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기가 보는 세상/유럽이라는 곳

메드베데프 '모스크바의 목을 치다'

딸기21 2010. 9. 29. 2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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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라디미르 푸틴이 자칭타칭 러시아의 ‘국부급’ 지도자인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그렇다면 러시아에서 푸틴 다음가는 권력자는 누구일까요?
러시아에 가본 적은 없습니다만, 현재로서는 드미트리 메드베데프 대통령이 2인자겠지요. 하지만 얼마전까지만 해도 메드베데프와 어깨를 겨누던 사람이 있었습니다. 18년 동안 모스크바 시장을 지낸 유리 루쉬코프입니다.

메드베데프가 그런 루쉬코프를 전격 해임했습니다. 루쉬코프는 ‘대통령의 신임을 상실했다’는 이유로 1992년부터 지금까지 18년간 차지해왔던 모스크바 시장직을 내놨습니다. 루쉬코프는 거세게 반발하고 있고, 푸틴은 애매한 입장만 보이고 있습니다.

2012년 러시아의 차기 대권이 푸틴에게 다시 갈지, 아니면 메드베데프가 권좌를 돌려주지 못하겠다고 버틸지 아직은 알 수 없습니다. 그런 상황이기에, ‘모스크바에서 생긴 일’이 각별한 관심을 불러모으고 있습니다.



2002년 친선 축구경기에 참가했을 때의 유리 루쉬코프.
모스크바타임스가 딱 요런 사진을 골라 인터넷판에 올렸네요.



‘모스크바의 목을 친’ 메드베데프

메드베데프는 지난 28일 중국 방문 중에 성명을 발표, “루쉬코프는 나의 신뢰를 잃었다”면서 해임 결정을 알렸습니다.
메드베데프와 루쉬코프의 갈등은 새로운 것은 아니었지만 특히 지난달부터 사이가 부쩍 멀어졌습니다. 영자지 모스크바타임스 인터넷판에 따르면 지난달 루쉬코프는 로시이스카야 가제타에 기고를 해, 모스크바 근교 힘키 숲을 통과하는 고속도로 건설을 지지한다면서 푸틴 편에 섰습니다. 푸틴은 이 도로를 지어야 한다는 입장, 메드베데프는 반대 입장이었다고 합니다.

루쉬코프는 공식 성명을 내지는 않았지만 더뉴타임스 매거진에 보낸 서한에서 “2008년에 모스크바 지사선거를 독립적으로 치르게 해달라 요구한 것, 그리고 최근 킴키 고속도로 건에서 반대편에 선 것에 대한 보복조치”라 주장했다고 합니다. 루쉬코프의 임기는 내년 7월 만료될 예정이었습니다.

루쉬코프는 반발의 표시로, 스스로 창당에 관여했던 집권 러시아연합에서도 탈퇴를 했습니다. 루쉬코프의 절친한 친구이자 정치적 동지 격인 이오시프 코브존 국가두마(하원) 부의장도 “크렘린은 모스크바의 목을 자른 이유를 해명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이 루쉬코프라는 사람은 1936년 모스크바에서 태어난 토박이입니다. 구브킨 석유가스학교를 졸업하고 엔지니어로 일하면서, 옛소련의 기술관료로 성장했습니다.
루쉬코프를 키운 것은 보리스 옐친 전대통령입니다. 1987년 공산당 모스크바 지부장이었던 옐친은 루쉬코프를 시 집행위 부위원장에 발탁하지요.

그곳에서 루쉬코프는 인생에서 옐친보다도, 푸틴보다도 더욱 중요한 사람을 만납니다.
두번째 부인이 된 옐레나 바투리나입니다. 현재 74세인 루쉬코프보다 27살 아래인 바투리나는 러시아의 여걸, 철의 여인, 크렘린의 돈줄로 유명하지요.
바투리나는 시 집행위에서 일하다가 나와 인테코(Inteko)라는 건설회사를 세웠는데, 이 회사가 승승장구를 해서 지금은 억만장자가 됐습니다. 러시아의 유일한 여성 억만장자로, 포브스지 집계에 따르면 재산이 29억 달러(약 33조원)에 이른다고 합니다.

이 부부는 옐친과 ‘권력의 삼각형’을 이뤘던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사실 남편의 정치적 성공과 아내의 사업 성공은 회전문과도 같은 것이었다는 지적입니다. 루쉬코프는 1992년 옐친에 의해 모스크바 시장으로 임명됐는데, 거기에도 바투리나의 돈이 큰 영향을 미쳤다고 하지요. 아내는 돈으로 남편을 밀어주고, 남편은 권력으로 아내 쪽에 토건사업을 몰아주는 관계랄까요.




우울한 루쉬코프



실제로 루쉬코프는 근 20년간 시장으로 있으면서 모스크바를 ‘토건공화국’으로 만들었습니다. 그의 재임 시절 모스크바엔 부동산 붐이 일었고, 도로 확장이다 건물 신축에 재개발이다 해서 부산했습니다. 인프라가 확충되고 모스크바는 ‘현대적인 도시’로 탈바꿈했지만 부작용도 만만치 않았습니다. 몇해전에는 모스크바가 ‘세계에서 가장 물가가 비싼 도시’로 기록되기도 했는데 그 뒤에 부동산 투기바람이 있었다는 겁니다.
유리와 철골로 된 ‘모던 빌딩’들과 마천루를 세우면서, 로시야 호텔 등 유서깊은 소비에트 시절의 랜드마크들을 없애거나 재건축해 비판을 받기도 했습니다.

루쉬코프의 지지율은 줄곧 70~80%를 유지해왔습니다만 말도 탈도 많았습니다. 루쉬코프는 돈 많은 아내, 그리고 바투리나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이제 10대인 두 딸을 위해 영국 런던에 집을 두고 있는데 이런 화려한 생활에 대한 비난과 각종 부패 의혹도 끊이지 않았습니다.


메드베데프의 ‘단독 결단’?

루쉬코프의 해임을 놓고 모스크바 정계에선 해석이 분분합니다.
메드베데프와 루쉬코프 간 갈등이 불거지고 나서, 이달 초부터 러시아 국영언론들은 모스크바 시 관리들의 부패 의혹을 집중적으로 제기하며 루쉬코프의 목을 죄어들어갔습니다. 루쉬코프는 모스크바가 산불로 인한 스모그에 휩싸여 대란이 일어났던 지난 8월 호주에 휴가를 가 있으면서 즉시 귀환하지 않아 크렘린의 공격을 받을 빌미를 주었습니다.
그 뒤 루쉬코프의 신상에 변화가 있을 것이라는 관측이 나왔지만 메드베데프가 상하이 방문 중에 ‘전격적으로’ 해임 결정을 발표할 것이라고는 예상하지들 못했다고 합니다. 메드베데프는 해임 사유를 구체적으로 밝히지는 않았지만 “내 신뢰를 잃었다”며 이례적으로 ‘거친 비난’을 했습니다.

대통령을 지내는 8년 동안 부패 스캔들로 얼룩진 루쉬코프를 계속 연임시키며 힘을 실어줬던 푸틴도 이번 사건에서는 루쉬코프 편을 들어주지 않았습니다.
푸틴은 채널1 TV 인터뷰에서 28일 “루쉬코프는 모스크바를 현대화시키는 등 많은 일을 했지만 대통령과 좋은 관계를 이루지 못한 것은 분명한 잘못이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면서 “시장이 대통령에게 종속되어야지, 그 반대는 안된다”고 못박았습니다. 시장 인사는 엄연히 대통령의 권한이라는 겁니다.

러시아 블로거들이나 정치분석가들 사이에선 “이제야 우리에게 대통령이 생겼다”는 반응이 지배적이라고 합니다.

News Analysis: Medvedev Shows He‘s His Own Man

2008년 그루지야가 도발을 해왔을 때 러시아는 예상을 깨고 군대를 보내 그루지야를 침공, ‘벌’을 주었습니다. 그 때 메드베데프는 “내가 군 투입을 최종 결정했다”고 수차 강조했습니다. 하지만 그루지야조차 “푸틴의 결정일 것”이라며 믿지 않았다고 합니다.
메드베데프는 집권 이래 경찰개혁과 부패청산 등 여러가지 ‘플랜’을 내놓았지만 대개는 순진하고 아마추어적이어서 성과를 거두지 못했습니다. 당초 예상됐던 ‘탈 푸틴 민주화’는 이뤄지지 않았습니다.



28일 상하이엑스포를 관람하고 있는 메드베데프 / AP·RIA-Novosti
Medvedev visiting Russia’s pavilion at the Shanghai World Expo on Tuesday.



그런데 루쉬코프를 내친 이번 결정만큼은 메드베데프의 ‘단독 결정’으로 보인다는 겁니다. 일각에선 “루쉬코프가 푸틴의 신임을 과신했다”는 얘기도 나옵니다. 루쉬코프는 90년대 후반 한동안 대권을 꿈꿨지만, ‘혜성처럼 등장한’ 푸틴에게 권좌를 내줬고 그 후 푸틴에게 충성을 바쳤습니다. 푸틴은 2007년 루쉬코프를 네번째로 연임시키는 ‘보답’을 해줬습니다.

하지만 최근 푸틴과 메드베데프 간에 모종의 정치협상이 벌어졌고, 메드베데프는 권력자연 하는 루쉬코프를 제거하도록 푸틴에게 압박을 가해 결국 양보를 얻어낸 것으로 분석됩니다.
근래 메드베데프가 외교안보 분야에서도 푸틴을 밀어내며 야금야금 성과를 거두고 있다고 합니다. 세계무역기구(WTO) 가입협상을 재개한 것, 푸틴의 대서방 강경자세로 마찰을 빚었던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와의 갈등을 봉합한 것, 유엔에서 이란 제재안을 지지하며 미국 편에 선 것 등이 그런 예입니다.

물론 아직까지 메드베데프가 푸틴을 ‘눌렀다’고 할 수는 없지요.
뉴욕타임스는 “모스크바 시장을 잘랐다고 해서 ‘누가 러시아를 다스리는가’라는 문제가 풀린 것은 아니다”라고 지적했습니다. 메드베데프가 ‘단독으로’ 결정을 했는지는 모르지만 여전히 푸틴의 허가가 필요했을 것이고, 따라서 아직도 “보스는 푸틴”이라는 거지요.

Mayor’s Fall Doesn’t Settle Who Rules in Russia

어쨌든 메드베데프가 2012년 대선을 앞두고 한 걸음 내딛는데 성공한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차기 모스크바 시장을 누구로 내정하느냐가 중요하겠지요. 모스크바타임스는 대통령실장이면서 푸틴과도 긴밀한 세르게이 소비야닌 등이 물망에 오르고 있다고 보도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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