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기가 보는 세상/아시아의 어제와 오늘

젠더사이드, '사라지는 여성들'

딸기21 2010. 3. 16. 2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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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전 ‘세계 여성의 날’(매년 3월8일)을 앞두고 영국 이코노미스트가 ‘젠더사이드’에 대한 기사를 실었습니다. 세계 여성의 날이 제정된지 100년이 다 되어가고 여성에 대한 사회적 편견이 사라져가면서 미국과 유럽에서는 “더이상 ‘여성의 날’이 존재할 이유가 있느냐”는 여론이 퍼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지구촌 곳곳에서 여전히 여성들은 정치적·사회적·문화적 권리는 물론이고 기본적인 생존권, 이 세상에 ‘존재할 권리’조차 제대로 누리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를 보여주는 것이 이 ‘젠더사이드’라는 현상입니다.


젠더사이드(gendercide)란 성별에 따른 대량살상을 인종말살(제노사이드·genocide)에 빗댄 용어입니다. 1985년 미국 여성작가 메리 앤 워런의 <젠더사이드(Gendercide: The Implications of Sex Selection)>라는 저서에 처음 등장했습니다. 전쟁 시에 적국의 민간인 남성·소년들을 살해하는 남성살해(viricide), 여성들을 집단 강간·살해하는 여성 학살(femicide), 성감별을 해서 태아가 딸이면 중절해버리는 ‘성별 선택’ 등이 모두 젠더사이드에 해당됩니다.


펀자브의 딸들은 어디로 갔나

인도 북부 하리야나주의 난드가온에 사는 바불랄 야다브는 올해 50세가 된 가난한 농부입니다. 신부에게 줄 지참금 문제와 카스트 차이 등으로 번번이 혼인에 실패한 야다브는 “카스트든 재산이든 종교든 모두 상관없고, 내게 아들 하나를 낳아줄 여자만 있으면 된다”고 말합니다. AFP통신이 지난 8일 전한 야다브의 인터뷰 내용은 한국 농촌에서 지금까지 흔히 들을 수 있는 말이죠.

바로 이런 사고방식 때문에 농촌에는 ‘딸들’이 모자라, 많은 남성들이 짝을 찾지 못해 애를 먹습니다. 인도 전체에서 남성 1000명 당 여성 비율은 933명. 하지만 야다브가 살고 있는 하리야나주는 보수적인 농촌인 탓에 여성 비율이 861명으로 줄어듭니다. 

남성 1000명 중 139명은 신붓감을 구하지 못한다는 얘기입니다. 이들은 다른 지역에서 신부를 돈 주고 사오는 수밖에 없습니다. 트럭운전사인 발지트 싱(37)은 26세 때부터 신부를 구하려고 애썼지만 찾지 못해, 아삼 주에서 16세 소녀를 돈 주고 데려왔습니다.


인도 콜카타 거리에서 8일 여성들이 세계 여성의 날을 기념하는 시 낭송에 귀를 기울이고 있습니다. 이날 인도 의회는 연방·지방의회 의석 3분의1을 여성에게 할당하는 역사적인 법안을 통과시켰습니다. |AP


여성 인구가 적은 것은 출생시부터 ‘성별 선택’을 하기 때문입니다. 이는 농촌에 국한된 일이 아닙니다(더불어 인도에만 국한된 일도 아니죠). 수도인 뉴델리에서 남성 1000명당 여성인구는 821명에 불과합니다. 자연성비대로라면 여성이 근소하게 모자라야 하는데, 뉴델리의 경우 격차가 너무 큽니다. 여성의 20%는 어디로 사라진 걸까요?

2008년 캐나다의 국제개발연구센터(IDRC)는 펀자브, 하리야나, 마드야 프라데시, 히마찰 프라데시 4개 주에서 ‘모자라는 소녀 수’를 조사했습니다. 결과는 충격적이었습니다. 카스트제도가 여전히 맹위를 떨치는 펀자브 주의 상층카스트에서는 아들 1000명 당 딸 300명이 태어났습니다. 세상에 나와야 할 딸들의 70%가 중절수술이나 영아 살해 등으로 사라진다는 얘기입니다. 프랑스 인구개발연구센터(CEPED) 조사에서도 결과는 거의 비슷했습니다.

'몸값' 폐지됐지만 여아 살해 여전

가난한 농민들은 “자식을 여럿 키울 형편이 안 되면 아들을 키우는 수밖에 없다”며 여아 중절을 당연시한다고 합니다. 1961년 이미 인도 정부가 딸을 시집보낼 때 신랑 집에 지불하는 몸값을 폐지시켰지만 여전히 일부 지역에는 그릇된 몸값 풍습이 남아 있습니다. 상층카스트이건 하위카스트이건, 부자이건 빈농이건, 딸보다는 아들을 택합니다. “시집보낼 몸값이 걱정되어서”, “딸에게는 농지를 물려줄 수 없으니까”, “딸보다는 아들의 노동력이 필요하니까” 등등 이유는 다양합니다.

부유층 여성들은 임신 단계에서 성감별 뒤 여아를 낙태합니다. 병원에 갈 돈도 없는 빈민·빈농들은 딸이 태어나면 갓난아기를 질식 등의 방법으로 살해합니다. 명백한 살인이지만 처벌받는 일은 거의 없습니다. 정부와 여성·보건단체들이 ‘여아 살리기(Save the girl child)’ 운동을 하고 있으나 국민들의 인식을 바꾸기엔 아직은 역부족인 모양입니다. 


이코노미스트는 여아 살해가 널리 퍼져있거나 급격히 증가하고 있는 국가들로 ‘미개발국에서 개발도상국으로 이행하고 있는 나라’들을 꼽았습니다.

개발이 진행되는 나라에서는 노동력 구성이 농민에서 제조업노동자로 급속히 이행하면서 ‘자식 수=가족의 부’라는 공식이 깨집니다. 과거의 한국도 그랬지만 중국의 경우도 정부가 강력하게 산아제한 정책을 추진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굳이 정부가 강제적으로 출산을 제한하지 않더라도 ‘중산층’으로의 이행을 꿈꾸는 국민들은 자연스럽게 산아제한을 택하게 된다고 합니다. 이럴 경우 십중팔구 여아들이 제물이 된다는 거죠.


사라진 1억명

젠더사이드 문제를 경제학의 영역으로 끌어들여 분석한 사람은 노벨경제학상을 받은 인도의 석학 아마티아 센이었습니다.

영미권 경제학자들과 달리 제3세계의 경제학, 경제적 불평등의 이론적·수학적 계산 등에 천착해온 센은 1990년 세계 인구의 자연성비와 실제 성비를 분석한 뒤
“약 1억명의 여성들이 ‘사라진(missing)’ 상태”라고 지적한 바 있습니다. 당시 세계 인구에 자연성비를 대입, 추산한 여성 숫자보다 실제 여성 인구가 1억명이나 모자랐다는 뜻입니다.

20년이 지난 지금은 인구규모가 커졌기 때문에, 인구분포에서 사라진 여성 수도 더 늘었을 것으로 보입니다. 사라지는 이유는 여아 살해, 출산시 사망, 영양 결핍으로 인한 사망 등 여러가지입니다. 그러나 그 중 가장 큰 요인은 여아살해(낙태 및 영아살해)로 추정됩니다.

딸들을 가장 많이 살해하는 나라로는 중국과 인도를 들 수 있습니다. 유엔개발계획(UNDP)은 최근 보고서에서 “중국과 인도에서 ‘사라지는’ 여성 숫자가 8500만명에 이른다”고 밝혔습니다. 전세계 젠더사이드의 대부분이 두 나라에서 일어나는 셈입니다. 아시아 전체로 보면 여아 100명당 남아 119명이 출생하는 것으로 조사됐습니다. 세계 평균이 남아 107명인 것과 큰 차이가 납니다.

아르메니아, 아제르바이잔, 그루지야 등 유라시아 내륙 카프카스 지역도 여아 살해가 많은 지역으로 거론됐습니다. 이코노미스트는 경제발전과 함께 여아 살해가 많이 줄어든 나라로 한국을 꼽으면서 “중국이나 인도 등 아시아 개도국들에서 여아 살해가 줄어들려면 경제발전이 훨씬 더 진행돼야 할 것”이라고 내다봤습니다.


세계 여성의 날인 지난 8일, 나이지리아 중부 도시 요스 부근의 한 기독교 마을을 유목민들이 습격, 500여명을 학살했습니다. 숨진 이들 대부분은 여성과 어린이들이었습니다. |AFP


성인 여성들을 집단 학살하는 명백한 대량학살도 종종 일어납니다.

특정 인구집단의 ‘씨를 말리기 위해’ 내전·분쟁 때 상대방 여성들을 학살하는 만행은 오랜 옛날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근세에 들어와 저질러진 것만 해도 1864~70년 파라과이 전쟁, 1965~66년 인도네시아군의 동티모르 점령전쟁, 70~80년대 인도 카슈미르·펀자브·뉴델리 종교분쟁, 스리랑카 타밀 분쟁, 88년 이라크군의 쿠르드족 공격(안팔 작전), 90년대 동유럽 코소보와 보스니아 내전 등에서 여성 학살이 일어났습니다.

종족말살과 여성혐오 범죄들

 94년 르완다 툿시(투치)-후투족 내전 때에는 두 종족이 서로 상대방을 무차별 학살했지만, 특히 여성들을 상대로 한 강간과 살인이 심했습니다.

 미국 민간단체인 ‘젠더사이드 와치’ 등은 수단 다르푸르 학살을 최근에 일어난 대표적인 사례로 꼽습니다. 다르푸르에서는 아랍계 민병대들이 아프리카계 마을들을 돌아다니며 여성들을 집단 강간·살해했습니다.

 
혐오범죄로 분류되는 젠더사이드도 적지 않습니다. 국내에서도 여성들만을 노린 연쇄살인범들이 몇년 새 여러명 등장했고, 이들 모두 성적 증오감을 범죄 이유 중 하나로 들었지요(여성들을 위협하는 사회, 한국도 거기서 결코 자유롭지 않지요).

 범죄조직들이 판치는 멕시코 북부 국경지대에서는 강호순 범죄나 화성 연쇄살인사건과 양상이 비슷하면서 훨씬 규모가 큰 여성 연쇄살인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미국과 접경한
멕시코의 시우다드 후아레스에서는 90년대 후반부터 400명에 가까운 여성들이 살해됐습니다. 그 중에는 아직 미성년인 어린 소녀들도 적지 않았습니다.

 여성단체들은 파키스탄, 터키, 사우디아라비아 등 이슬람권에서 ‘명예살인’이라는 이름으로 남성 가족구성원들이 여성을 살해하는 것도 젠더사이드라고 지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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