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맘대로 세계사

어제의 오늘/ 핵무기에 반대한 과학자들의 '마이나우 선언'

딸기21 2009. 7. 15. 15: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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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5년 7월 15일 독일 남부 콘스탄체호수의 마이나우 섬에서는 화학자 오토 한과 물리학자 겸 수학자 막스 본이 주최한 회의가 열렸다. 주로 화학·물리학자 등 과학자 18명이 참석한 이 회의는 겉보기엔 화려할 것 없는 작은 행사였지만, 두 주최자를 비롯한 참가자들은 모두 노벨상을 수상한 당대의 쟁쟁한 학자들이었다. ‘중간자’의 존재를 예언한 일본의 유카와 히데키, X선의 정체를 규명한 독일의 막스 폰 라우에, 노벨화학상과 평화상을 받은 대명사 라이너스 폴링 등이 그들이었다.

“우리들 과학자들은 서로 다른 국적에 서로 다른 정치적 견해를 갖고 있지만 노벨상을 받았다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우리는 지나온 인생을 과학에 바쳐왔고, 과학이 사람들을 더 행복하게 해줄 수 있는 길이라고 생각해왔습니다. 그런데 과학이 인류에게 스스로를 파괴할 수단이 되고 있다는 데에 공포를 느낍니다. 과학이 군사적인 목적에 사용되면서 땅은 방사능으로 오염되고 사람들은 절멸 위기를 맞고 있습니다. 핵무기에 대한 두려움을 통해 전쟁을 억제할 수 있다고 믿는다면 그것은 환상입니다.” 

과학자들은 이 모임에서 핵무기 반대를 분명히 하고 ‘핵 억지력’이라는 개념의 허상을 지적한 선언문을 채택했다. 오늘날까지 과학자들의 살아있는 양심을 보여준 상징적인 사건으로 기념되는 ‘마이나우 선언’이었다. 선언에는 그해 말까지 52명의 노벨상 수상자들이 서명했다.

그 며칠전인 7월9일 버트란드 러셀은 ‘러셀-아인슈타인 선언’을 통해 과학자들에게 반전반핵 행동에 나설 것을 촉구했다. 선언문을 함께 만든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은 그해 4월18일 사망했기 때문에 러셀 혼자 발표를 해야 했지만 아인슈타인이 반핵 캠페인에 말년을 바쳤던 것은 널리 알려져 있었다. 

이 선언이 발표되자 캐나다의 은행가 사이러스 이튼은 과학자들의 모임을 후원해주겠다고 제안했다. 57년 7월 이튼의 고향인 캐나다 노바스코셔주 퍼그워시에서 ‘과학과 국제문제에 대한 회의’가 처음 열렸다. 첫 회의에는 맨해튼프로젝트를 거부하고 나온 폴란드 출신 물리학자 조세프 로트블라트, 현대 유전학의 아버지인 미국의 생물학자 허먼 멀러, 소련의 물리학자 드미트리 스코벨친 등 22명이 참석했다.
훗날 퍼그워시 회의로 불리게 된 이 모임은 러셀 선언을 헌장으로 채택했다. 퍼그워시 회의는 시대의 지성들이 인류 평화와 지구의 미래를 고민하는 모임으로 자리잡았다. 95년 노르웨이 노벨평화상위원회는 핵 군축을 선도한 공로로 로트블라트와 퍼그워시 회의에 평화상을 수여했다. 로트블라트는 러셀 선언을 인용, “인간애를 기억하라("Remember your humanity)”는 수상 소감을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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