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지스 드브레, 라는 이름때문에 책을 골랐다. 아마도 프랑스어 원문이 꽤나 현란했을 것이라고 짐작하게 만드는 화려한 문장들, 정신없는 반어법들. 비단 미술의 역사에 국한되지 않고(그 자신은 '매개론'이라 부르지만) 서양문화를 종횡무진하는 화려한 생각의 편력. 그럼에도 별로 재미는 없었지만 맨 처음에 인용해놓은, "덧없는 것에 대한 고뇌가 없다면 기억이란 것도 필요하지 않으리라"라는 문장 때문에 결국 다 읽었다. 언제 어느 부분에서 드브레의 통찰력과 맞닥뜨리게될지 모른다는 생각에, 지리한 독서의 와중에도 기대는 끝까지 줄어들지 않았다. 저 문장이 너무나도 강렬하게 나를 사로잡아버린 탓이다.
덧없는 것에 대한 고뇌가 없다면 기억이란 것도 필요하지 않으리라. (28쪽)
기술과 신념의 공동의 진화는 우리를 보이는 것의 역사 속에 세 시기들로 이끌어간다. 즉 마술적 시선과 미적 시선, 그리고 경제적 시선으로. 첫번째 것은 우상을 불러내고 두번째 것은 예술을, 세번째 것은 영상적 시각을 불러내었다. 비전 이상으로, 거기에 세계의 조직이 있다. (47쪽)
그림으로 그려진 감각에는 언어적 등가물이 없다 (54쪽)
클로망 롯세, '회화는 의미를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그 앞에 선 관객에 따라 그 스스로 의미가 된다.' (56쪽)
이미지가 그 고유한 수단을 통해 인정받지 못하면 못할수록, 더욱더 그것을 말하게 할 해설자들이 필요해질 것이다. (59쪽)
하나의 이미지는 영원하고도 결정적으로, '최선의 독해'가 불가능한 수수께끼이다. (66쪽)
발터 벤야민이 '기술적 복제 가능성'으로 인한 그 소멸을 한탄했던 이 거룩한 분위기 즉 '아우라'는 그가 그렇게 염려했던 대로 사라져버린 것이 아니라 인격화되었을 뿐이다. 우리는 작품들을 더이상 우상화하지 않는 대신 예술가들을 우상화하고 있다. (71쪽)
이미지는 모든 사람과 신이 만들어가는 하루하루마다, 크고 작은 비용을 들여가며 무의식적인 모방성향을 제공한다. 자기와 동일시하는 상상적 모델의 문제는 결코 새롭지도 또 서구만의 것도 아니다. 우리가 가정할 수 있는 것은 빙하기의 젊은 들소 사냥꾼이 벽화를 보았기 때문에 쓸데없이 만용을 부리는 위험스런 짓들을 했었으리라는 점이다. (128쪽)
어째서 단테는 '중세의 시인'이며 단 일년 차이밖에 없는 그와 동시대 사람은 벌써 '르네상스 화가'라고 불리는 것일까? 왜 뉴턴의 연속적,동질적, 동위체적인 공간이 이미 그보다 한 세기 전에 원근법의 발견자들에게서 찾아지는 것일까? 어째서 프라고나르의 가벼운 화풍은 단지 궁전의 각도를 바꿔놓았을 뿐인데도 그토록 깊게 앙시앙 레짐의 몰락을 알리고 있는 것일까? 왜 풍경화가 위베르 로베르의 폐허들이 혁명의 파괴들을 예고하는 것일까? 왜 터너는 열역학보다 먼저 불의 은유들을 그려 보이는가? 왜 큐비스트의 작품에서 관점의 해체가 기초적인 인문학적 주제의 성급한 소멸을 재촉하는 것일까? 왜 미래파는 문학이기 이전에 파시즘의 한 형태인가? 왜 1939년 이전에 막스 에른스트가 그린, 방향 감각을 상실한 도시들 속에서 제2차 세계대전의 윤곽이 어른거리는 것일까?
왜냐하면 감각적 이미지는 이 세상 속에서 메아리치며, '열등한' 에너지의 원천으로부터 자양분을 취하며, 따라서 '우월한' 정신활동보다 덜 감시받거나 더 반칙적이며, 더 자유롭거나 덜 통제받기 때문이다. 이미지는 더 멀리 그리고 더 낮게 포착하는 레이더를 만든다. (13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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