상을 보지만 응시의 과정을 거치면서 내 머릿속의 프레임이 부서져버리는 것이다. 대상은 내 머리 속에 개입해들어오면서 (히치코크 영화의 사물들처럼) 기괴한 것으로 변해버린다.
지젝이 제안한 '라캉식으로 대상을 보기'는 이렇게 일상의 기괴함을 극대화함으로써 공포와 환상을 직시하게 한다. 이같은 작업이 현학성을 넘어 대중과 만나는 것은, 공포와 환상의 '기호'들이 '실재의 한 조각'과 연결돼 있다는 점을 끊임없이 환기시키기 때문이다.
지젝은 이런 '낯설게 하기'를 이데올로기적 징환과 연결시킨다. 국가기구에 의해 의도적으로 선택되어 끊임없이 우리의 뇌리를 떠도는 기호들에 대해, 이런 것들의 인위적인 성격을 비난하는 것만으로는 불충분하다고, 우리가 해야하는 것은 이런 징환(신호)들을 오히려 컨텍스트로부터 독립시키는 것이라고 말한다. 이런 종류의 낯설게 하기를 통해 우리는 징후와 우리 자신을 동일시하게 되는데, 이를 정치의 영역으로 연결시킨 분석이 흥미롭다. 군중심리 혹은 집단광기처럼 하나의 징후(예를 들면 스스로 유대인을 때려잡는 몽둥이가 된다든가)에 매달리기도 하고, 트라우마를 안겨준 무언가에 집착함으로써 고통을 극복하는 효과를 얻기도 한다. 환경운동가들이 구호화한 '체르노빌'이라는 은유에 이르면 '징후와의 동일화'는 전복의 수단이 된다.
지젝의 글에서 눈에 띄는 또 한가지는 '환상의 윤리학'이다. 지젝은 타인의 환상공간에 침입하는 것, 그럼으로써 그의 꿈을 망치는 것이 곧 죄라고 말하면서 죄에 대해 정신분석학적 정의를 내린다. 라캉에게서 이어받은 이같은 '환상의 윤리학'을 통해 우리는 자유주의적-민주주의적 윤리학(인간의 자연권/보편적 이성)의 와해에 대응할 수 있다고 말한다.
(이는 나로서는 수긍하기 힘든 부분이기도 했다. 타인의 꿈 또는 환상에까지 '인권'이라는 잣대를 적용할 수 있도록 해준다는 점에서 유용할는지는 모르지만, 아무리 철학자들 사이에 '계몽주의의 시대는 갔다'고 이야기하는 것이 유행할지언정 인간의 자연권/보편적 이성을 모두 부인할 수 있을 정도의 시대가 과연 된 것일까? 이 문제는, 구미의 철학자들이 너무 쉽게 포스트모던을 얘기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그보다는 송두율 식의 '비동시성의 동시성'이 여전히 존재하고 있지 않은가 하는 나의 근본적은 의문과 관련이 있겠지만.)
이 문제가 중요한 것은, 지젝의 문제의식이 히치코크 분석을 넘어서 정치적 실천의 문제로 나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지젝은 형식적 민주주의가 고도의 추상화를 전제로 하고 있으며, 주체가 상실된 추상화는 결코 구체적이고 본질적인 연관들을 해소할 수 없다고 말한다.
민주주의에 있어서도 (대중문화의 컨텍스트들과 마찬가지로) 주체는 공허 속에서 병적인 오점으로 더럽혀져 있다는 것이다. 형식적 민주주의 안에서 주체는 오직 민족주의의 이름을 걸고서만 나타나게 돼있으며, 민족주의는 신화를 통해 집단적 쾌락을 조직하는 방식일 뿐이다. 이런 언급은 물론 지젝이 민족주의의 폭력적 분출을 겪고 있는 동구권의 지식인이라는 조건에서 나온 것이기도 할 터이다.
지젝은 "서구의 형식적 민주주의 내에서 환경보호론자나 페미니스트가 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 되며, "일단 정치적 프로그램으로 형성된 '생활의 패러다임' 내에서의 근본적 변화라는 기획은 반드시 형식적 민주주의의 토대 자체를 파들어가게 돼있다"고 말한다. 이런 지적은 굉장히 설득력 있지만, '라캉만이 진정한 포스트모더니스트'라고 말하는 지젝에게는 과연 어떤 해법이 있는가. 민주주의에 대한 현란한 해석, 그리고 공허감, 그런 것일까. 이 물음에 대해 나는 책을 읽으면서 답을 찾지 못했다.
책을 읽고난 뒤에도 라캉은 여전히 불가해한 존재로 남았다. 하지만 어찌됐든, 지젝을 따라 대중문화를 보는 동안 '틈새를 본다'는 느낌이 들었고, 이 점에서는 대단히 재미있었다. 라캉은 어떤지 모르지만 적어도 '지젝처럼 보기', 즉 '삐딱하게 보기'에는 모종의 훈련이 필요하며 그것이 묘한 쾌감을 준다는 것은 분명하다. 남은 물음들에 대한 대답은 천천히 찾아봐야만 할 것 같다.
그런데 좀 더 뒤로 가면 지젝은 타인의 환상 공간을 침입하지 않는 것을 윤리로 보는 것을 자기 비판하고, 자기의 욕망을 포기하지 않는 것이 윤리라는 측면을 더 강조하는 것 같아요. 자본주의와 민주주의에 대해서도 점점더 비판적이 되어서는 레닌을 반복해야한다, 진정한 혁명적 급진성을 회복해야 한다는 식의 주장을 하기도..
여튼 딴 거 빼놓고도, 이 사람 참 글 재밌게 쓰죠. 엄숙주의에 빠져있는, 다양한 문화를 즐길 줄 모르는 학자들이 보고 제발 좀 배웠으면 좋겠어요. 하긴, 그런 형식 자체가 그 사람들의 내용이자 밥줄이기야 하겠죠.
덧- 지젝이 이번에 부시 당선을 보고 쓴 글 링크. http://www.inthesetimes.com/site/main/article/1662/ The Liberal Waterloo(Or, finally some good news from Washington!)
번역 해서 올려라.
누군가 해준 번역 :P
http://pbbs.naver.com/action/h_read.php?id=anar_3&nid=3638&work=list&st=&sw=&cp=1
비겁한 녀석...
생각해보니, 재주껏 글 물어왔는데 '비겁한 녀석'은 너무 심한 것 같다.
꾀많은 녀석...
(언니, 또치 쟤가 언니한테 :p라고 메롱도 하는걸.. 건방지다 그치..)
제가 그래두 딸기님의 리플을 보고 깜짝 놀라 번역을 아니더래두 충실한 요약 정도는 해볼까했습니다. --;
(이렇게 소심한 제가 어찌..^^;)
맞아, 소심한 주제에 메롱도 했다 이거지...
계속 좋은 글을 물어오지 않으면 때려줄거야, 또치.
지젝은 이제 징글징글해서 리플 안달까 하다가..^^(여기도 지젝 저기도 지젝..음...) 라캉몰라도 지젝 읽는데 지장없음. 딸기가 훌륭히 잘 소화해낸 것 같은데.
실은 이번 학기에 지젝과 헤겔을 읽으면서 느낀 것은, 내가 라캉을 정말 몰랐다는 것.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는 것이야. 학문의 길은 멀고도 험하구나.(아니 내가 이런 말을...헉..암튼 이번 학기에 난 아마추어 연구자와 프로페셔널 철학자의 차이를 처음으로 알았다고나 할까, 반성많이 했지)
근데 지젝은 '삐딱하게 보기'에서는 라캉을 '진정한 포스트모더니스트'라고 말하지만 '그들은 자기가 하는 일을 알지 못하나이다'를 읽어보면 실은 그 말은 그렇게 손쉽게 받아들여서는 안되는 면이 있어. 왜냐하면 포스트모더니즘을 모더니즘의 계승으로 보느냐 단절로 보느냐 그런 근본적인 물음에서 시작해서, 이성과 비이성, 보편과 특수, 등등 이런 손쉬운 대립구도를 설정하는 것 자체를 의문시하고 있거든, 사실 그것이 헤겔의 기획자 라캉의 기획이기도 하다는.. 그러니까 "당신은 보편적 이성을 택하려고 하느냐 개인적 쾌락을 택하려고 하느냐:"라는 질문구도 자체가 특정한 관점에서만 타당한 것이지. 쾌락원칙이 내적 한계에 의해서만 성립하듯이, 지젝의 시각에서 보면 '보편적 이성'이란 그 이성의 내적 한계(즉 비이성)와 동일한 개념이거든.
에에 암튼 지젝, 재미있는 사람이고 글쓰기 능력, 종합능력이 탁월한 사람이긴 한데, 이제 좀 지겨울려고 해. 많이 읽어서 지겹다는 것이 아니라, 그 능력의 한계가 보이니까 좀 지겨워. 대중적인 면에서 창조성은 있지만 개념적 창조성은 그다지 없다는 생각이 들어.
'대중적인 면에서 창조성은 있지만 개념적 창조성은 그다지 없다'
-> 제가 요즘 알라딘 블로그에서 놀아나고 있는데요
어떤 철학자 두 양반이 저걸 갖고 싸우더군요.
한쪽은 언니 말한대로 얘기하고, 한쪽은 거기에 반대하고.
즉 '찬지젝-반지젝'의 싸움이랄까나. 저는 한개도 모르니깐 부채질만 했어요.
나한테 여전히 이해가 안가는 분들이 바로 인터넷 게시판 같은데서 철학논쟁 벌이는 분들..인터넷에서 할 수 있는 재미난 일들이 얼마나 많은데..그런건 오프 술자리에서 그냥 하시지들..(음 근데 알라딘 블로그란게 뭐니? 알라딘에서도 블로그 서비스하니?)
술자리에서 할 수 있는 재밌는 얘기가 얼마나 많은데 지젝얘기나 한단 말입니까..^^
<어떻게 지내십니까> 라는 질문에 지젝은 뭐라고 대답할까?
아마 "저의 증상을 즐기고 있습니다. 당신도 좀 그려셔야 할 껄요"라고 답하지 않을까.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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