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맘대로 세계사

'아랍의 목소리' 움 칼툼

딸기21 2010. 2. 2. 19: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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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래는 사람들의 귀를 즐겁게 하는 데에서 그치지 않는다. 노래는 즐거움을 북돋워주고, 닫힌 마음을 달래준다. 같은 아픔을 지닌 이들을 하나로 묶어주고, 입 밖에 내지 못하는 것들이 선율을 타고 세상으로 흐르게 해준다. 


이스라엘 감독 에란 코릴린이 재작년 발표한 영화 <밴드 비지트(The Band's Visit)>는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의 경찰 악단이 이스라엘 공항에 도착하는 장면에서 시작된다. 악단은 이스라엘 지방 소도시의 초청을 받아 공연을 하러 왔다. 


'절망의 시대'를 위로해준 목소리


해체위기에 빠진 악단에는 이번 공연이 후원자들을 얻고 존재의 명분을 살릴 수 있는 절호의 기회다. 하지만 영어가 서툰 단원들은 실수를 거듭하다가 목적지가 아닌 어느 황량한 작은 마을에 내리고 만다.


영화 <밴드 비지트>.


예기치 못한 하룻밤에 벌어지는 일들을 웃음과 눈물과 재치로 버무린 영화는 서로 다른 문화·언어를 가진 이들이 음악을 통해 교감하는 모습을 그린다. 


영화가 상영되는 86분 내내 스크린에는 음악이 흐른다. 사하라 특유의 절제된 듯하면서도 처연한 음악, 미묘하고 화려한 선율의 아랍 전통음악, 디스코풍의 보니엠 노래들. 하지만 영화를 가장 잘 살려주는 것은 ‘아랍의 목소리’라 불렸던 여가수 움 칼툼(움 쿨숨)의 노래들이다.

사내아이로 꾸며 꾸란 암송을 시킨 아버지

이집트의 배우이자 가수이자 작곡가였던 움 칼툼은 20세기가 시작될 무렵 카이로 북쪽 타마이 에자하이라 마을에서 태어났다. 출생년도는 1898년이라는 설과 1904년이라는 설이 있다. 어릴적부터 노래에 소질을 보여, 이맘(이슬람 성직자)이던 아버지는 어린 딸을 사내아이로 꾸민 뒤 예배에서 꾸란 암송을 시켰다 한다. 


열여섯살 되던 해부터 그녀는 유명 가수였던 아볼 엘라 모하메드 휘하로 들어가 서양 고전 가곡들을 사사했다. 1920년대 카이로로 옮겨가 작곡가 자카리야 아흐마드에게서 우드(류트)를 배웠다. 유명 음악가 아민 알 마흐디와 교분을 맺으면서 그녀는 카이로 음악계에서 이름을 얻기 시작했다. 시인 아흐마드 라미와의 만남은 운명적이었다. 프랑스 소르본 대학에서 공부한 라미는 움 칼툼에게 프랑스 문학을 전해주고, 그녀를 위해 137개의 시를 지었다.

아랍 음악의 거장인 작곡가 모하메드 엘 카사브기를 만나면서 움 칼툼은 공연예술의 중심이던 아랍궁전극장의 마돈나가 된다. 32년 시리아 다마스커스와 이라크 바그다드, 레바논 베이루트·트리폴리 순회공연에 나섰을 때에는 온 아랍이 그녀의 목소리에 열광했다. 


‘음악을 통해 슬픔을 끌어안는 아랍의 어머니’


그녀가 스타가 될 당시 이집트 음악계는 무니라 엘 마흐디야와 파티야 아흐마드라는 두 여가수가 양분하고 있었다. 이들 두 사람은 외모도 뛰어나고 목소리도 아름다웠다. 하지만 움 칼툼이 가진 서정성과 탁월한 감정표현은 두 선배들을 압도했다. 움 칼툼은 미성(美聲)이라기보다는 청중을 압도하는 힘이 느껴지는 목소리를 지녔다. 고전 음악을 배웠던 움 칼툼은 무대와 영화 등을 통해 대중들을 만나면서 ‘음악을 통해 슬픔을 끌어안는 아랍의 어머니’로 변해갔다.


She had the musicality of Ella Fitzgerald,
the public presence of Eleanor Roosebelt,
and the audience of Elvis Presley.
움 칼툼을 다룬 다큐영화 포스터의 문구가 눈에 띈다.


이스라엘이 건국돼 팔레스타인인들이 쫓겨나고 아랍 전역이 슬픔과 분노에 잠겼을 때 그녀의 목소리에는 더욱 힘이 실렸다. 팔레스타인 저항시인 니자르 카바니의 시들도 그녀의 입을 통해 세상에 퍼졌다. 2차대전 뒤 ‘절망의 시대’를 살아갔던 아랍인들에게는 분노와 카타르시스를 안겨주며 동시에 마음을 달래주는 벗이었을 것이다. 44년 이집트의 파루크1세 국왕은 그녀에게 문화분야 최고의 영예를 선사했다. 움 칼툼은 20세기 아랍 최고의 가수, ‘카우카브 엘 샤르크(동방의 별)’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아픔도 있었다. 왕실 일원과 결혼할 뻔했던 움 칼툼은 왕실의 반대에 부딪쳤다. 귀족 계급의 허상을 실감한 그녀는 더욱더 ‘민중 지향적인’ 가수로 변해갔다.

48년 아랍-이스라엘 분쟁 때 일단의 이집트 군인들이 이스라엘군에 포위되자 움 칼툼은 용맹한 병사들을 응원하는 노래를 불렀는데, 당시 갇혔던 병사들 중에는 훗날 이집트 공화국의 아버지가 된 가말 압둘 나세르도 있었다. 나세르는 움 칼툼의 열광적인 팬이었다고 한다. 


방송금지와 해금, 이데올로기 전파수단으로...


공화국 수립 뒤 혁명정부는 옛 왕실을 위해 노래한 적 있는 움 칼툼의 노래들을 방송금지시켰는데, 나세르가 나서서 “이집트 전체를 적으로 돌리고 싶으냐”며 해금시켰다는 일화가 있다. 그후 움 칼툼의 노래는 공화주의 혁명의 이상과 범아랍주의 등 나세르의 이데올로기를 전파하는 도구가 되기도 했다.

40년대와 50년대 움 칼툼의 음악은 황금기를 맞았다. 리아드 엘 홈바티 등 젊은 작곡가들과 교분을 나누며 과거보다 훨씬 가다듬어진 아름다운 선율을 선보였다. 46년에는 ‘시의 왕자’라 불렸던 아흐마드 샤우키의 시에 솜바티가 가락을 붙인 ‘살루 칼비(내 마음에 물어보세요’라는 종교적인 노래를 발표, 엄청난 인기를 끌었다. 49년 발표한 ‘울리다 엘 후다(예언자가 태어났다)’에서는 무함마드를 ‘사회주의자들의 이맘’으로 묘사했다. 나세르의 아랍사회주의가 대중적인 지지를 얻고 있을 때였다. 


50년대에는 음악적 스케일이 더욱 커진다. 라미의 번안과 솜바티의 작곡을 통해 아랍 고전문학의 꽃인 오마르 카이얌의 <루바이야트>를 노래로 만든 것이다. 서양풍 노래에 익숙해져 있던 아랍권 청중들에게 문화와 역사의 자긍심을 일깨워준 일대 사건이었다.

움 칼툼은 1975년 2월 3일 숨을 거뒀다. 이집트에서는 해마다 이맘때면 그녀를 기리는 행사들이 열린다. 2008년에는 아랍에미리트연합(UAE)을 건국한 셰이크 자이드 빈 술탄 알 나하얀이 그녀에게 선물했던 진주목걸이가 두바이에서 경매에 부쳐져 화제가 되기도 했다. 타계한 지 30년이 넘었지만 지금도 아랍을 노래한 그녀의 목소리는 살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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