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업계에 대해 아는 바도 없고, 출판사 이름을 보고 책을 고르지도 않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기서 나온 책이라면 믿을만하다'고 생각하게 만드는 출판사는 분명 있다. 내게는 '이산'이 그런 출판사다. 이산에서 나온 몇편의 책들은 모두 내게 풍요로운 독서의 기억을 선물해주었고, 이 책 '화려한 군주' 역시 그랬다.
이 책에는 '근대 일본의 권력과 국가의례'라는 부제가 붙어 있다. 저자 다카시 후지타니는 "절대주의 국가의 화려한 의례와 상징들은 근대에 만들어진 것"이라는 전제 아래(물론 이같은 전제는 에릭 홉스봄 등의 선배들에게서 나온 것이며 저자의 독창적인 고안물은 아니다), 천황을 정점으로 하는 근대 일본의 화려한 국가의례를 조명한다. 책은 '근대 이후 국가의례의 형성'이라는 전제를 세워놓고, 메이지 유신 이후 일본에서 나타난 국가의례와 상징적인 행사들을 분석함으로써 전제를 입증해나가는 방식을 취하고 있다.
저자는 전통 혹은 의례의 발명과, 그것을 발명한 메이지 시대 지배계층의 의도에 대해 '망각하기' '기억하기'라는 이름을 붙였다. 메이지 시절의 민중들에게 별반 중요하지 않았던 천황의 불분명한 이미지를 잊게 만들고, 새롭게 강력하고 자비로운, 따라서 충성을 바쳐야할 대상으로서의 이미지를 심는 것, 즉 새로운 기억을 만들어내는 것.
메이지 시대 '천황 만들기'는 두가지 단계에 걸쳐 이뤄진 것으로 저자는 파악한다. 첫째는 저자가 뭉뚱그려 '패전트'라는 용어로 설명하는 천황의 순행이다. 천황은 사람들 앞에 모습을 드러내고, 자신을 보여줌과 동시에 '백성을 굽어보는 윗사람'으로서 새롭게 각인된다. 두번째는 도쿄와 교토가 각각 '능동-현대-현실의 수도' 그리고 '신비-역사-상징의 수도'로 위상이 매겨지는 단계다. 도쿠가와 막부의 근거지였던 도쿄는 막부 시절의 기억이 지워지는 '재형성의 과정'을 겪으면서 제국의 수도로 부상한다. 이토 히로부미를 필두로 한 메이지 신정부의 권력자들은 유럽의 수도들을 모델 삼아 의전의 장소들을 만들면서 도쿄를 재정비한다.
새롭게 구획된 도쿄는 막부의 기억이 탈색되고 제국의 권위가 덧입혀진 곳으로, 더이상 이전의 '에도'가 아니다. 이 새로운 도쿄에서 천황은 메이지 헌법을 하사하고, 황실 결혼식을 거행하고, 승전 기념식을 치른다. 이 모든 과정을 거쳐, 봉건적 군벌체제에 익숙해있던 일본의 민중들은 '국민'으로 거듭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근대에 만들어진 것'이라는 전제에서 보이듯, 분석의 목적은 분명하다. 자못 '역사적인 것' '오래전부터 있었던 것' 따라서 '절대적인 것'으로 여겨지는 의례와 상징들이 기실은 그닥 긴 역사를 갖고 있지 않다는 것, 그러므로 그것들은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 특정 정치세력의 의도적인 고안물에 불과하다는 점을 보여주겠다는 것이다. 저자는 일본인이지만 미국 시카고에서 태어났고, 버클리대학에서 공부했다. 그런 탓인지 일본, 그리고 '그늘진 일본'의 정점인 천황제의 역사를 대단히 객관적으로 서술했다. 객관적 서술 만으로도 책은 충분히 비판적이다. 근대 내셔널리즘의 막중한 무게 때문에 가려지기 쉬운 의례와 상징들을 여러가지 역사기록물을 활용해 설명한 풍부함이 눈에 띈다.
일본, 그리고 내셔널리즘이란 문제에 부딪치면 항상 생각은 '지금, 우리'에게로 돌아올 수 밖에 없다. 일본의 전체주의, 군국주의, 식민주의를 비판해온 우리는, 일본의 네오내셔널리즘을 맘놓고 비판할 자격이 과연 있는가. 명백한 문제를 지적하는 데에 '자격' 운운할 필요가 있나 싶기도 하지만, 역사의 숨겨진 맥락을 구체적으로 되짚어보고 설명해내려는 이런 노력이 우리에게 부족했던 것만은 분명 사실이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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