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낮에도 어두운 슬럼가의 판잣집. 전기가 들어오지 않거나, 전기요금 낼 돈도 없는 빈민촌이 환하게 밝아진다. 전기가 아닌 햇빛으로 반짝이는 물병, 1.5ℓ짜리 페트병으로 만든 등불이다. 최소한 낮동안이라도 천정을 뚫고 박아넣은 물이 든 페트병을 통해 햇빛을 끌어들일 수 있다. 이 간단한 페트병은 각도를 잘 맞춰 설치하면 55와트 전구 만큼의 빛을 낸다. 전기요금도 필요없고 제작비용도 거의 들지 않는데다 한번 설치하면 5년은 간다.
이 장치의 아이디어를 낸 것은 브라질의 기술자 알프레두 모세르였다. 정전이 잦은 브라질에서, 더군다나 대도시 곳곳에 넘쳐나는 판잣집에서 지붕을 살짝 뚫고 유용하게 쓸 수 있는 자연광 전구를 2002년 개발한 것이다.
지붕에 요렇게 물병을 박아넣으면
실내는 이렇게 빛이 들어오고
이렇게 집안이 환해진다는 것. 사진은 inhabitat.com 등에서 가져왔음
중남미에서 빈민들을 위한 기술을 연구하던 미국 매서추세츠공과대학(MIT) 연구생들은 페트병을 슬레이트 조각에 박은 ‘모듈’을 만들어 이 햇빛전구가 널리 퍼질 수 있게 했다. 필리핀 구호기구 마이셸터재단의 이약 디아스는 2011년 이 방식을 전파하기 위한 사회적 기업을 세웠다. 모세르와 마이셸터재단, MIT 등은 ‘태양광 물병전구’라 불리는 이 장치를 빈민가에 설치하는 ‘빛의 리터(Isang Litrong Liwanag)’ 운동을 함께 벌이고 있다.
버려진 페트병을 재활용해 쓰레기를 줄이면서 친환경 빛을 전달하는 이 장치는 간단하지만 획기적이다. 영국 BBC방송은 12일 전구를 만든 미국의 토머스 에디슨에 빗대어, 모세르를 ‘현대의 에디슨’이라 소개한 기사를 웹사이트에 올렸다. 재벌이 된 에디슨과 다른 점이 있다면 모세르는 여전히 가난하다는 것이다. 페트병 전구를 만들어 유명해졌지만 스스로를 ‘사회 디자이너(social designer)’라 여기는 모세르는 여전히 상파울루의 작은 집에 살면서 1974년산 자동차를 몰고 다닌다.
페트병 하나가 어떻게 사람들의 삶을 바꾸는가- '빛의 리터' 홈페이지에 들어가면
나라별 사례들이 멋진 애니메이션과 함께 나와 있습니다.
이 기술을 개발한 모세르.
Alfredo Moser: Bottle light inventor proud to be poor /BBC
1966년 독일 경제학자 에른스트 슈마허는 개발도상국들에 적합한 ‘중간 수준의 기술’을 보급하는 것이 비용·에너지가 많이 들어가는 첨단기술들보다 훨씬 유용하다고 주장했다. 개도국이나 산업화된 나라의 교외 지역에서 돈 없는 이들의 노동을 도와, 원하는 결과를 가장 싼 비용으로 가장 쉽게 얻을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복지를 위한 기술전략이라는 것이었다.
슈마허는 영국에서 이를 위해 ‘중간기술개발그룹’을 만들었다. ‘중간기술’은 ‘적정기술’이라는 용어로 바뀌었지만, 슈마허의 생각들은 구호개발기구나 사회적 기업 등을 통해 퍼져나갔다. (슈마허의 중간기술론은 느린걸음 출판사에서 나온 <굿워크>에 잘 나와 있습니다)
항아리와 항아리 사이에 젖은 흙을 넣어 음식물 저장기간을 늘린 ‘항아리 냉장고’. www.ecocidades.com
적정기술을 발전시키는 주축은 모세르 같은 글로벌 시대의 에디슨들이다. 나이지리아 교사 모하메드 바 아바는 ‘항아리 냉장고(Pot-in-pot)’로 유명하다. 질항아리 안에 작은 항아리를 넣고, 그 사이에 젖은 모래를 넣으면 완성되는 초간단 장치이지만 열대의 나이지리아에서 이 간단한 냉장고를 이용하면 식품을 20일 가까이 신선하게 유지할 수 있다. 토기를 만드는 집안에서 태어나 자란 바 아바는 이웃의 수단인 가족이 먹을거리를 저장하지 못해 애먹는 것을 보고 이 냉장고를 고안했다. 바 아바는 2000년 이 발명으로 롤렉스 발명상을 받았다.
햇빛을 모아 가열하는 태양광 조리기. peda.gov.in
페루의 아이들이 MIT 디랩에서 개발한 '자전거 세탁기'를 돌리고 있다. web.mit.edu
인도의 부부사업가 디팍 가디아와 시린 가디아는 금속판으로 태양열을 모아 음식을 데우는 ‘솔라쿠커’를 개발했다. 부부는 국제지속가능에너지기술상 등을 받았으며, 안드라프라데시주 티루파티에서는 3만 가구 이상이 매일 이 기구로 요리를 하고 있다. 미국의 사회적 기업가 티머시 프레스테로는 아프리카의 병원들을 위해 중고차로 만든 인큐베이터를 공급했다.
오스트리아 출신의 기술자 겸 디자이너 빅터 파파넥은 적정기술의 선구자였다. 그는 유네스코 개발지원 프로그램에 참여해 인도네시아 발리를 방문한 뒤 버려진 캔과 땅콩기름을 이용한 ‘깡통라디오’를 만들어 보급했다. 파파넥이 재직했던 미국 뉴욕 쿠퍼유니언대학 공학자들은 1998년 파파넥이 숨진 뒤에도 적정기술 개발을 계속하고 있다. MIT 산하 연구소 ‘디랩’은 자전거처럼 페달을 밟아 세탁조를 돌리는 ‘스핀워셔’라는 세탁기를 만들어 페루 등 여러 지역에 보급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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