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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혜옹주(德惠翁主)는 고종이 예순이 되던 해에 1912년 후궁인 귀인 양씨에게서 얻은 고명딸이다. 경술국치(1910년) 뒤 2년이 지난 때라 시국이 몹시 어수선했지만 고종은 외동 딸을 몹시 사랑해, 양씨에게 복녕(福寧)이라는 당호(堂號)를 내리고 즉조당에 유치원까지 만들었다고 한다. 하지만 옹주의 인생은 순탄치 않았다. 일본 총독부가 양씨의 신분을 문제삼아 옹주를 조선 왕실의 일원으로 인정하지 않았기에 어릴 적에는 이름도 없이 ‘복녕당 아기’로만 불렸다. 고종이 서거한 뒤인 21년에야 옹주에 봉해지고 덕혜라는 이름을 얻었다.
오라버니 영친왕처럼 인질 격으로 일본에 억지 유학을 하게 된 덕혜옹주는 도쿄 가쿠슈인(學習院) 대학에 들어갔지만 적응하지 못했다. 30년 어머니인 귀인 양씨가 숨을 거뒀는데도 돌아와보지 못하다가 신경쇠약에 걸렸고 한때 정신분열증 증세를 보이기도 했다고 한다. 이듬해 일본 조정의 명령으로 대마도(쓰시마) 도주(島主) 소 다케유키(宗武志
)와 강제로 결혼을 했다. 다케유키와 찍은 사진에 남아 있는 젊은 시절 옹주는 가냘픈 체구를 가진 미모의 여성이다. 딸 마사에(正惠·정혜)를 낳았지만, 지병이 악화돼 53년 자신도 모르는 새 이혼을 당했다. 55년에는 하나 뿐인 딸 마사에마저 행방불명됐다. 마사에가 부산과 시모노세키를 잇는 부관(釜關) 연락선을 타고 가다 바다에 뛰어내려 목숨을 끊었다는 얘기도 있다.
옹주의 삶은 구한말과 근대 초 비운의 조선을 축약한 듯 비극의 연속이었지만, 정작 국내에는 잘 알려지지 않았다. 도쿄 근교 정신병원 등을 전전하고 있는 옹주의 소식이 한국에 들려온 것은 61년이 되어서였다. 당시 일본에 들른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이 영친왕의 부인이던 이방자 여사와 만났다가 덕혜옹주의 이야기를 듣고 그제서야 옹주의 존재를 알았다는 얘기가 있다. 박정희 정권의 구황실재산법 시행령에 따라 구황실 일원으로 인정받은 옹주는 62년 비로소 귀국할 수 있었다. 그 뒤 이방자 여사, 유모인 변복동 여사와 함께 창덕궁에 살았지만 건강이 악화돼 서울대병원 병실에서 10년 가까운 세월을 보냈다.
옹주는 89년 4월 21일 수강재(壽康齋)에서 타계했고, 아버지 고종황제의 능인 홍릉(洪陵) 뒤에 묻혔다. 최근 옹주의 인생을 그린 소설(<덕혜옹주>·권비영 작)가 출간돼 ‘조선의 마지막 황녀’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고, 지난 18일에는 홍릉의 옹주 묘역에서 민간단체 주최로 추모제가 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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